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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1화 (31/140)

31화

같은 시각.

로체는 아직 불타 버린 집 앞에 있었다. 땅을 치며 우는 집주인과 함께.

“아이고오! 아이고오! 여보, 우리 리틀 베이비가 홀라당 타 버렸소! 여보!”

일찍이 사별한 그의 남편을 부르며, 집주인이 훌쩍거렸다.

“우리가 저 집 짓는다고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에…….”

로체는 난감했다.

객식구로 하도 오래 있어서 그런지 가족 구성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러다 얼마 안 가서 수리비를 청구받을지도 모른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이 집주인은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레티시아가 돌아와서 직접 마무리를 지을 때까진, 로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절대 놔주지 않을 게 뻔하다.

‘살쾡이 녀석, 진짜로 레아 양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버린 건 아니겠지?’

초조해진 그는 여러 번 숲길을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서 타 버린 집을 보며 웅성거렸지만, 레티시아와 체이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발, 양심이 있다면 돌아와라…….’

그는 속으로 신앙 없는 기도를 반복했다.

‘제발, 제발!’

기도는 반만 이뤄졌다.

레티시아는 오지 않았지만, 대신에 다른 아는 얼굴이 찾아온 것이다.

“오, 대고…… 읍!”

“조용히 해.”

이안이 그의 입을 다물게 하고 불탄 집 가까이 다가갔다.

“여긴 또 왜 이 모양이야?”

그는 이른 아침부터 레티시아를 위한 최고급 마차를 예약하고 브링스턴 후작가에 서신까지 보내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물론 입으로만.

일은 제스가 다 했다.

“탔습니다…….”

로체가 중얼거렸다.

“내가 장님인 줄 아나? 그런 건 보면 알아.”

“새까맣게 탔습니다아…….”

집주인이 비척비척 다가와 중얼거렸다.

과부로 오랜 세월을 억척같이 살아온 그녀는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았다.

어디 사는 뉘신 줄은 모르겠지만 이 멀끔한 행색에 멀끔한 얼굴.

이안은 누가 봐도 듬직한 돈줄이었다.

“제가 이 집의 원래 주인인데, 혹시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내 약혼녀를 만나러 왔는데.”

“……!”

옳다구나.

집주인이 두 손을 모아들었다.

“레아 양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군요!”

남의 집을 홀라당 태워 먹고 사라진 임차인 때문에 아침부터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약혼자가 여기 있다면 안심이지!

집주인은 재빨리 주판알을 굴리며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아이고. 비싸다, 비싸.’

죄다 최고급이었다.

이 정도면 신용은 썩 괜찮은 수준이다.

그녀가 덜렁거리는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제가 살던 집은 아니지만 어떻게 차라도 한 잔?”

“발암 물질로 가득한 잿더미 속에 제 주인님을 밀어 넣지 말아 주시죠.”

제스가 집주인을 막아섰다.

“주인님…… 이시구나……!”

신용, 대단히 괜찮다!

이안은 시끄러운 집주인을 외면하고 로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충격으로 실신해서 지금 의원에게 갔습니다.”

다시 돌아올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체는 어젯밤의 체이트를 회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실신했다고?”

“예.”

“…….”

이안은 화마로 그을린 레티시아의 1층 카페 전경을 일별하고 걸음을 돌렸다.

“안내해라, 엘프. 그쪽으로 가지.”

“제, 제집은요?!”

뒤에서 집주인이 소리쳤다.

“제스, 처리하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르려던 제스가 집주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런데 내 약혼녀는 왜 실신까지 한 거지?”

“그게…… 보시다시피.”

로체가 집을 가리켰다.

“아아.”

이안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오늘부로 떠날 텐데 고작 저런 일로 실신이라니. 아직 쓸데없는 미련이 남았나 보군.”

로체는 입을 다물었다.

그로선 이안이 오늘 요안나의 집에서 레티시아와 무사히 만날 수 있을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 * *

난 아침부터 체이트의 붉게 젖은 셔츠를 보고 정신이 나가 있었다.

“다쳤다고?”

“예.”

“어디 좀 봐 봐.”

“괜찮습니다. 이런 상처쯤이야 알아서 나을 테니까.”

“그래도!”

곱게……는 아니지만 열심히 키운 내 고양이를 누가 이렇게 함부로 대했담?

“아프겠다.”

울상을 짓고 겉옷을 들치는데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체이트가 음영이 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주면 덜 아플 것 같은데.”

저 능글맞은 웃음, 낯설지 않다.

“…….”

내가 그간 이리저리 치이며 인류애를 많이 잃은 게 분명하다.

애가 다쳤다는데 의심부터 드는 걸 보면 말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체이트의 셔츠 가슴팍을 유심히 살폈다. 검게 변색돼 가는 붉은 액체. 분명 사람의 피였다.

난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 체이트는 얌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자 그의 맨가슴이 드러났다.

맨가슴, 그러니까 아주 멀쩡한 맨가슴 말이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멀쩡했구나.”

“두 번은 안 속네요.”

“너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음.”

“야, 나도 학습이란 걸 하긴 해.”

짜증스럽게 투덜대자 그가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요.”

“뭐?”

“그냥 바보 하지.”

체이트가 작게 웃었다. 어딘지 쓸쓸한 미소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연히 어제 일이 떠올랐다.

‘메테오, 장난 아니었지.’

이런 한적한 마을까지 자객이 들어오다니. 얘 대체 무슨 삶을 살고 있었던 거야?

돌이켜보면 체이트의 주변에는 줄곧 적이 있었다. 사람이 아니더라도 종종 마물을 끌어들여 상처를 입곤 했으니까.

‘거기에 신전 세력까지 가세했다고? 아무리 체이트가 강하다지만 감당할 수 있는 걸까.’

이번에야 운 좋게 멀쩡했다지만.

퍼뜩 걱정이 들었다.

“너…… 괜찮은 거야?”

“괜찮다니까.”

그는 제 손으로 셔츠를 벌려서 다시 확인시켜 주려고 했다. 난 얼른 옷깃을 붙잡고 여며 주었다.

“아니, 상처 말고. 어제 습격 말이야. ……신전에 적대 세력이 있다며. 그들 짓이지?”

“…….”

체이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해졌다. 하지만 금세 여유를 되찾은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 처지가 처지다 보니.”

“…….”

“그렇게 걱정되면 옆구리에 끼고 다녀주지 그래요?”

속상한 마음에 그를 빤히 바라보자 또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댄다.

‘내가 네 옆에 있으면 오히려 짐일걸.’

어제도 그렇다. 난 결국 아무런 도움도 못 되고 쓰러져 짐만 되었다.

‘요즘은 매번 도움만 받는 것 같네.’

8년 전의 고양이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한 짐짝일 뿐.

언제까지고 체이트가 여유로울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그의 곁에 내가 있다면 상황이 많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

‘각자도생해야 할 때도 됐지.’

마침 나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놓은 참이었다.

난 체이트가 떠온 물을 한 잔 마시고 세수를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나 이제 괜찮아.”

“그냥 있어요. 무리하지 말고.”

그가 내 소맷귀를 붙잡고 침대에 앉혔다.

“아냐. 할 일 많아. 갈 때 가더라도 뒤처리는 제대로 하고 가야지. 그 집이 진짜 내 집도 아닌데 그 모양을 만들어 놨으니……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났을걸.”

우리 집주인의 집념을 생각하면…… 어우. 내 목을 짤짤 흔들며 물어내라고 외칠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레티시아.”

체이트가 나를 불렀다.

‘레티시아라. 이제 작정하고 남처럼 굴겠다는 건가.’

아마 다시는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왜?”

“그 남자, 진짜 따라갈 거예요?”

이안 얘기였다. 습격 직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체이트의 낯선 모습도.

“…….”

난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응, 따라갈 거야.”

“그 남자랑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하고 싶다니까.”

“내 눈치가 당신만 한 줄 아나.”

‘우씨, 극딜하네.’

얘 왜 점점 되바라지지. 아니, 원래 이런 앤데 내가 그동안 콩깍지에 씌어 있었나?

“그래, 솔직히 얘기할게. 결혼은 별 의미 없어. 난 그냥 원래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이야.”

그래야 내 실수를 메울 기회가 생길 테니까.

“……레티시아.”

어제처럼 냉랭해질 줄 알았는데. 체이트는 비 맞은 고양이처럼 축 늘어진 채 젖은 눈을 깜박였다.

“나 두고 가지 마요.”

“애처럼 떼쓰지 마. 너도 이제 너 알아서 살아야지.”

“결혼하라고 들들 볶을 땐 언제고.”

“그건…… 이제 상관없어.”

자꾸 시선을 피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위선을 들킬 것 같아서.

어쩌면, 난 처음부터 체이트가 진심으로 결혼하기를 바란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문자로 겪은 미래와 직접 부딪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우왕좌왕했을 뿐.

내 우유부단한 태도가 우리 모두의 발목을 잡았다. 앞으로는 그리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체이트, 자유롭게 살아.”

기왕 이렇게 된 거, 괜히 원작에 엮여서 고생하지 마. 내가 최대한 애써 볼 테니까.

“이제 너는 네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가는 거야.”

체이트가 작게 웃었다.

“내가 당신 있는 데 말고 갈 곳이 어디 있어.”

“대주교씩이나 돼서 할 말이야?”

“충분히 할 말이죠. 내가 딱히 신앙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북부에 아르키드네 신도가 있었다면 듣고 기함할 소리였다.

“신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내 세상엔 당신 하나밖에 없는데.”

“체이트.”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죠.”

“……응?”

“당신 그런 거 잘하잖아. 알아갈 생각도 없이, 안 될 것 같으면 덮어 놓고 무시하는 거.”

예리한 독설이었다.

타인의 깊은 사정에 애써 무심하게 굴던 내 관조적 태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에 대해선 호기심을 죽이고 이를 악물며 외면하곤 했다.

알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격이라는 걸 나 자신도 잘 알았으니까.

“네가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어.”

지금도 그랬다.

체이트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닐 것 같아서.

“진짜 몰라?”

“응.”

내 대답에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 흑발을 무성의하게 흐트러뜨리다가 힘없이 손을 툭 떨어뜨린 그가 입가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붉은 눈이 나를 담아낸 순간,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 내 첫사랑이잖아.”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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