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27화 (27/140)

27화

붉은 눈의 아이가 신의 대리자를 흙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해의 신탁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신전의 1급 기밀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신의 대리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아르키드네 대주교.’

그는 신앙이 깊은 만큼 신전의 신탁을 맹신했다.

신의 대리자가 자신을 뜻한다고 확신한 그, 신탁의 내용이 자신을 구원하려는 아르키드네의 메시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잘못된 믿음이 낳은 결과는 끔찍했다. 신탁 이후, 그는 남몰래 붉은 눈의 아이를 색출하여 모조리 제거했다.

하지만 체이트 폴린, 범상찮은 이름을 목에 걸고 신전 앞에 버려진 그 아이만은 죽일 수 없었다.

체이트는 불사나 다름없는 치유력을 갖고 있었다.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이르러도 그는 절대 죽지 않았다.

애초에 죽음까지 몰고 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체이트의 성력은 어지간한 상급 사제를 웃돌았으므로.

가두고 은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가 보아도 체이트 폴린이 자신을 죽일 ‘붉은 눈의 아이’라는 게 분명해 보였다.

대주교는 그의 힘을 질시했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단순한 실종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완전히 소멸하거나, 자신의 인형이 되어야 비로소 마음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남부에서 체이트의 꼬리를 잡자마자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누구도 장성한 체이트를 이기지 못했다.

조급해진 대주교는 마침내 스스로 움직였다. 그와 함부로 접촉하는 게 제 명을 단축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체이트 폴린이 제 영역 내에 있다는 생각에 방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직위를 믿고 자만한 것일지도.

대주교는 체이트에게 패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체이트가 레티시아를 만나기 전에 다짐했던 대로, 졸지에 오랜 기간 묵혀둔 복수가 완성된 꼴이었다.

대주교의 사인은 불문에 부쳐졌다. 하지만 고위 신관과 주교들은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체이트 폴린이 돌아왔다.’

그는 신전 내에서 단숨에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대주교와 결탁했던 이들은 그가 자신에게도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지 않을까 두려워하다 은둔을 택하거나,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한 사람의 귀환이 이렇게 내부적으로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내다니. 이 일을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신전은 그의 처분을 고민했다.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신전 내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포용하고 나아가 받드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는 강력한 성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말인즉슨, 아르키드네 신의 가호를 받은 자라는 뜻이다.

신이 선택한 자를 신전이 배척한다는 것부터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대주교의 전철을 밟아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체이트 폴린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새로운 신의 대리자로 받들 것이다.

신관 다수가 그 의견에 찬성했다.

열두 명의 주교 중 차기 대주교 자리와 연이 없는 이들 역시 체이트를 차기 대주교로 지지했다.

다른 주교에게 권력이 쏠릴 바에야, 신전에 고이지 않은 햇병아리를 머리로 두는 편이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체이트로 말하자면,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나보고 그 자리를 맡으라고?”

가만히 두고 보자니 저들끼리 이미 합의가 끝났다. 당사자 의견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결혼도 못 하는 대주교 자리 따위, 알 바 아니지. 그는 심드렁했다.

하지만…….

‘신전의 최고위 성직자라.’

권력으로 말하자면 제국의 황제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평생을 신전에 몸담아 온 사람이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여기 앉고 싶겠지.

남부만 두고 보자면 아주 비싸게 먹힐 매물이었다.

“……뭐, 좋아.”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체이트는 그렇게 아르키드네 신전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후회했다.

고리타분한 신전이 차기 대주교를 새로이 임명하고, 승인하고, 공포하기까지 무려 3년이나 걸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 * *

빙 돌아서 현재.

그의 눈앞에 이안 카히텐이 있다. 맞은편에는 레티시아가 있고, 이안은 꼬박꼬박 그녀를 ‘내 약혼자’라고 칭한다.

“약혼…….”

체이트는 그 단어를 무심코 읊조렸다.

그리고 눈을 도르르 굴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역시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다.’

* * *

“까먹은 것 같죠?”

제스의 말에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른 척하는 게 분명하다. 방심하지 마.”

“음, 하지만 전하께서 그 얘길 언급하실 때 기억도 못 하고 있는 눈치던데요.”

“하! 그게 다 연기라는 거 몰라? 원래 그런 여자야. 속아 넘어가는 쪽이 멍청한 거지.”

“……저는 아르키드네 대주교를 말씀드린 겁니다만.”

“……?”

“공증 건 말이에요.”

“……아아.”

눈꺼풀이 움찔거렸던 것도 잠시, 이안은 태연한 표정으로 궐련 한 개비를 물었다.

제스가 재빨리 다가와 그의 담배를 꺾었다.

“뭐 하는 짓이지?”

“이 지역 호텔은 전체 금연입니다.”

“……하.”

그들은 현재 레티시아의 카페에서 마차로 한 시간여 떨어진 시내 호텔에 투숙 중이었다.

왜인지 체이트 폴린이 자꾸만 대신전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공증 건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바람에, 부득불 하루 더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레티시아가 영주 성만은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니, 그나마 머물 만한 곳은 이 호텔뿐이었다.

‘브링스턴 후작 영애한테 좀 무른 감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맘에 드신 건가?’

제스는 눈치껏 상황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저희를 싫어하는 것 같죠?”

‘전하를 싫어하는 것 같죠?’라고 말하려다가 재빨리 사회생활, 네 글자를 머릿속에 박아 넣은 제스가 뭉뚱그려 물었다.

“그래. 보아하니 내 약혼자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는 것 같더군.”

“……!”

와. 그걸 단박에 알아채네. 가만 보면 이 인간, 자기 일만 아니면 정말 눈치가 빠르다.

“불쌍한 작자지. 그 여자가 반평생 나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

자기 일이 아닐 때만 눈치가 빠르다.

제스는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에 화제를 틀었다.

“브링스턴 후작 영애 건은 어찌하실 겁니까?”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그에게 이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안은 계속 새빨간 거짓말일 거라 주장하고 있지만, 제스의 눈에 그건 순도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그 여자는 어찌 되든 알 바 없어.”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귀찮게 군다면 진짜로 이 외진 산골에 박아두고 다시는 찾지 않는 것도 괜찮은 해결 방안이 될 수 있겠군.’

생사는 확인했으니 앞으로 그녀와 관련해서 어떤 수색 결과가 나와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그 여자를 좋아한단 말이지?’

삼각관계.

실로 고전적인 엇갈림이 아닌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이 이내 입술 끝을 비죽거렸다.

“알 바는 없지만, 일단은 약혼자긴 하니…… 예정대로 데려가는 게 좋겠군.”

“그 말은, 혼인을 재개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브링스턴 후작의 시름을 덜어 준다면 추가로 은광 정도는 요구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도면 새로 식을 올린다고 해도 아주 손해는 아니야.”

“영민하십니다, 전하.”

제스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한편으로 주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저렇게 만족스러운 미소 진짜 오랜만에 본다.

저건 아마도 그러니까…….

‘빡쳤네.’

체이트 폴린의 태도가 어지간히 보기 싫었구나. 이런 식으로 엿 먹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응, 그래. 주변이 다 오냐오냐하면서 키웠으니까. 면전에서 욕먹는 일에 면역이 없을 수도 있지.

제스는 생글거리며 손바닥을 비볐다.

“꽃다발은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 * *

“레아 양, 귀족이었습니까?”

로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봐도 뭐 나올 거 없는데.

“귀족은 부자지요?”

로체의 눈이 한층 더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좋네요, 부자의 삶.”

내가 이 세계 와서 가장 먼저 한 짓은 도주다. 부자고 뭐고 그런 거 즐길 틈도 없었단 말이다.

‘생각하니 열받네.’

남들 빙의해서 사교 파티 나가고 드레스 고를 때 나는 망토 뒤집어쓰고 노숙했다.

야밤에 고라니 울음소리 들으면서 훌쩍거리던 빙의 초기 시절이 악몽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짓을 두 번은 못 해.’

어차피 이번엔 백 퍼센트 잡힐 게 뻔하고.

이안이 떠난 카페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레티시아 브링스턴 인생 제3막을 도모해야 하나? 아니면 제1막으로 돌아가서 못다 겪은 부자의 삶을 체험해 봐야 하나.

‘아니, 1막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이안은 내 처분에 대해 별다른 얘기 없이 돌아갔다.

자발적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덜미가 잡혔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참담한 결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는데…….

‘그냥 조용히 떠나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 체이트의 공증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체이트는 이안에게 끝까지 공증에 대해선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신전으로 돌아가라는 제안도 거부했고.

아마 이안에게 악감정이 단단히 든 모양이다.

‘그 녀석도 본인 위치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체이트나 이안이나, 둘 다 아주 제멋대로인 인사들이었다.

‘좋겠다. 그렇게 막 나가며 살아도 돼서…….’

무능력한 엑스트라는 꿈도 꾸지 못할 삶이다.

이제 나는 부표처럼 둘 사이에서 휩쓸리며 살다가, 돌멩이 사이에 끼어서 말라갈 일만 남은 걸까.

‘오, 절망적인데.’

한숨 절로 나오는 상상을 하며 테이블 앞에서 턱을 괴고 있는데 체이트가 다가왔다.

“누님.”

“응.”

“도망갈까요?”

“응?”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너 방금 뭐라고?”

“도망가자고요.”

체이트가 싱긋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누님은 카히텐 대공과 혼인하기 싫고, 저는 아직 신전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으니.”

그가 기다란 검지로 컴컴한 밖을 가리켰다.

“도망가는 수밖에.”

“…….”

곤란하다.

내 범상한 단역 인생이 이 녀석에게 시시각각 위협받고 있다.

이래서 깜냥이 안 되면 동물도 함부로 거둬선 안 되는 건데…….

감당하지 못할 것을 데리고 와 버린 느낌이다.

“나는 일단 여기 있을 거야.”

내게 이 마을은 제2의 고향이었다. 애써 정붙인 곳을 쉽사리 떠날 수 있을 리가.

우선은 이안을 설득해 봐야겠지. 딱히 나에게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죽일 것 같지도 않으니 잘하면 합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내 낙관적인 사고를 비웃듯, 체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심히 탐탁잖은 얼굴이었지만 말버릇처럼 ‘누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이제 방랑하고 싶지 않은걸.’

그리고…….

“설사 도망치더라도 너와 함께 갈 마음은 없어.”

내가 네 삶에 엮이고 싶지 않듯이, 나는 너도 내 삶에 함부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체이트는 왠지 조금 상처받은 눈빛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어제의 판단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안 카히텐이 24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다시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장미꽃 아흔아홉 송이를 손에 들고서.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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