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시방 이게 다 뭔 소리냐.’
설명을 하라니.
……어떻게요?
뉘 집 개가 멍멍하고 짖는데 제가 왈왈하고 짖어야 할지, 컹컹하고 짖어야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하고 백스텝으로 토낄 각을 잡고 있던 찰나에 뭔 알지도 못할 소리를 하며 남의 턱주가리를 부여잡는데 이거 지금 기분 나쁜 상황 맞는 거지?
하지만 일단 무서우니까 참는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이 남자는 내게 있어서 악몽 그 자체였다.
생판 모르는 엑스트라 몸뚱이에 들어와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했는데 그 추적자 되는 양반의 사람 모가지 따는 현장을 라이브로 목격하면 솔직히 트라우마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냐.
그 와중에 턱은 욱신거리고, 무서운데 짜증은 나고.
그렇게 내 거친 성질머리와 불안한 마음이 내면에서 격렬한 살사를 추는 사이, 이안이 재차 말했다.
“대답이 늦군.”
턱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윽, 저 인간은 힘 조절이란 개념이 없나. 으스러지게 잡아 놓고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건가.
지금 주둥이 벙긋하면 아랫입술은 움직이지도 않게 생겼는데. 복화술 연습시키냐?
나는 제발 턱부터 좀 놓고 대화하자는 의미로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울어?”
이안이 피식거렸다.
“연기가 제법이네.”
아니, 아파서 울었는데 그걸 연기라고 하시면 제 눈물샘이 몹시 억울하지요?
다행히 턱은 풀려났다.
난 아린 턱을 매만지며 겨우 입술을 뗐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닌…….”
음, 이건 좀 늦었겠지.
모름지기 인생사 타이밍이 중요한 법.
빠르게 노선을 틀고 조금 전 그의 질문에 역으로 되물었다.
“소식을 전했다니요? 저는 그런 적 없는데요.”
“제스, 가져와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남자 하나가 인물화로 보이는 그림 한 장을 건넸다.
어, 저거 나네?
“왜 저기에 제가…… 으음, 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게 이안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 심심한데 결혼이나 할까.”
“네…… 니오?”
뜬금없는 소리에 입과 뇌가 동시에 물음표를 토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회사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모, 모르겠는데요?”
그런 괴상망측한 네이밍 센스를 가진 회사 따위 알 리가…….
“아.”
퍼뜩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델린 남작 부인…….”
그 아줌마가 설마.
설마 내 초상화를.
설마 그 결혼 정보 회사에.
‘아, 그래서 매칭이 된 거구나.’
이제야 내가 자기 취향이니 뭐니 했던 매칭남의 헛소리가 납득이 간다.
그래, 브링스턴가 딸내미들 얼굴이 이 세계 기준으로도 아주 준수한 편이긴 하지. 미리 좀 알아챘으면 좋았을걸.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꼭 깨달으면 일 터진 후라니까.
“근데 그거 제가 올린 거 아니거든요…….”
난 선생님께 혼나는 학생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대꾸했다.
“우스운 변명이군.”
그래……. 안 믿을 것 같긴 했다.
“스스로도 솔직하게 대답하긴 창피하겠지.”
이안이 다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아프게 붙잡는 줄 알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는데 다행히 그냥 손끝으로 들기만 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그의 서늘한 음성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오한이 절로 일었다.
“네게 선택지를 주지. 여기서 계속 쥐 죽은 듯이 살 건지, 아니면 내 아내로 인형처럼…….”
“쥐 죽은 듯 살겠습니다. 얼굴을 보이긴커녕 아예 이름도 들릴 일 없이 살게요.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서 돋보기 코에 얹고 뜨개질하실 나이쯤 되면 제가 누군지 생각도 안 나실 만큼 조용히 살 테니까 그냥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른 대답했다.
“…….”
불안하게 왜 말이 없어?
그는 한참 동안 뜻 모를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예?”
저 지금 굉장히 진심인데요.
“내 관심이 당신 기대에 못 미쳤나 보지?”
“……저, 전혀요?”
“이런 식으로 계속 귀찮게 내 관심을 구걸할 요량이면 차라리 돌아와. 어느 정도 대우는 해 줄 테니까.”
“저기…….”
혹시 답은 정해져 있고 전 대답만 하면 되는 그런 거였나요. 그럼 예시라도 보여 주시지…….
이안이 그대로 등 돌려 걸어가며 부하로 보이는 남자에게 명령했다.
“저 여자를 내 마차로 데려와. 바로 올라가지.”
“아니, 저기!”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다. 나는 공포도 잊고 그의 소맷귀를 붙잡았다.
“안 가면 안 되나요?”
푸른 홍채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건 또 무슨 신종 수법이지?”
“아뇨. 수법이 아니라…… 아!”
팔목이 잡혔고, 그대로 휙 끌려갔다. 이안의 잘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봐, 내가 당신의 사랑노름에 장단 맞춰 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였나?”
“아니요!”
손목이 시큰거려서 다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파요. 놔주세요.”
“그러니까 그런 연기는 소용없을…….”
“소용이고 자시고 제가 아는 연기라고는 커피 태울 때 나오는 연기밖에 없는데 무슨…….”
“…….”
“……?”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내 뒤로 넘어갔다.
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 * *
그를 따라 나도 시선을 돌렸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체이트! 너 왜 여기 있어?”
체이트는 날 보며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하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이안과 거리를 벌렸다.
“우리 누님은 참, 인기도 많으시지.”
이건 나라도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멕이네…….’
“아니 왜 여기 있냐니까?”
내가 조금 불퉁한 어조로 묻자 체이트가 되레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야 누님께서 여기 계셨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게 네가 여기 있을 이유가 되니?”
생뚱맞은 대답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자 체이트가 말을 덧붙였다.
“돌아오는 밤길이 어둡잖아요.”
교통편이 있긴 하지만 시내에서 떨어진 산골 마을이니 확실히 위험하긴 하지.
“누님께서 왠지 홀로 돌아오실 것 같아서 데리러 왔죠.”
“!”
아니, 내가 까인 거 어떻게 알았지!
“너, 감이 장난 아니구나.”
체이트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고는 이안을 응시했다. 색은 붉지만 얼음보다 냉랭한 시선이었다.
“…….”
“…….”
그리고 기묘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
뭐지, 둘이 눈싸움하는 건가. 그럼 나도 안 감아야지. ……앗, 패배!
아니 그런데 진짜 뭐 하는 거지. 둘이 아는 사인가. 에이, 그럴 리가. 체이트가 뭐라고 북부의 패자랑 면식이 있겠어?
“체이트 폴린, 당신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있잖아! 면식!
이안의 말을 듣자마자 난 체이트의 팔을 다급하게 끌어당겼다.
“너 혹시 남부로 안 가고 카히텐 영지에 있었니?”
“아뇨, 남부로 갔습니다.”
“그럼 대공 전하가 널 어떻게 알고 있어?”
“그건…….”
또, 또 입 다문다. 얜 과거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더라.
“저기, 체이트.”
“그만둬. 의미 없는 짓이다.”
조금 더 채근해 보려는데, 이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대답할 수 없을 거야. 대신전의 계율에 따라 신성으로 금언령이 걸려 있을 테니.”
금언령?
‘아니, 그보다 분명…… 대신전이라고 했지?’
내 싸한 추측이 점점 맞아떨어지고 있다. 불안하다.
“공식적인 외출이 아닌 이상 외부인에게 신전에 관하여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는 금언의 계율이지. 높은 자리일수록 비밀 유지에 철저해야 하는 법이거든.”
이안이 말했다.
“거기가 워낙 구린 데가 많아서 말이야.”
덧붙이는 말에는 종교에 대한 이안의 깊은 불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체이트가 대신전의 높으신 분들에 속한다는…… 그런 뜻인가요?”
“그렇지. 그것도 아주 높으신 분이야.”
체이트가 그를 노려보며 조소했다.
“대공께서는 보기보다 말이 많으시군요.”
난 놀라서 체이트를 돌아보았다.
‘얘가, 얘가!’
너 쟤가 누군지 아니? 훗날 네 딸이랑 붙을 최종 보스라고!
그런 남자의 코털을 굳이 지금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 코렐리아, 무사히 태어나긴 그른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신전의 사제와 신관들은 독신이어야 한다.
‘그래, 난 헛된 일에 공을 들이고 있었구나.’
현타가 밀려왔다.
하지만 내 감정에 매몰되기보다는 이안과 체이트를 떼어놓는 게 우선이었다.
난 마부의 목을 쳤던 십 년 전의 이안을 상기하며 체이트의 팔을 젖히고 나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하하, 죄송해요. 이 애가 시골에서 자라서 바깥 물정을 잘 몰라요.”
“……하.”
뭐야, 왜 비웃어.
“물정을 모르는 건 당신인 것 같은데.”
“예?”
“아무튼 내 쪽에서는 여러모로 시름을 덜었군.”
이안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내 오른 팔목을 붙잡았다.
“내 약혼자와 아르키드네의 대주교가 면식이 있는 사이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예?”
아르키드네 대주교…….
내가 아는 아르키드네 대주교는 코렐리아 피셜 ‘분수도 모르는 꼬장꼬장한 늙은이’인데.
체이트의 눈부신 외모에 꼬장꼬장한 늙은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신전과 연관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신전을 먹었다는 생각은 아직 못했다고!’
머리가 핑핑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내 미래가 어찌 될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의도치 않게 원작과 너무 깊숙이 엮여 버린 것 같은데. 아니, 엉켜 버린 것 같은데!
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제발 조용히 살다 가게 해 줘…….’
“대공께선 여인을 대하는 예의가 바닥이시군요.”
체이트가 다가와서 내 왼손에 깍지를 끼고 이안을 노려보았다.
“저자가 하는 소리는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제가 나중에 다 설명해 드리지요.”
“뭐, 뭘?”
난 양손이 붙잡힌 상태로 혼란스럽게 서 있었다.
그때, 이안에게 초상화를 가져다준 제스라는 남자가 공손하게 다가와 말했다.
“세 분 다 영업에 방해되니 제발 나가 달랍니다.”
아, 여기 레스토랑이지 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