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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23화 (23/140)

23화

말씀이 다소 비약적이신데요.

제스는 이번에도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주군의 말에 입맞춰 주었다.

“계약……. 뭐, 혼인 신고서도 계약이라면 계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떨떠름하게 대꾸하는 제 부하의 태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안은 테이블 위를 응시했다. 늘 또렷하다 못해 날이 바짝 서 있던 시선이 웬일로 망연했다.

“내 약혼자가 결혼을 한다?”

아니, 약혼은 십 년 전 일이니 잊힐 때도 됐지.

자신도 그 여자가 새 인생 찾아서 결혼을 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굴 만나서 백년해로를 하든 말든.

상관없…….

없…….

꾸깃-

순간 울컥해서 자기도 모르게 서류 더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브링스턴 후작은 제 여식이 평생 나와의 혼인을 꿈꿔 왔다고 했는데?’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주군을 보며 제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 번도 까여 본 적 없으신 분이라 당황하고 계시는군.’

어쩌지? 너무 고소해서 기분이가 좋아.

그래도 참아야 한다. 이거 티 내면 감봉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제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심각한 생각에 몰두했다.

예를 들면 암살자를 피해 움직이다가 이안과 함께 동굴에 단둘이 갇히는 상상.

그런데 이안이 아파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를 안아서 몸을 녹여 줘야만 하는…….

‘좋아, 심각해졌다.’

제스가 심각하다 못해 침통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명 기입란엔 가명을 사용하셨습니다. 거주지 외의 정보도 모두 최소한의 기본 정보뿐이었고요. 원래라면 확인조차 할 가치가 없는 자료였지요. 다만, 추가 정보로 올라온 초상화의 생김새가 브링스턴 후작 영애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가명을 썼다고?”

이안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레아 핀볼트라는 이름의 평민으로 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 외의 디테일한 정보는 기입돼 있지 않았습니다. 하필 그 지방 영주의 부인이 신원 보증을 서서 신청 서류에 공란이 많더군요.”

그렇게 다 가렸는데 구태여 제일 신분 노출의 위험이 큰 초상화만 올려놓았다?

진심으로 숨어 지내려는 사람이 왜 그런 바보 같은 자충수를 두었을까.

이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피식거렸다.

“알아봐 달라는 거군.”

“예?”

“내가 오랜 시간 자신을 찾지 않으니 스스로 미끼를 던진 거야.”

“……예?”

그거 지금 밀당 말하는 건가. 밀당을 십 년 동안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카히텐 대공을 짝사랑하는 귀족 영애들이 어림잡아 한 트럭이긴 했다.

브링스턴 후작의 증언까지 있었으니 우리 전하가 저런 대가리 꽃밭 같은 생각을 하실 수도 있지.

아니, 그렇지만 자그마치 십 년이 지났는데요?

“그리 놀랄 것 없다. 결혼 당일에 사라질 때부터 징글징글한 여자라는 건 진작 알아봤으니. 단순 실종이 아니라 자의로 한 도피라니, 내게 어떤 인상을 남겨 주려고 했는지 충분히 알겠어.”

제스의 경악한 표정을 곡해한 이안이 특유의 치명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 줘야겠지.”

하나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녀 줄 마음은 없다. 이번에야말로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두 가지 선택지를 줄 것이다.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이대로 쥐 죽은 듯 살 것인지, 아니면 얌전히 끌려와서 인형처럼 살 것인지.

그 어떤 순간에도 제게 사랑을 구걸한다면 가차 없이 그 손을 뿌리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아니, 레아 핀볼트가 어디에 산다고?”

이안이 보좌관 외무 증명서를 작성 후 제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이 무심한 낯으로 말했다.

“안내해라, 제스. 당장 거기로 가지.”

제스는 행동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제 주군을 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허우대 완벽한 남자가 꼴값을 너무 못하는 것도 문제구나.’

그놈의 강박증 때문에 다가오는 여자와 손끝 하나 스치지 않은 채 이 시대의 철벽남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인기 많은 모솔.

‘자기가 잘난 건 아는데 막상 여자 마음은 쥐뿔도 몰라.’

쟤는 남들이 당연히 지를 좋아하는 줄 알더라.

하지만 외출이 고팠던 제스는 잽싸게 증명서를 받아 들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여기서 나흘 정도 걸립니다. 금방입죠.”

사실 마차가 아니라 기차로 간다면 하루 반이면 가는 거리지만 과장 좀 해 봤다.

간만의 휴식이 아닌가. 돌아오면 남는 건 산처럼 쌓인 서류뿐인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야지.

* * *

원래 연애는 환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라지?

그렇게 어렵게 조건에 딱 들어맞는 매칭남을 찾았건만, 막상 대화를 나누고 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요 이틀간 한스 아저씨의 통신구를 통해 그 남자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죄다 이런 식이었으니.

―레아 양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

―그냥 보통 사람이셨는데요.

―아하, 보통 사람이셨구나! 그럼 부모님 직업은 어떻게 돼?

―음…… 평범한 농사꾼?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빙의 전 우리 아버지는 명퇴하시자마자 시골로 귀농하셨으니까.

―아하! 공부는 좀 못 하셨나 보다.

묘하게 사람 깔아뭉개는 화법과 초장부터 반말 찍찍 싸대는 무례함이 어느 순간부터 참기 힘들었다.

아니다. 난 원래 잘 못 참으니까 그냥 깨달음이 늦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오, 이거 열 받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통신구에 거절의 메시지를 작성했다.

―죄송한데 우린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레아 양? 난 우리가 최고의 짝이라고 생각했는데.

‘응, 아니야’라는 말을 한 줄 정도로 풀어서 보내려는데 웬 조잡한 그림이 통신구 위로 떠올랐다.

서적이 즐비한 배경 속에서 흰 가운을 걸친 남자가 의학서적을 들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이건 왜 보내셨나요.

―레아 양이 보고 감명받았으면 해서.

이게 무슨 개쩌는 상반신과 아담한 하반신을 자랑하는 미술관 명화도 아니고. 비쩍 골은 남자 초상화를 보고 감명까지 받을 건 또 뭔가.

난 모아이 석상 같은 표정으로 다시 답신을 보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죄송해요.

그랬더니 상대가 떼어놓기 힘들 만큼 끈질기게 매달려 왔다.

―아니, 레아 양.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만나 보면 안 돼? 레아 양 같은 여자가 딱 내 타입이라 그래.

내 낯짝을 언제 봤다고 타입이니 아니니 해대는 거지?

델린 남작 부인의 도움으로 기본적인 정보 외의 개인정보가 모두 빠진 걸 알고 있기에 난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밥도 다 내가 살게. 한 번만.

―이벤트성으로 다른 지역 특식을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가 보고 싶지 않아?

“…….”

난 일말의 고민 끝에 긍정의 답을 보냈다.

―좋아요. 대신 최대한 빨리 만나요.

딱히 밥이 끌렸다거나, 이 남자가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애당초 내 목적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건 아니었잖아. 굳이 눈높이에 맞춰 남자를 만날 필요는 없지.

뭐, 안 맞는 건 맞춰 가면 된다. 결혼은 사랑보다 존중이라고 델린 남작 부인도 그랬었잖아?

그런 것치고 델린 남작님이 존중받고 사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번에도 딜레이 없이 답장이 돌아왔다.

―당장 내일이라도 난 좋아. 그 레스토랑, 레아 양 사는 곳과도 가깝고 내가 투숙하는 최고급 5성 호텔이랑도 가까우니까. 아, 그거 알아? 내가 묵는 최고층 스위트룸에서 레아 양의 마을도 볼 수 있다?

‘와, 정말 궁금하지 않은 정보!’

‘우린 정말 안 맞는 것 같……’까지 쓰다가 지우고 메시지를 새로 작성했다.

―그럼 그 레스토랑 안에서 내일 오후 6시에 봬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내게 외출용 드레스가 한 벌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동안은 데이트를 나갈 일도 없었고 아는 사람만 계속 만나다 보니 예의를 차릴 일이 드물었다.

‘평소대로 허름한 블라우스에 모직 치마를 입고 나갈 수는 없겠지.’

드레스를 구해야겠다. 결심이 서자마자 델린 남작 부인에게 연락했다.

남작 부인께선 내 얘기를 듣고 발을 동동 구르며 지극히 푼수다운 탭댄스를 추시고는, 감사하게도 본인의 드레스 룸을 오픈해 주셨다.

“뭐든 다 가져가, 레아 양!”

* * *

딱 한 벌 빌렸다. 오색찬란한 드레스들 사이에서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걸로 한 벌.

샛노랗고 새붉은 드레스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 한창 도망치던 시절에 무채색만 입은 게 습관이 돼서 자연스럽게 어두운 계열에 손이 갔다.

“어머, 레아 양. 괜찮겠어?”

델린 남작 부인은 내가 집어 든 검은 드레스를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난하지 않나요?”

“음, 레아 양 제법 파격적이구나.”

그런가? 파격적인가?

드레스의 겉면을 살펴보았다. 너무 번쩍번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파인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지?

난 결국 남작 부인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검은 드레스로 데이트 복장을 정했다.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야밤에 카페로 돌아와서 바로 후회했다.

음, 입어 보고 정할걸. 왜 시착을 안 했지. 아무리 부인이랑 내가 사이즈가 비슷하다고는 해도…….

‘왜긴 왜야. 귀찮아서 안 한 거지.’

거울 속에서 스스로 불러 온 재앙을 목도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드레스의 우측이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시원스레 벌어져 있었다.

“이건 좀 그렇지?”

로체에게 가서 묻자 녀석이 보던 책을 아래로 살짝 내리고 내 꼴을 흘끔 바라보았다.

“괜찮은데요?”

“그래? 첫 만남에 너무 부담스럽지 않아?”

“레스토랑에서 본다면서요. 이브닝드레스로는 나쁘지 않죠.”

그렇게 말하니 또 그런 것도 같고.

“네가 엘프라 너무 개방적인 건 아니고?”

“무슨 소리예요. 여기 북부라고요, 레아 양.”

“아.”

하긴, 북부 사람들이 여러모로 오픈 마인드이긴 하지.

밥 한 끼 먹는 데에도 철저하게 TPO를 지키는 본토와는 달리 이들은 그저 맛있게 먹고 잘 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귀족 가문인 델린 집안과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차별 없이 하하 호호 지내는 것도 다 이런 개방적 분위기라 가능한 거지, 본토였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네. 네 말이 맞아.”

“그렇죠?”

“응. 이걸로 할래.”

사실 다른 거 다 떠나서 귀찮다. 고작 그런 만남을 위해 드레스를 두 번 빌리러 가는 건 영 수지가 맞지 않단 말이지.

그렇게 내일 입고 나갈 드레스를 다 고르고 돌아서는 순간. 나를 찾아 실내로 들어온 체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녀석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내 그의 눈이 예쁘게 접히며, 눈동자만큼 붉은 입술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누님, 그 옷은 뭔가요.”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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