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체이트.”
다른 하나는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체이트!”
“…….”
이안이 다녀간 후, 체이트는 묵언 수행 중이었다.
그는 뭔가에 골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화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삐졌니?”
그렇게 물어보는 내 목소리도 삐죽삐죽했다.
아니, 나도 당황스러운데 너까지 왜 이래?
“야아. 대답 좀 해 봐.”
“누님.”
“……!”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망가죠.”
“뭐?”
“이대로 있으면 카히텐 대공이 누님을 억지로 끌고 갈지도 모릅니다. 그런 남자와 일생을 함께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요?”
뭐, 그거야.
애당초 여기 온 이유 자체가 그 남자와의 결혼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도망가요.”
“어……?”
도망.
물론 생각 안 해본 것 아닌데.
“너랑 같이?”
“예.”
“너……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체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누님이 없다면……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신전으로 가기 싫다고?”
“예.”
아니, 하지만.
“…….”
네가 대주교잖니…….
나는 울상으로 미소 지었다.
‘그런데…… 대주교면 결혼은 물 건너간 거지?’
음, 이제 슬슬 내 오랜 집착을 내려놓을 때가 된 건가.
3월의 절반 이상이 훌쩍 지났다.
직전까진 경황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정리되었다.
이미 우리의 미래는 원작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 전개가 크게 바뀌었으므로 내가 그의 결혼에 여전히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어졌다.
‘미래가 이런 식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
아직 희망은 있다.
체이트에게 희생과 책임을 강요하지 않고도 앞날을 모색할 방법이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볼 수밖에.
그래, 이 순간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레아 핀볼트가 아닌 레티시아 브링스턴으로서.
“난 도망갈 생각 없어.”
“누님……?”
“넌 신전으로 가기 싫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난 돌아가고 싶어.”
“…….”
“원래 내 삶으로.”
내 손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아무 능력도 타고나지 못한 단역의 몸으로?
가망성은 낮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만했다.
‘코렐리아 폴린은 이제 태어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원작을 망쳤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코렐리아가 없다면 신의 도움 또한 막연히 기대하기 어렵겠지.’
구원자가 없으니 구원이 필요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일 터.
이안의 흑화를 막아야 한다.
이건 그 누구보다 내게 가장 적합한 역할이었다.
나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그의 약혼자니까.
“난 이제 레티시아 브링스턴으로 살 거야.”
나는 입술을 당겨 억지로 미소 지었다. 밝게 보이려고 노력하고는 있는데 제대로 웃고 있는 건진 모르겠다.
체이트의 표정이 차가워지는 걸로 봐서는…… 아마 제대로 못 웃고 있는 거겠지.
“레티시아로 살겠다고?”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은 즉, 카히텐 대공을 따라가겠다는 뜻입니까?”
“그래야겠지. 이미 한번 도주했다 잡혔으니 다시 도망치면 추적이 더 거세질 테고. 두 번 잡힐 바엔 지금 순순히 따라가는 게 나을 거야.”
“저와 함께 간다면 평생 그를 따돌릴 자신이 있습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고작 나 때문에 네가 일궈 놓은 자리를 내던지고 무책임한 도망자가 되길 바라지 않아. 이거, 생각보다 아주 힘들거든.”
“전 상관없습니다.”
그는 단호했다.
“네가 상관이 없다고 해도 내가 상관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난 속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나, 대공비가 되고 싶어.”
“……?”
“평민으로 사는 거 힘들고 지쳐. 지겹기도 하고. 귀족으로 태어났는데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더는 모르겠어.”
진심과 다른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어릴 땐 그저 잘 모르는 남자와 혼인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철들고 보니까 그게 제일 편한 삶이었던 것 같아.”
“누님.”
“카히텐 대공 전하도 직접 보니까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마음에…… 들어.”
“누님.”
“그러니까 우리, 소꿉놀이는 그만하자.”
체이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굳은 표정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할 말은 다 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만하자고?”
그가 내 손목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그의 눈에서 검붉은 불꽃이 튀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만해?”
잘생긴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왜 항상 이런 식이지? 왜 항상 내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혼자 결정하는 거야?”
“체이트.”
무심코 입술을 깨물자 그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호소했다.
“결혼할 마음 없다고 했잖습니까. 눈에 차는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혼자 살겠다면서요.”
“그러니까 대공 전하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모, 못 믿을 건 또 뭔데.”
난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열심히 조잘거렸다.
“대공 전하면 당연히 눈에 차지. 잘생겼고, 돈 많고, 키도 크고, 권력도 있고……. 또, 그, 생각한 것보다 미친 것 같지도 않고.”
“그런 남자가 정말 그 남자 하나뿐이에요?”
“어?”
저벅저벅.
단 두 걸음 만에 그와의 거리가 한 뼘 차로 좁혀졌다.
“당신이 원하는 게 조건뿐이라면, 그런 남자가 카히텐 대공 하나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신?”
낯선 호칭에 낯선 말투.
낯선 얼굴로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당신.”
어두운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소꿉놀이는 그만하자며.”
“그건 내가…….”
“내가, 뭐?”
그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우리가 진짜 남매라도 돼?”
“…….”
“당신이랑 내가 피 한 방울 섞인 적 있어?”
“…….”
“아니지.”
그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당신과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그, 그래도 난 우리가 가족이었단 건 잊지 않을 거야.”
“가족?”
체이트의 잇새로 헛헛한 웃음이 흘렀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잡고 비비다 손을 폈다.
스르륵,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우린 남이야, 레티시아.”
“……!”
충격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타인이 가족이 되는 방법은 그런 게 아니지.”
머리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당신이 나와 가족이 되려면, 이런 식으로는 안 돼.”
“그, 그럼…….”
“레티시아.”
체이트의 음성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숨을 들썩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하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이.
“레티시아, 나는.”
그때였다.
콰앙!
바닥이 울릴 정도의 굉음에 나는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머리 위로 후드득, 천장의 판자들이 떨어졌다. 체이트가 팔을 들어서 막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뇌진탕으로 골로 가는 중이었을 거다.
“뭐, 뭐야?”
“……어먹을. 하필…….”
체이트가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외부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도 비속어인 듯했다.
“습격입니다.”
“스, 습격?”
보잘것없는 산골짜기 이층집을 누가 습격해?
“누님을 노린 건 아닐 겁니다.”
체이트가 습관적으로 나를 누님이라 부르며 말을 이었다.
“표적은 아마도 제 쪽이겠죠. 일단 밖으로 나가요.”
이안은 안타카스 주교가 체이트를 노리고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공격 또한 신전 내 적대 세력의 소행이라는 말인가?
나는 체이트를 따라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나가자마자 거대한 불덩이가 이층집 지붕으로 떨어졌다.
‘세상에, 무슨 메테오도 아니고.’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보며 나는 뒤늦게 휴게실 붙박이 하나를 떠올렸다.
“로체! 로체가 안에 있어!”
“그 늙은이는 엘프예요. 신체 능력 하나는 발군이니 알아서 피했을 겁니다.”
“그, 그런가…….”
이런 긴박한 순간까지 로체는 체이트에게 늙은이구나…….
살아남아서 한시름 놓은 것도 잠시.
체이트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후방으로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또?”
“누님은 여기 계세요.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체이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불타는 집과 그가 사라진 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저대로 가다간 불길이 숲까지 번질 텐데.’
우선 불부터 꺼야 한다.
난 얼른 강가로 달려갔다.
“레아 양!”
몇 걸음 뛰어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로체!”
무사했구나!
“자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지.”
그가 몸에 붙은 재를 툭툭 털며 다가왔다.
“다친 데 없죠?”
“어, 응. 난 괜찮아.”
“아뇨, 저요.”
그가 제 얼굴을 가리켰다.
“긁히거나 다친 데 없습니까?”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한결같은 새끼…….’
하지만 로체의 여상한 태도가 오히려 마음을 안정케 했다. 난 침착하게 그에게 상황을 알렸다.
“체이트가 기습을 받았어. 현재는 습격자를 쫓고 있고.”
“또 그놈이에요?”
로체가 툴툴거렸다.
“지금 짜증 낼 시간 없어. 불부터 꺼야 해. 이대로 두면 숲이 불바다가 될 거야.”
나는 로체의 옷소매를 붙잡고 강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아 양, 그새 잊었습니까?”
“응?”
“저 엘프잖아요.”
그의 기다란 귀가 보란 듯 쫑긋거렸다.
“기다려 보세요.”
로체의 하얀 손끝에서 둥그런 구슬이 둥실거렸다.
그가 파랗고 반짝거리는 구슬을 허공에 던지자 집 위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너…… 엄청나구나.”
“엘프는 고대의 정령사니까요.”
“너네는 평생 가뭄 걱정은 없겠다.”
나는 실없는 소리를 하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부터 무너져 내렸다.
‘아니, 아직 숨 돌릴 때가 아냐.’
다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무리하지 마세요. 몸도 약하면서.”
“체이트가 아직 안 돌아왔어. 체이트에게 가 봐야 해.”
“진정해요, 레아 양. 지금 레아 양이 가 봤자 방해만 될 거예요.”
“…….”
로체의 말이 옳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일반인, 나약한 단역에 불과하다.
혼자선 불 끄는 것도 애먹는 주제에 어딜 가겠다는 건지.
“미안, 내가 주제 파악을 못 했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로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의 시선이 숲을 향했다.
“그 살쾡이, 어디 가서 당하고 살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