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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0화 (30/140)

30화

고요한 수풀 사이로 자객 한 무리가 쥐 떼처럼 은밀하게 움직였다.

‘동작이 체계적이야. 훈련을 꽤 잘 받았는데.’

체이트는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수풀 한가운데에 섰다.

휘익!

나무 위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체이트는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나무를 향해 성력을 방출했다.

이어서 자신의 체내에서 성력을 끌어 올렸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은 신의 힘이, 그의 전신을 거대한 맹수로 변모시켰다.

“크릉…….”

야수화를 마친 체이트가 이를 드러내며 자객에게 돌진했다.

“큭!”

한 명이 목을 물리자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크허억!”

“으악!”

체이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맞지 않고 단신으로 자객들을 물리쳤다.

어느새 그의 검은 털이 자객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놈을 처리하기 직전.

체이트는 인간으로 돌아왔다.

“죽여! 그냥 죽여라!”

자객이 소리쳤다.

“너희들, 성력을 전혀 개방하지 않고 싸우더군.”

체이트가 말했다.

“아니면, 쓸 줄 모르는 건가?”

“그냥 죽…… 크윽!”

그가 자객의 머리를 잡아 올리고 물었다.

“말해. 누가 너희를 보냈지?”

“윽…….”

자객이 입을 우물거렸다. 뭔가가 입 안에서 팍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자객의 목이 아래로 푹 꺾였다.

“……독?”

체이트는 절명한 그의 입 안을 살폈다. 예상대로 작은 약주머니 하나를 혀 밑에 숨겨두고 있었다.

‘이상하군.’

신전의 사제와 기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죄악으로 여기는데.

게다가 이들 자객은 전투 내내 단 한 번도 신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집을 무너뜨린 최초의 일격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신전 놈들이 아닌가.”

누군가, 신전 밖에서 그를 노리는 이가 있었다.

‘아니, 나 하나뿐만이 아니다.’

자신만을 노렸다면 조금 더 집중적인 공세를 퍼부었을 것이다. 제 몸뚱이 하나에 총력을 쏟아부어도 원하는 바를 쟁취하긴 힘들 테니까.

게다가 자신이 목적이라면 그간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가 굳이 지금 공격을 시도할 이유가 역시 없다.

‘카히텐 대공에게 따라붙은 건가.’

대공은 정체를 감춰도 눈에 띈다. 애당초 제 신분을 숨길 의지도 크게 없어 보이는 오만한 남자였다.

그는 자신처럼 자존심 다 버리고 숲길과 늪지를 기며 은둔하는 타입이 아니다. 작정하고 추적하자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 카히텐은 나를 찾아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그는 레티시아를 찾아서 이곳에 왔다. 그렇다면 자신을 공격한 무리의 목적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레티시아까지 포함인 건가.’

“……제길!”

체이트가 날짐승보다도 빠르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 *

체이트가 돌아왔을 때 카페를 포함한 집터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누님은?”

멀쩡히 살아 있는 로체를 보자마자 한바탕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은 체이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쪽에.”

로체가 임시로 피운 화톳불 쪽을 가리켰다.

레티시아가 로체의 겉옷을 덮고 불가 옆에 누워 있었다. 체이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널 기다리다 기력을 너무 소진했는지 중간에 저렇게 쓰러지더라.”

“…….”

체이트는 무거운 걸음으로 레티시아에게 다가갔다. 북부의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된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다른 장소로 데려가 쉬게 할 수는 없었나?”

“너 안 오면 안 가겠다고 버티는 걸 어떻게 데려가.”

체이트의 책망하는 말투에 로체가 억울한 듯 꿍얼거렸다.

“열이 나는군.”

손으로 레티시아의 이마를 짚어 본 체이트가 미간을 좁혔다.

“레아 양은 이런 일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지 못하니까. 수도에서 여기까지 도망한 것도 사실 기적이지.”

로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별이 총총 박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졸지에 노숙하게 생겼네.”

“엘프는 원래 숲에서 먹고 자는 거 아니었어?”

“당치도 않은 소리. 그랬다면 내가 150살이 넘도록 이렇게 탱글탱글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체이트는 그의 자찬을 무시하고 겉옷을 벗었다.

“허어.”

로체가 제 겉옷을 집어 던지고 제 옷으로 레티시아를 감싸 안는 그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그 코트 비싼 거야.”

“나중에 물어주지.”

“상황 참작해서 두 배로 부탁해.”

체이트는 이번에도 로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잃은 레티시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파리한 입술에 손끝을 가져다 대며 성력을 개방했다.

“……어째서지?”

뭔가가 잘못됐는지, 체이트가 인상을 쓰고 중얼거렸다. 이내 성력을 거둔 그가 레티시아를 안아 들었다.

“잠깐, 어디 가는 거야?”

로체가 벌떡 일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어디 가냐니까?”

로체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성력에 의해 가로막혔다.

로체는 따끔하게 저를 공격해 오는 신성에 손등을 매만졌다. 말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체이트는 평소의 살쾡이와 달랐다.

촉이 좋은 로체가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너…… 설마 레아 양을 납치하려는 건 아니지?”

저 살쾡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정신 차려. 레아 양이 눈 뜨면 널 순순히 따라가 줄 것 같아?”

로체가 체이트의 뒤를 따라붙으며 쏘아붙였다.

“이번 공격, 너 때문에 일어난 거라며. 네 불완전한 세계로 레아 양을 끌어들이고 싶은 거야?”

“…….”

“레아 양은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야. 네가 매 순간 레아 양을 지켜낼 수는 없을 거라고.”

우뚝.

걸음이 멈췄다.

체이트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로체를 돌아보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소리라 입 닥치고 있었더니 어르신 잔소리가 끝이 안 나는군.”

체이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의원에게 보이려 할 뿐이야. 성력을 다 소모해서 신성으로 치유할 수가 없거든. 당신이 가진 힘은 마물에 의한 외상이 아니면 통하지 않을 테고.”

로체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망할 녀석, 그런 거였으면 진작 얘기를 해야지…….”

“당신이 뭐라고 굳이?”

“……허어.”

말세다, 말세.

로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향해 마력 구슬 하나를 던졌다.

구슬이 팡 터지며 주위가 환해졌다.

“짐승 길눈이야 충분히 밝겠지만, 북부의 밤은 추우니까.”

레티시아를 위한 히팅 마법이었다.

* * *

요안나 기벗은 밤잠이 많은 편이었다. 깊은 잠을 잘 때 누가 깨우는 걸 아주 질색하는 편이기도 하고.

쾅쾅!

그런 요안나의 단잠을 깨운 건 요란한 문소리였다.

“대체 야밤에 누가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그녀는 몽둥이 하나를 꼬나 쥐고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어떤 놈이 이 시간에…… 어머, 체이트 군.”

오랜만에 보는 미남의 얼굴에 요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대를 인식함과 동시에 몽둥이를 등 뒤로 숨긴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의 들뜬 낯은 금세 심각해졌다.

“그쪽은…… 레아 양?”

체이트의 품에 안긴 여자는 자신이 아는 그 레아 핀볼트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의사로서의 소명이 우선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상태 좀 보죠.”

* * *

“머리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고열은 아니에요. 외상도 달리 없고.”

요안나가 레티시아의 이마에 찬 수건을 올리며 말했다.

“보통 과로하거나 정신에 무리가 가면 이렇게 쓰러질 수도 있어요. 레아 양의 신체는 인간 기준으로 봐도 그다지 건강한 편이 아니니까.”

“언제쯤 깨어날 것 같습니까?”

“글쎄요. 한숨 푹 자고 나면?”

요안나가 싱긋 웃었다.

“큰일은 아니에요. 그냥 무리한 것뿐이니까.”

체이트는 그날 요안나의 집에서 밤새 레티시아의 곁을 지켰다.

그동안 한 가지 의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왜 신성이 들지 않은 거지?’

레티시아의 몸에 신성을 붙여두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성력을 불어넣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전에 한번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니까 도중에 어떠한 계기가 없었다면, 레티시아는 줄곧 신성이 들지 않는 몸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신성이 들지 않는 몸이라.’

체이트가 알기로 그런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마물.’

만물에 평등한 은혜를 베풀어야 할 신이 수호를 거부한 존재들.

마물엔 영혼이 없다. 의식도, 목적도 불분명하다.

사멸한 영혼이 남기고 간 악의만이 죽은 동물에 깃든 채 삐걱거리는 게 바로 놈들이었다.

그들을 레티시아와 비교할 수는 없다. 레티시아에겐 영혼이 있으니까.

그래서 더 의아했다.

살아 있는 영혼을 가진 그녀를 신성이 거부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의 미움을 사지 않은 이상은…….’

체이트는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인적 사항을 전부 알고 있었다.

브링스턴 후작가의 장녀이자 적자. 17세에 북부 카히텐 대공과 혼인을 약속했으나 도주 후 잠적. 이후 레아 핀볼트라는 가명으로 넴페르 산맥 너머 델린 영지에 거주.

그녀는 출신도 확실했고 행방에 빈틈도 없었다.

의심할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는, 평범한 귀족 영애였다.

‘……가만. 평범한 귀족 영애가 이런 식으로 살 수 있나?’

문득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체이트가 그녀와 처음 마주했을 때, 레티시아는 이미 레아 핀볼트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 주민들과 위화감 없이 섞여 살면서 평민의 삶에 약간의 불편도 내비치지 않았다.

체이트가 아는 레티시아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에 별다른 의아함을 가지지 않았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평생을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이렇게 쉽게 평민의 생활에 적응해서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평범하지 않다.

‘그녀에게 내가 모르는 비밀이 아직 남은 건가…….’

체이트는 레티시아의 잠든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쌔근쌔근 잠이 든 그녀는 세상 무해해 보였다.

* * *

아침이 개운하면 그건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은 너무 개운했다.

불에 타 버린 집 앞에서 로체와 함께 체이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보니 침대 위였다.

그것도 발이 툭 튀어나올 만큼 작은 침대 위.

‘나보다 키 작은 사람이 존재하긴 했구나.’

나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기자기한 나무 소품과 끝이 둥근 가구들이 있는 실내는 꼭 동화 속 요정의 집 같았다.

요안나 양의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테리어다.

‘어쩐지 침대가 작더라니.’

그래, 나보다 작은 건 어린애랑 드워프 정도뿐이지.

이렇게 말하면 또 차별이라고 싫어하려나.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지?’

요안나 양의 집은 시내에 있다. 내가 사는 마을과는 거리가 꽤 되는 곳이다.

‘음, 나 혹시 쓰러졌나?’

체이트의 낯선 태도에 이어 갑작스러운 공격과 불타 버린 집까지.

예상 밖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터져서 몸이 몹시 피로하다고 느끼긴 했다.

그렇다고 픽 쓰러져 버리다니.

역시 유리 몸뚱이…….

내가 자조하고 있을 사이에 작고 동그란 반원형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물수건이 든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체이트?”

허리를 한껏 굽히고 작은 문으로 들어온 체이트가 내게 다가왔다.

“깨어나셨군요.”

“나…… 쓰러진 거지?”

“예.”

“역시…….”

난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체이트가 성력을 쓰지 않고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혹시 싸우면서 무리했나?

나는 걱정스럽게 체이트의 몸을 살폈다. 그의 안쪽 셔츠가 붉게 젖어 있었다.

“너 그 피……!”

“아, 여벌옷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너 다쳤어?”

내가 놀라 묻자 그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대답했다.

“예, 조금…….”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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