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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22화 (22/140)

22화

나, 나 저거 안다! 저거 그 신성!

치유!

“하지 마!”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온 강한 외침에 체이트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조금 난감해졌다. 내가 생각해도 아픈 사람치고 심히 우렁차긴 했지.

아니, 알 바인가. 애먼 성력이 쓸데없는 곳에 낭비되게 생겼는데.

“내가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이거 사실 생리통이야.”

“아, 그렇습니까?”

체이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또한 신성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믿고 맡기시지요, 누님.”

뭐야, 그거. 엄청 개꿀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매달 진통제 5알을 씹어 삼키기 전에 진작 좀 부탁할걸.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아니, 괜찮아.”

나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한테 괜한 성력을 낭비하지 마, 체이트.”

평소답지 않게 자애로운 척 말하자 체이트가 잠깐의 망설임 끝에 신성을 거두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누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러고는 녀석은 나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행은 다음에 가야겠군요. 정말 아쉽습니다.”

저 말이 아쉽기는커녕 홀가분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음, 난 원체 헛다리를 잘 짚으니까 이번에도 착각에 불과한 거겠지.

* * *

여행이 취소되었으므로 난 다시 카페 사장으로 돌아와 영업을 재개했다.

평소처럼 주문받고, 로체에게 커피를 부탁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인생 되는 일이 하나 없군.’

하긴 원하는 대로 척척 되는 인생이었으면 빙의를 해도 이런 유리 몸에 들어왔겠냐.

원래 엑셀을 무한대로 밟아도 브레이크 3초 간격으로 누르고 과속 방지턱에 삼 연속 걸린 것처럼 탈탈거리는 차들이 있다.

최근엔 내 인생이 그런 쪽이 아닐까 생각 중이다.

“안녕, 레아 양.”

와중에 우리 가게 단골이자 내 커피를 좋아하는 유일한 손님, 델린 남작 부인이 카페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자신만만하게 새로 산 로스팅 원두를 꺼내자 델린 남작 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오늘은 그거 마시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어쩐 일로……?”

“그게 말이지.”

델린 남작 부인이 볼에 홍조를 띠고 흥분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레아 양! 드디어 매칭됐어!”

“……뭐가요?”

“자기 짝!”

“네?”

제 짝이요?

……이제 와서요?

* * *

“어, 그니까요.”

앞서 계획한 대로 내 쪽에서 먼저 결혼한 후, 넌 언제 장가가냐고 명절날 종갓집 어르신처럼 들들 볶아대기엔 이제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앞으로 어찌할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이건 거절하는 게 맞다.

“죄송하지만 제가 더는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어머, 정말?”

델린 남작 부인이 토끼 눈을 뜨고 물었다.

“예. 말씀만은 감사드려요.”

남작 부인의 눈썹이 어깨와 함께 팔 자로 축 늘어졌다.

“뭐야. 애써 딱 맞는 남자로 찾아왔는데.”

“……딱 맞는 남자요?”

“응. 레아 양 말대로 빠르게 결혼할 수 있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데다가 자식 생각도 없는 남자.”

그런 유니콘이 진짜로 이 로판 사회에 남아 있었단 말입니까?

난 꿩 대신 닭이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슬쩍 떠보았다.

“……직업은요?”

“의사. 탄탄하지?”

“오오.”

자연스럽게 감탄이 나왔다.

“나이는?”

“레아 양보다 다섯 살 정도 많을걸.”

다섯 살? 뭐 그 정도야.

“제가 잠시 고민을 좀…….”

“아, 그리고 외국인이야. 국제결혼 괜찮아?”

“너무 좋습니다.”

앗, 입이 먼저 긍정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건 둘도 없는 기회인걸?

여기가 서양 배경 사회긴 한데 K-로판이 본판인지라 은근히 보수적인 구석이 많았다.

결혼도 사실혼은 거의 없고 보통은 혼인신고부터 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신분 불투명한 나로선 기본 전제조건 외에도 사랑의 걸림돌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국제결혼이라면 말이 다르지! 흔치 않은 만큼 절차가 허술하니 우회할 방편도 수어 가지에 국적변경만 마치면 완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 수도 있다고!

그럼 나는 법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받은 순수 자유민이 된다.

그 말인즉슨.

‘브링스턴의 신분을 제대로 세탁할 기회가 생긴다는 뜻!’

어쩌다 보니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한 뻘짓에 공을 들이고는 있지만, 나는 사실 내 앞가림하기도 벅찬 처지였다.

그래, 내 코가 석 자다.

세계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내 미래도 못잖게 중요하지.

나는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만나 볼게요, 그 남자.”

* * *

북부 카히텐 성.

이안은 집무실에서 흰 종이를 한 장씩 뒤로 넘겼다. 보좌관들이 아르키드네의 대주교를 추적하면서 보낸 결과 보고서였다.

어조는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의 본질은 한결같았다.

흔적 없음. 추적 불가.

이래서야 타 귀족 집안의 보좌관 평균 연봉을 월급으로 쥐여 준 보람이 없다.

“쯧.”

이안은 짧게 혀를 차며 보고서를 내던졌다. 코끝에 걸쳤던 안경도 내려놓았다.

북부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 일주일. 거기에 일주일이 더 지났으니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난 셈이었다.

대주교의 행방은 여태 묘연했다.

그 정도 거물이 단독으로 움직였는데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니, 보통 치밀하고 영리한 작자가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 고작 스물셋 나이에 대신전을 장악했겠지.

갑작스럽게 남부로 들어 온 묘령의 사내 하나가 압도적인 성력을 기반으로 대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사내가 남부에 당도한 것이 3년 전, 대주교의 권좌를 정식 승계한 것은 고작 반년 전의 일이었다.

자기들끼리 눈치싸움을 하며 허허 웃고 있던 열두 명의 주교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눈 뜨고 코 베인 격이었겠지.

하여 대신전을 중심으로 전 대륙에 걸쳐 지어진 12개의 신전 주교들은 항시 대신전의 새로운 주인을 시퍼렇게 날 선 눈으로 주시해 왔다.

그 모든 이목을 물리치고 끝끝내 도주라.

‘기가 막히는군.’

그는 버릇처럼 시가를 꺼내 끄트머리를 잘랐다. 흡연은 일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여가를 즐길 틈이 없어서 생긴 악습이었다.

이러다가 보고서에 머리를 처박고 급사하는 건 아닌지.

씁쓸하게 자조했다.

온종일 집무실에 박혀 있던 탓에 두통이 밀려왔다.

뭐든 새로운 단서라도 잡히면 좋겠군. 연기를 내뿜으며 가는 한숨을 내쉬자 시의적절하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제스입니다, 전하.”

“들어와라.”

그의 수석 보좌관, 제스가 정중하게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이안과 함께 업무를 처리하느라 내내 퀭하던 눈이 웬일로 반짝반짝했다.

“보고해.”

“찾았습니다, 전하.”

그 말에 이안이 시가를 비벼 끄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위치는?”

“북부 넴페르 산맥 너머 20가구 규모의 작은 마을입니다.”

“감히 나와의 약속을 깨고 북부로 오다니, 배짱도 좋군.”

이안이 코끝으로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당장 데려…… 아니, 직접 가지.”

“그러시겠습니까?”

제스가 반색했다. 북부로 돌아온 후 일에 치여 퇴근도 못 하고 본성에서 숙직한 지 어언 이 주, 제스는 어디든 나가고 싶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그 손을 잘라서라도 공증을 받아내야지.”

“예, 예. 그 손을 잘라서라도…… 예?”

습관적으로 호응하던 제스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굳이 손까지 자르실 것까진…… 아.”

그의 동공에 물음표가 하나 달렸다가 이내 느낌표로 변해갔다.

제스가 난처한 얼굴로 입술 끝을 움찔거렸다.

“아, 그게. 그분이 아닙니다.”

“뭐?”

자기도 모르게 비벼 꺼 버린 시가를 떨떠름하게 응시하던 이안이 새 시가의 꽁지를 자르다가 제스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르키드네 대주교에 대한 수색 건이 아니라고요.”

이안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제스가 쓰게 웃었다.

이거 원, 완전히 잊고 계셨나 보군. 또 다른 수색이 벌써 몇 년째 진행 중이었다는 걸.

“전하의 약혼자, 레이디 레티시아 브링스턴 말입니다.

“…….”

“찾았습니다.”

이안의 반듯한 미간에 실금이 생겼다.

“……몇 년째 진척도 없던 걸 왜 갑자기.”

진척이 없던 건 당연했다. 이안 본인이 수색에 공을 들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이안이나 여타 보좌관들의 노력이 아니라, 레티시아의 실책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건가.’

원하던 상대를 아직 오리무중이고 도리어 성가신 일만 늘게 생겼다.

그는 밀려오는 짜증을 뒤로 하고 제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찾아냈지?”

“그것이 말입니다…….”

제스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난처해졌다. 앞선 오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곤란함이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우리 대공 전하의 체면이 안 망가지려나.’

부디 전하의 천금 같은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길 바라며, 제스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전하, 그 혹시…… ‘우심결’이라고 아십니까?”

“그게 뭐지? 새로운 용병단 이름인가?”

“아뇨, 그보단 훨씬 부드럽고 달달한 일을 하는 곳인데, 그게.”

“……?”

“요즘 중산층에서 유행하는 회사인데, 그, 저희가 확인해 본 결과…….”

“……제스트리아 빈델.”

헉, 풀네임 불렸어.

제스가 두 팔을 가로질러 가위표 모양으로 제 어깨를 감쌌다.

“3초 주지. 대답해.”

답답함에 인상을 찡그리며 새 시가를 입에 문 이안이 가차 없이 데드라인을 통보했다.

일그러지는 주군의 표정을 보며 제스의 마음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3.”

“허억!”

“2, 1.”

“0.5초잖아요! 반칙입니다!”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위기감을 느낀 제스는 필터링 없이 냅다 내지르고 보기로 결심했다.

“우리 심심한데 결혼이나 할까!”

“……뭐?”

“……라는, 문장의 약자로 불리는 결혼 정보 회사입니다.”

이안의 얼굴에서 점점 인내라는 단어가 사라져 갔다. 제스가 얼른 90도로 허리를 꺾고 줄줄이 외쳤다.

“그 업체에 글쎄 마님…… 아아니, 브링스턴가 영애께서 가입돼 있지 뭡니까!”

“……누가, 어디에?”

내 약혼자가 어디에 가입돼 있어?

……결혼 정보 회사?

한 귀로 흘려들었던 업체의 이름이 그제야 머리에 들어왔다.

은발벽안의 냉미남이 직관적인 작명 센스를 보유한 업체명을 무심코 중얼거렸다.

“우리…… 심심한데 결혼이나 할까?”

제스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싫습니다!”

동시에 이안의 입에 물려 있던 시가가 툭 떨어졌다. 사색이 된 제스를 무시하고 그가 물었다.

“그래서 십 년간 실종 상태였던 내 약혼자가 지금 딴 놈이랑 놀아나서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기 직전이란 말이지?”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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