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28화 (28/140)

28화

카페 문을 닫은 늦은 오후였다.

난 어제의 일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이런 걸 두고 폭풍전야라고 하지.

이안은 내가 방심하던 순간 예기치 못하게 나타났다.

“이, 이게 다 뭔가요?”

“보면 몰라? 꽃이잖아.”

“아니, 저도 눈은 두 짝 제대로 달려 있는데…….”

꽃이 너무 위협적인데요.

“여자들은 장미를 가장 좋아한다던데.”

누가 그래? 나는 돈이 제일 좋아.

“자.”

그가 무심하게 아흔아홉 송이의 장미를 내밀었다.

“으학! 잠깐만요!”

아니, 너무 커!

그런 걸 예고 없이 넘기면 쓰러진다고!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그 사이로 체이트가 끼어들었다.

그가 꽃다발을 대신 받아서 던지듯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신종 괴롭힘인가?”

“괴롭힘?”

이안이 눈을 좁혔다.

설마 그 얼굴로 진짜 선한 의도였다고 말씀하실 건 아니시지요.

“이쪽은 선한 의도로 내 약혼녀에게 프러포즈를 하려던 것뿐인데.”

와, 선한 의도였대.

……아니, 잠깐.

“프러포즈요?”

“그래.”

이안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뒤에 있던 제스라는 보좌관이 잽싸게 보석 케이스를 내밀었다.

케이스가 열리며 눈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드러났다.

“걸어. 반지는 돌아가서 호수에 맞춰 제작하지.”

“……예?”

“아, 그래. 그걸 잊었군.”

일을 헤벌리고 있는 내 앞에 그의 장갑 낀 손이 다가왔다.

“혼인하지, 레티시아 브링스턴.”

“…….”

와.

진짜.

최악이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프러포즈를 승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한 것도 아니다.

아니, 못했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이겠지.

내가 프러포즈……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은 직후.

“죽고 싶은 건가, 이안 카히텐?”

라는 말과 함께 체이트가 본신으로 돌아갔고.

“범 가죽이라. 응접실 카펫이 닳아가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군.”

하고 이안이 칼을 빼 들었다.

로체는 조용히 팝콘을 튀기러 갔고 나는 잠깐 쫄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리쳤다.

“둘 다 나가서 싸워요!”

남의 소중한 업장에서 이 무슨 행패인가.

공포도 잊게 만드는 인테리어 공사 비용이 머리에 아른거린다.

내 집 아니라고 벽에 못도 마음대로 못 박고 살았는데…….

울컥한 내 외침에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누님. 죄송합니다.”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체이트가 안절부절못하며 흠집 난 자리가 있는지 살폈고,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이안이 조용히 검을 집어넣었다.

이안은 우리의 행동 메커니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래서 타고난 놈들은 재수가 없어…….

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잠시 이성을 잃었군.”

해명에 앞서 ‘미안하다’와 같은 말이 붙어야 할 것 같지만, 그는 사과를 모르는 진성 다이아 수저였다.

‘기대도 안 했다.’

진이 쏙 빠진 나는 아무 의자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체이트가 자연스럽게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우리 이러니까 꼭 빅 매치 직후의 레슬링 선수와 코치 같다. 물론 내가 선수다.

누가 이안 카히텐에게 하얀 수건 좀 날려 주세요. 제가 졌습니다.

눈을 옆으로 돌리자 의자 옆 테이블에 널브러진 꽃다발이 보였다. 어휴, 지겨워.

그사이 로체가 팝콘 한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벌써 끝났습니까?”

“응…….”

“이런, 많이 튀겼는데.”

“…….”

“드실래요? 반 상자에 5리스입니다.”

우리에게 두 번째 매치가 필요하다면 나는 쟤와 싸우고 싶다.

* *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차마 체이트처럼 “꺼져 주세요, 대공 전하.”라고 할 배짱이 없었던 나는 그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음…….”

그는 내 커피를 한 입 마시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곳은 카페로 위장한 살수 집단인가?”

“아뇨. 그냥 카페입니다.”

“그냥 카페에서 독약을 파는 건가?”

“아뇨. 그냥 커피인데요.”

그가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그렇군. 이건 그냥 커피였군.”

“네.”

“제스, 네게 하사하마. 마셔라.”

“전하……?”

제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도 내가 내린 커피를 한 입 마시고 내려놓은 참이었다.

“커피 좋아하지 않았던가?”

“예에. 그랬……죠.”

그가 나를 간절하게 쳐다보기에 싱긋 웃어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게 왜 이 인간을 여기까지 데려왔어.

꽃다발 아흔아홉 송이를 추천한 것도 저 보좌관이라는데, 어쩜, 매일매일 내 커피만 마시게 해주고 싶다.

참고로 제스가 추천한 다음 대사는 ‘마지막 한 송이는 바로 너’였다고 한다.

보좌관의 연애사가 심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이안이 물로 입을 씻고는 말을 이었다.

“기회를 주지.”

“기회라면……?”

“돌아와.”

예? 그건 기회가 아닌데요.

차라리 커피를 다시 내리게 해주세요. 이번에야말로 잘 끓인 독약으로 내드릴 수 있습니다.

난 순간 울컥했지만 체이트의 손끝에 맺힌 성력이 발광하는 걸 보고 마법처럼 이성을 되찾았다.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바보야.’

난 체이트의 손을 테이블 아래에서 꼭 붙잡고 진정시킨 후 대답했다.

“그냥 이곳에서 살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레티시아 브링스턴, 뭔가 오해하는 게 있는데 이건 당신과 내 감정으로만 처리할 일이 아니야.”

이안의 목소리는 조금 더 진중해졌다.

“우리의 혼인은 정치적 유대 관계를 위한 약속이었고 실물이 오가는 거래였다. 당시 협상 테이블에 앉은 건 우리 둘만이 아니었어.”

레티시아와 이안의 약혼은 선대 카히텐 대공과 브링스턴 후작의 구두 약속이었다. 그것을 이안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이어받은 것이다.

“가문의 이해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해. 귀족으로 태어나 나고 자라기까지 그 모든 걸 누려 놓고 이제 와 피하는 건 철없다는 말로도 웃어넘길 수 없는 짓이야.”

“…….”

억울하다.

난 누려본 적이 없는데.

“우린 각자의 입장에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이어진 그의 말에 체이트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돌아와서 나와 혼인하고, 내 후계를 낳아. 그게 당신의 의무야.”

“미쳤나?”

체이트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앉히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레티시아의 처연한 죽음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도 그렇게 죽어야 했던 걸까…….’

고작 단역 하나의 삶이 달라졌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많은 나비효과를 낳았다는 게 놀랍고도 씁쓸하기만 하다.

“……체이트!”

허탈한 마음에 잠시 방심한 사이, 체이트가 이안에게 응집된 성력을 날렸다.

이안은 불시에 날아 든 공격을 제 성력으로 상쇄시키고 그를 노려보았다.

“체이트 폴린, 당신도 본인 입장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군.”

“입 닥치고 당장 여기서 꺼져.”

체이트의 독기 어린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 아나? 당신이 사라진 사이 신전 내의 내분이 격화되고 있다는 거.”

내분?

체이트가 위험한 상황인 건가?

체이트는 그간 신전에 대한 얘기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 다 얘기해 줄 듯하면서도 묘하게 핵심을 비껴 나갔지. 그게 단순히 금언령 때문이 아니라면…….

‘걱정할까 봐 숨긴 건가?’

이안의 말에 따르면, 체이트가 대주교가 되면서 지붕 위 닭 쫓는 신세가 된 안타카스 주교가 암암리에 자신의 파벌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가 언제 체이트의 뒤통수를 치고 대주교직을 찬탈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

그 중차대한 시기에 체이트는 여기 있다. 이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

‘우린 각자의 입장에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이안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머리를 빙빙 맴돌았다.

‘의무. 의무라.’

체이트는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다. 나 때문에. 그로 인해 더 큰 위험에 처할 지경에 이르렀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이안의 말을 무시하는 체이트를 보며,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간 원작과 코렐리아에게만 집착하며 정작 체이트에게 무심했던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다름 아닌 내 사람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체이트의 삶을 방기해왔다.

……이 아이,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걸까.

원작의 골든타임은 이미 지났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다른 이로부터 희망을 찾을 시간에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 나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체이트의 평온을 위해서.

“생각……해 볼게요.”

난 이안에게 그리 대답했다.

* * *

레티시아의 카페에서 나온 후, 제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왜 그냥 나오셨습니까?”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레티시아를 끌고 나올 수 있었다.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그들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신전에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안이니 이안으로서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이안이 처음에 체이트의 도발에 순순히 응했을 때, 제스는 당연히 그가 거기까지 계산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 대공 전하는 실리에 밝으셔, 라고 속으로 감탄까지 했건만.

“여자를 억지로 끌고 가라고? 제스, 신사의 품위를 지켜.”

……신사?

먼저 레스토랑에서 팔 끌고 언성 높인 게 누군데.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레스토랑 직원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저 인간이 알기나 할까?

“죄송합니다.”

제스는 사회생활을 잘했다.

“반성하겠습니다.”

“그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스의 주먹에 남몰래 힘이 들어갔다.

‘인생 더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꽃다발을 내밀던 순간의 레티시아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붉어진 얼굴, 할 말을 잃은 표정.

“쑥스러움이 많은 여자더군.”

“예?”

“내 약혼녀 말이야. 내 얼굴만 보면 낯을 붉히잖아.”

“아, 예.”

그게 결코 좋은 시그널은 아닌 것 같지만…… 제스는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텔로 가는 마차에 올랐고, 제스가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렸다.

이안이 움직이는 마차의 전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약혼녀는 꽤 평범하더군.”

“예쁘신 편 아닙니까?”

“그런가.”

이안은 담담했다. 애당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으니. 얼굴은 예쁘장하지만, 능력치 면에서는 평균이거나 그 이하였다.

“물론 상상도 못 할 장기 도주를 하고, 평민처럼 위장하고 산 건 전혀 평범하지 않은데…… 아, 커피도요.”

제스가 텁텁한 혀를 빼물고 인상을 썼다.

이안이 잠시 침묵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평범한 여자의 집에 왜 체이트 폴린이 있었던 거지?”

“으음, 우연 아닐까요?”

“세상에 그런 우연은 흔치 않지.”

그는 자신을 방심케 하는 요소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돌아가면 그것부터 알아봐, 제스.”

설사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연결 고리가 보이지 않아도.

“그 남자가 어쩌다 내 약혼녀 집에 머물게 됐는지.”

작은 실을 당기다 보면 이따금 상상 이상의 물건이 끌려 나오곤 한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