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어딘지 서늘한 물음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뭐지. 나 왜 쫄고 있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로체를 돌아보았다.
“…….”
아니, 너는 왜 쫄고 있냐.
그러고 보니 체이트가 3년간의 객지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뒤부턴 로체가 얘를 대놓고 까댄 적이 없었다. 그전까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왤까. 뭐가 달라져서 저러는 걸까.
달라진 게 너무 많으니 그의 어떤 점이 로체의 촉을 발동시켰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책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못 본 체하기 위해 애쓰는 로체를 보며 고심에 빠지기 직전.
“누님.”
체이트가 날 재촉했다.
“어, 그러니까 지금 입고 있는 이거 말이지? 내가 산 건 아니고, 델린 남작 부인께 잠시 빌린 옷이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갑자기 옷을 빌리셨다고요?”
의심 어린 눈초리에 맞서 얼른 입을 열었다.
“응. 내가 사실…….”
“레아 양이 한 번쯤 드레스를 입어 보고 싶었다더라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로체가 도중에 말을 끊고 개입했다.
“그렇죠, 레아 양?”
“어, 어어?”
저 간절한 눈빛.
뭘까.
내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는 건 알겠어. 아니, 근데 쟤는 내가 그걸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나?
날 그렇게 고평가해 주다니 감동인데?
“음…….”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속세에서 잘 다져진 사회인이었다.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바라는지는 알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따라 주자.
“맞아. 나도 예쁜 옷을 좀 입어 보고 싶었거든.”
“……그래요?”
“응. 네 눈엔 어떤 것 같아?”
“흐음.”
체이트가 손으로 턱을 괴고 살짝 뒤로 물러섰다.
“예쁘네요.”
“그래? 옆이 너무 파인 것 같진 않아?”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모로 틀고 노출된 부분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긴 한데.”
체이트의 눈이 세모꼴로 뾰족해졌다가 금세 유하게 풀렸다. 녀석의 잇새로 한숨 같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누님께서 그게 입고 싶으시다면 입으셔야죠.”
체이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하지만 당장에 옷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 밖에도 체이트는 내 옷을 유심히 살피더니 헐렁한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런데 품이 조금 큰 것 같네.”
“아, 내 옷이 아니라서…….”
“잠시 확인 좀.”
체이트가 나를 가볍게 끌어안고 손을 뒤로 뻗어서 등허리의 남는 천을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그의 턱 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많이 남아?”
“네, 이 정도면 수선해야겠어요.”
역시 체구가 비슷해도 맞춤 정장처럼 꼭 맞을 수는 없나. 난 살짝 아쉬운 기분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의 옷인데 어떻게 수선해. 게다가 당장 내일 입고 가야 하는데.”
“그렇군요. 내일.”
“응.”
“잘 알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로체가 나를 부르며 일어섰다.
“레아 양.”
“왜?”
“잊지 마세요. 전 레아 양 편이었습니다.”
“……?”
뭔데. 불길하게 왜 과거형인데.
로체는 빙그레하게 웃으며 내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에 영문 모르고 눈을 슴벅이자, 체이트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누님 내일 어디 가십니까?”
“응. 선보는데? 왜?”
일순 체이트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선이요?”
“응.”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그거?”
“응.”
“……왜요?”
“응?”
“결혼 안 하신다면서.”
“그랬지.”
“그런데 어째서…….”
“내게 꼭 맞는 남자가 나타났거든.”
그게 꼭 맞는 건가? 말하고도 의문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조건상으로 최적이긴 하니까.
“……이상형이 나타났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원하던 필수 조건 하나는 완벽하게 충족하니까?
“…….”
체이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불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건 또 예상을 못 했네.”
“……으음? 뭐, 뭘?”
체이트는 요즘 유독 싸하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보면 이유 없이 오싹해진다.
녀석이 피식피식 웃다가 내 드레스의 헐렁한 부분을 붙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사이에 공간을 남겨놓고 치수를 가늠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복부가 맞닿아서 불편했다.
“아까 다 잰 거 아니었어?”
심기 불편한 기운을 가득 담아 밀어내자 또 순순히 밀려난다.
그래도 우린 제법 가까이 있었다.
서로 고개를 들고 내리면 바로 마주 볼 수 있는 거리.
녀석이 천을 쥐던 손을 떼고 내 머리카락을 한 줌 집어 올렸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길.
“아, 그냥…….”
이하 자체 생략.
입 모양으로 ‘가둘’ 어쩌고 하는데 가두리양식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뭘 가둬?”
내가 먼저 선수를 치자 체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눈에 약간의 경이가 어려 있었다.
저 눈빛 자주 받아 봐서 안다.
‘네가 이걸 어떻게?’라며 감탄하는 눈빛.
“아, 뭘 가두는데.”
짜증스럽게 묻자 체이트가 스르륵 손을 떼며 말했다.
“가둘…… 가두리양식 말입니다.”
……오.
“궁금해졌는데, 한스 아저씨께 물어보면 대답해 주실까요?”
“한번 물어보든지. 아마 좋다고 4절에 후렴까지 부르실걸?”
“그렇군요.”
“그렇지.”
“…….”
“…….”
이거 참 분위기 서먹하구먼, 허허.
아, 이거 혹시 눈치채지 않는 게 더 눈치 있는 그런 타이밍이었나?
내가 알 수 없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떼기 직전, 체이트가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누님.”
“응?”
“내일 약속 말입니다.”
솔직히 말릴 줄 알았는데 의외다.
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불현듯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고, 어깨에 힘이 축 빠지는 그런 기분.
당황스러움에 볼을 긁적거렸다.
‘왜 이렇게 서운하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반복해서 끔벅거리자 체이트가 로체의 벨벳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두드렸다.
“피곤하시면 지압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옷을 갈아입고 체이트의 무릎에 누워 미간과 눈썹 뼈를 마사지 받았다. 눈을 꼭 감고 손맛을 즐기는데 녀석이 나직이 속삭였다.
“누님, 머리 만져 봐도 됩니까?”
쟤는 가끔 저러더라.
샴푸 광고 찍기 딱 좋은 본인 머리를 두고 왜 허구한 날 내 머리에 집착할까.
“맘대로 해.”
머리 위로 간지러운 손길이 와닿았다.
스르륵…….
‘기분 좋다…….’
체이트의 부드러운 손길에 점점 눈이 감겼다.
“누님.”
“으응.”
“졸리세요?”
“응…….”
“누님?”
“…….”
멀어져가는 정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가지 마.”
“…….”
“가지 마, 레티시아.”
* * *
매칭남과의 만남 당일.
난 영혼이 탈곡된 인사처럼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허어.”
나 까였다.
아니, 세상에. 또 까였다.
레티시아의 얼굴을 가지고 두 번이나 까이다니, 이게 말이 되나.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7시 30분.
1시간 반을 기다리다니, 나도 참 자존심 많이 내려놨구나.
‘이상하다. 분명 자기가 먼저 와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당장에 그 남자에게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지만 통신구가 없어서 뭘 어쩌지도 못하고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이트한테 옷은 받지 않는 건데.’
외출 직전, 체이트가 내게 꼭 맞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선물했다.
목부터 다리까지 꽁꽁 싸맨 디자인이었지만 투피스 형식에 소매가 헐렁하고 레이스와 리본 포인트가 있어서 딱딱해 보이지는 않았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걸 샀냐며 도로 가져가 환불하라고 얘기했지만…….
‘누님께 제가 그동안 받은 게 너무 많잖아요. 제 마음을 담아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정말 안 받아주실 건가요?’
……라며, 유난히 수줍었던 어린 시절을 흉내 내는 게 아닌가.
여우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다 보니 어느새 이 옷상자가 손에 들려 있었다.
막상 받고 보니 내 머리색과 똑같은 분홍색 치마가 그야말로 취향 저격인지라, 사실 착용 후에 거울을 보며 입을 헤벌리고 감탄하긴 했다.
‘그렇게 의미 있는 옷을 고작 바람맞는 데 소비하다니, 낭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고기라도 질겅질겅 씹고 위장에 단백질이나 쌓아서 돌아가야지.
아싸리 파스타까지 시켜놓고 혼자 포도주 한 잔과 함께 솔로의 삶 브이로그를 찍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결심은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상 밖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거든.
예를 들면…… 전 남친과의 재회라든가?
* * *
싸한 정적과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동굴 같은 저음이 식당 안을 울렸다. 단 한 번 들었으나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깔린 인조 카펫에 포도주가 스며들었다.
흠집 하나 없는 구두가 붉게 젖은 자리를 짓밟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날 찾아올 정도로 몸이 달았나?”
평소라면 ‘네? 그게 무슨 개도 화답하지 않을 헛소리세요’라고 속으로 온갖 조롱을 해댔겠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푸른 눈이 나를 꿰뚫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내 오랜 약혼자이자 이 세계의 흑막, 이안 카히텐.
그가 내 앞에 있었다.
* * *
‘실제로 본 건 처음이군.’
이안은 무심한 낯으로 제 약혼자를 살펴보았다.
구불구불한 분홍색 머리카락, 옅은 녹색 눈동자, 갸름한 턱과 둥근 눈매.
브링스턴 후작가에서 보내 온 초상화와 아주 흡사했다.
‘브링스턴 후작이 딸의 외모를 자랑해 댄 게 순전 허풍은 아니었군.’
물론 그런 건 이안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래 봐야 정략결혼.
여자의 외모나 성격, 태도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는 그녀와 자신의 혼인이 집안끼리의 ‘약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는 그 약속을 어기고 도망쳤지.’
짐작 가는 이유라면 오로지 하나.
‘내 기억에 남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그로 하여금 호기심을 가지게 하여 직접 그녀를 찾아내도록 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이안 카히텐인 이상 다른 이유는 없다.
“……하.”
입매가 절로 비틀렸다.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조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매번 이런 식이지.’
여자들의 애정 공세는 전부터 수도 없이 받아 왔다.
바닥에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귀여운 짓부터 제 앞에서 죽겠다 난리를 치며 기억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는 미친 짓까지.
그러나 그 누구도 이안의 이목을 온전히 끌어당기진 못했다.
‘이 여자가 유일한 예외가 되겠군.’
결국 이렇게 품을 들여 걸음하게 했으니.
하나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애가 달아서 자신을 찾아 시내로 거동한 것은 다소 속 보이는 짓이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이안은 굳어있는 레티시아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내가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
여자는 답이 없었다.
아마 꿈에 그리던 상황이 현실이 되자 넋이 나간 거겠지.
제 얼굴을 보고 장장 5분 동안 석상이 된 여자도 있었다. 이 정도 반응은 익숙하다.
이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우선, 왜 도망친 건지.”
“…….”
“그리고 왜 이제 와 내게 소식을 전한 건지.”
“예? 그게 무슨…… 읏!”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그가 여자의 턱을 들어 올리고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안 그러면…… 당신, 여생이 재미없어질지도 몰라.”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