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의 홈 스위트 홈, 카페로 돌아왔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습관적으로 이안에게 커피를 내려 주려고 했고, 로체가 날 막아섰다.
“제가 내리겠습니다.”
“어, 안 그래도 되는데.”
“아뇨. 제가 내립니다.”
뭐지? 웬일로 적극적이네.
로체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대공 전하 정도면 창고가 가득 차서 돈이 숨을 못 쉬겠죠? 제 커피 맛에 감동하셔서 그 숨 못 쉬는 돈 일부를 제게 적선하고 가시지 않을까요?”
……자연을 벗 삼아 뛰노는 숲속 친구가 대체 왜 저렇게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걸까.
타 종족에게 배타적인 엘프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부대끼며 사는 것부터 사실 정상은 아니지. 저놈도 분명 뭔가 사연 있는 놈이긴 할 거다.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 마음대로 해.”
로체에게 커피를 맡기고 카페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내 옆엔 당연한 듯이 체이트가 앉았고, 맞은편에선 이안이 팔짱을 낀 채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내 약혼자와 대주교께서 의남매 사이라니, 이거 참 흥미로운 인연인데.”
“정확히는 제가 얘를 주워 온 거죠. 아, 얘가 아니고 그, ……대주교님을.”
거참 적응이 안 되네.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내 옆에서 체이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약혼…….”
북부의 한기가 절로 느껴지는 읊조림이었다.
‘뭐지? 화났나?’
체이트는 화가 나거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혼자 골몰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 같은 단순한 인간 입장에선 아주 까다로운 동거인이다.
‘그러고 보니 체이트는 내 진짜 정체를 모르겠구나.’
나도 그가 3년간 벌인 짓을 이안의 입으로 들었을 땐 여간 당황한 게 아니었지. 돌이켜 보니 정체를 숨기고 산 건 그만이 아니었다.
“잠깐만, 체이트. 내가 다 설명할게.”
“설명할 필요가 있나?”
이안이 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설마 이 여자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고 잡아떼진 않으시겠지?”
“……?”
체이트가 내 정체를 알아?
……어떻게?
체이트가 그저 고양이인 줄 알았던 시절, 무방비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은 있다.
하지만 흔하디흔한 이름자 몇 번 거론한 게 전부일 테니, 그걸로 뭔가를 더 알아채긴 힘들었을 테고.
‘아르키드네 대주교.’
녀석이 남부에서 가져온 엄청난 직함이 떠올랐다.
……설마?
“체이트 너, 3년 새에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뒷조사라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체이트의 얼굴에 드물게 당혹감이 서렸다.
“당황하는 걸 보니 한 거 맞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닙니다. 저치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만.”
체이트가 이안을 흘깃 눈짓했다.
“날 조사했다고?”
이안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니, 저 인간은 도대체가 멀쩡하게 웃을 줄을 몰라. 입꼬리 한쪽이 마비됐나? 계속 저렇게 살면 안면 불균형으로 고생할 텐데.
‘아, 혹시 주연 캐릭터는 그런 고민 안 해도 되는 건가. ……그렇다면 좀 부러운데.’
공포심을 잊기 위해 시답잖은 생각으로 감정을 죽이려 애썼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평정을 유지한 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사이 체이트와 이안이 치열하게 입씨름을 주고받았다.
“제가 조사한 게 아닙니다. 아르키드네 신관들이 멋대로 벌인 일이죠. 저는 그들이 모아 놓은 서류만 읽어 보았을 뿐.”
“당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제가 그쪽처럼 불쾌한 사내에게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마주 앉아 있기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데.”
오, 너무 대놓고 악의적인데.
“대주교님이야말로 경박하다 못해 천박해 보이는 낯으로 용케 성직을 업으로 삼으셨군.”
여기도 만만치는 않다.
나는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둘의 대화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주워 담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러하다.
체이트는 지난 3년간 남부에 있었다. 그사이 선대 대주교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열두 신전의 주교들은 급사한 선대 대주교의 뒤를 이어 누가 차기 대주교가 될 것인지를 두고 엄청난 눈치 싸움 중이었다.
개중 가장 입김이 세고 성력이 강한 3명으로 후보가 좁혀졌다.
수도 데본 지부의 데본 주교, 서부 마키에 공국 지부의 마키에 주교, 그리고 남부 대신전 부속 안타카스 지부의 안타카스 주교.
그들 셋은 우리 중 누가 대주교가 되어도 서로 암살하지 말자고 복숭아나무 아래서 맹약을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리와 의리로 굳건해진 그들 앞에 체이트가 홀연히 나타났다.
전부터 말했지만 체이트는 성력이 강했다. 그간 써먹질 않았을 뿐.
‘재능러가 수십 년간 쌓아온 노력파들의 공로를 한 방에 싹쓸이해 버린 거구나…….’
개중에서도 암암리에 로비를 미친 듯이 해댄 안타카스 주교는 그간 착복한 자금을 모조리 잃고 없던 탈모가 생겼다고…….
‘안타깝네.’
난 멀쩡하다 못해 반지르르한 체이트의 낯을 보며 눈을 좁혔다.
그 주교가 원작 소설에서는 성녀 코렐리아와 반목하는 꼰대 대주교 역할이었으려나?
지금 그의 자리는 체이트가 차지했다.
‘스토리가 바뀌어도 너무 바뀐 거 아닌가…….’
어, 혹시 계속 이렇게 가다 보면 원작도 뒤틀릴 수 있는 거 아닐까?
날이 갈수록 사그라들던 희망이 다시 샘솟았다.
체이트가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되었다. 이건 원작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대면한 이안 카히텐 또한 의외로 대화가 가능한 인간처럼 보인다. 이유 없이 세계 멸망을 꿈꾸는 사이코패스까지는 아닐지도.
“맡은 역할도 제대로 수행 못 하고 도망친 주제에 대우받길 원하나? 그 손모가지로 도장 만들기 전에 공증이나 서시지.”
……이런 식으로 입을 털어대는 정도야 귀여운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지.
솔직히 처음에는 저 남자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검을 뽑아 목을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대접도 해주는 것 같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물을 맨손으로 처리한 체이트도 딱히 보통 인물이라고는 말 못 하지…….’
그뿐인가.
툭하면 고양이로 변해서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고, 커피 잔을 반으로 동강 내는 꼴을 봐온 지도 어언 팔 년이 되었다.
나도 이제 이세계 적응 다 끝났다 이 말이다.
시체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 있지만, 적어도 그 사정을 물을 여유 정도는 생긴 것이다.
“저기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대공 전하, 혹시 십 년 전쯤에 북부 초입새 토이킨 영지 시가지에서 마부는 왜 죽인 건가요?”
“당신 그때 거기 있었나?”
이안이 눈썹 끝을 비죽 올리며 테이블을 툭툭 쳤다.
“확실히 그즈음 토이킨 영지에 간 적은 있었어. 만날 사람이 있었거든. 하지만 마부를 죽였다는 건…….”
“주, 죽였다는 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예?”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지? 내 손에 죽어 나간 이들이 한둘도 아닌데.”
“아, 한둘이 아니구나.”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체이트가 내 어깨를 끌어안고 도닥였다.
“누님, 저런 음흉한 사내에게 겁먹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
3년 만에 대신전 현판 뜯고 와서는 입도 벙긋 안 한 게 뭐라는 거야. 네가 제일 음흉해…….
“그런데 체이트에게 금언령이 걸려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것치곤 말을 편하게 하는데.”
“아, 그거.”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만일을 대비해서 대신전의 2급 기밀 허가를 받아뒀지.”
“기밀 허가요?”
“그래. 2급이면 웬만한 대화는 다 가능해. 제삼자가 들을 수도 있고. 당신이 직접 저자에게 답을 청할 수는 없겠지만.”
15세 이용가, 보호자 동반 시 전 연령 입장 가능.
비유하자면 이런 건가? 19세 이용가는 아직 대공 전하도 못 보는 거고?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가네.’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자 옆에 있던 체이트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깟 금언령, 사실 제겐 별 의미도 없습니다. 누님이라면 더한 비밀도 말씀해 드릴 수 있어요.”
……아니,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이미 엑스트라 기준에서 허용 범위 초과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내 인생 모토인데 이쯤 되면 절반은 조졌다고 봐야겠지.
남은 절반을 위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문은 풀렸고 대공 전하의 최우선 목표물도 내가 아님을 잘 알겠다.
그럼 이제 둘이 알아서 오해 풀고 화해하시고, 나는 들어가서 엄지손톱 깨물면서 달력이나 보고 있으련다.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러고 보니 흑막이 여기 있었잖아.’
애당초 이안 카히텐만 가만히 있으면 이 고생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난 체이트와 눈을 맞추고 그의 손바닥에 작게 글씨를 썼다.
‘너 쟤 이기니?’
체이트가 빙긋 웃으며 눈빛으로 화답했다.
‘…….’
새삼 놀랍지도 않겠지만 당연히 하나도 못 알아먹었다.
‘대충 곤란하다는 의미려나. 하긴, 상식인이라면 아무래도 입장상 무리겠지.’
뭐, 이안이 당장에 흑막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함부로 해를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일단 대화부터 시도해 보자.
* * *
‘죽여 버릴까.’
체이트 폴린이 아르키드네 대신전에서 처음으로 이안 카히텐의 인물 정보를 열람했을 당시 든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인물 정보 하단에 적힌 ‘레티시아 브링스턴’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에.
하지만 무턱대고 그를 죽이면 신전이 한바탕 난리를 치겠지.
3년 전, 체이트는 레티시아의 바람대로 남부로 갔다.
그즈음 체이트의 머릿속엔 온통 레티시아뿐이었다. 애당초 이 여정도 레티시아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한 초석이었다.
하지만 남부에 거하던 누군가의 눈에 그의 귀환은 위협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 누군가, 선대 아르키드네 대주교는 북부에서 뚝 끊긴 그의 행방을 계속 찾아 헤맸다.
대신전에 주기적으로 내려오는 ‘신탁’ 때문이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