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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2화 (32/140)

32화

“응……? 어, 응? 뭐라고?”

‘첫사랑?’

첫사랑이라고요? 제가요?

아니, 이건 진짜 몰랐는데요?

뜻밖의 충격 고백을 듣고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

자연스럽게 웃어넘기고 싶은데 입이 출력을 거부한다.

나사 빠진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체이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멀게 느껴졌다.

“내가 당신 말 한마디에 얼마나 처참하게 흔들렸는지 알면, 당신 평생 함부로 입도 벙긋 못 할걸요.”

웃기지 마라. 지금 강둑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건 나였다.

‘쟤가 날? 어? 제가? 그렇고 그런 의미로?’

“언제부터……?”

“8년 전, 당신이랑 처음 만난 날부터.”

미친, 겁나 오래됐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8년을 한 사람만…… 야아, 그게 돼?”

“되던데.”

체이트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말했잖아. 첫사랑이라고.”

“…….”

“좋아한다는 말도 이미 몇 번이나 했던 것 같은데.”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어퍼컷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에서 별이 핑핑 돈다.

‘그럼 결혼하지 않겠단 것도…….’

그간의 일이 기차 속 풍경처럼 지나갔다.

‘누님께서 결혼을 안 하시는데 제가 어찌 식을 올립니까?’

‘혼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지요. 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뭘 기다리느냐고요? 그야…… 누님께서 사내가 필요한 날을 기다리지요.’

그럼 그게 전부…….

‘진짜로 나 때문에…….’

털썩.

난 도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난 지금까지 무슨 삽질을 해댄 거지?’

지금만큼 내 둔감함이 통탄스러운 적은 없었다.

그래, 사지 멀쩡한 20대 초반 남자애가 이성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그럼 나랑 결혼하면…… 문제없었던 건가?’

허튼 생각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바로 날려 보냈다.

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니 애당초 나와 체이트의 그렇고 그런 만남은 후보에도 두지 않을 수밖에.

알아도 달라질 게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우리는 갈 길이 달랐다.

“난, 나는…….”

이성은 답을 내렸는데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해서 이러는 걸까.

나는 몇 번씩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말을 마쳤다.

“미안한데…… 나는, 너 안 좋아해.”

쿵.

심장께에서 뭔가가 철렁하는 느낌이 들었다.

“…….”

체이트는 평온한데 왜 내 심장이 난리인지.

나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진짜야.”

꽉 깨문 이가 아리고 짓씹은 입술에서 쇠 맛이 났다.

“아, 안 좋아해…….”

눈이 시큰거렸다.

* * *

레티시아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요안나를 보러 가겠다며 허둥지둥 방 밖으로 나갔다.

핑계조차 어설픈 도망이었다.

방에 홀로 남은 체이트는 의외로 덤덤했다.

‘뭐, 차일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체이트는 제 행동에 일말의 후회도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닥치고 있었으면 1년 뒤엔 아예 잊혔을걸.’

레티시아가 자신과 함께 노려지고 있고, 그녀에게 제 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 그는 한동안 레티시아를 떠나 있기로 작정했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을 몇 번이고 되새기게끔 만들고 싶었다. 곁에 없어도 있는 것처럼.

이참에 묵혀 온 진심을 뱉어내니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게다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때의 레티시아는 심장을 움켜쥐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고.

‘나는, 너 안 좋아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음성과 사과처럼 달아오른 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와 이지러진 입술.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표정을 하고선 자신을 밀어냈다.

“진짜 바보 아냐?”

체이트가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머리를 젖혔다. 두툼한 팔이 오목한 눈가를 가렸다.

반쯤 가린 얼굴 아래로 입매가 늘어지며 광대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런 얼굴로 말하면 누가 포기해.”

당장에라도 연애편지를 쥐여 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안 좋아한대.

여전히 어리숙하고 어설프지.

‘아, 귀여워서 미치겠다.’

* * *

요안나 양을 핑계로 거실로 나온 건 솔직히 조금 하수 짓이었다. 하지만 거기 계속 있기엔 무거운 분위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좋아, 5분은 멀쩡한 척할 수 있겠어.

조금 진정이 되자마자 요안나 양의 토실토실한 뒤태를 발견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 요안나 양. 어제는 밤늦게 찾아와서 미안했…….”

요안나 양이 내 쪽을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검지를 입에 대고 쉿, 하고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통신구였다. 그녀가 통신을 종료하고 밝게 인사했다.

“레아 양. 일어났어요?”

“누구랑 얘기 중이었나 봐요.”

“로체 군에게 연락이 왔어요. 곧 온다고.”

“아, 직접 가면 되는데 굳이 뭘.”

순간 집주인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가.

로체, 견디지 못하고 피신 온 건가.

“어떤 신사분이랑 같이 온다던데요?”

“신사요?”

집주인은 여자다.

그녀가 아니라면 달리 나를 찾아올 만한 인물은…….

‘설마.’

장미꽃 아흔아홉 송이가 머리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두통에 지끈지끈한 머리를 쥐고 있자 요안나 양이 약을 챙겨 주었다.

그녀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레아 양, 그 신사분은 잘생겼을까요?”

“음, 글쎄요.”

흑막도 주연이니까 얼굴은 당연히 잘생겼지. 문제는 성격이…….

‘성격이 안 잘생겼어.’

처음엔 무섭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계속 보니 공포는 면역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이안이라는 인물의 성격이 보였다. 작중 로맨스 서사가 전무한 이유를 알아봤어야 하는데.

단순히 사랑 따위 모르는 흑막이라서가 아니었다.

‘장미꽃…… 아흔아홉 송이…….’

일이 많이 바빴나.

그래서 연애와 담쌓고 살았던 건가.

이안은 심각한 연애 고자였다.

나는 기대에 찬 요안나 양에게 씁쓸한 현실을 일러주었다.

“요안나 양, 세상은 얼굴이 다가 아니에요.”

“……!”

그녀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요안나 양은 얼굴이 다인 거구나.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나저나 요안나 양은 드워프잖아. 드워프는 카히텐의 종자라고 했지. 그럼…… 이안과는 무슨 관계인 거지? 같은 신도인가?’

……아니, 이안은 무교였지.

가장 종교적인 성씨를 단 가문의 수장이 무교라니, 이건 또 이거대로 아이러니다.

카히텐은 북부 신의 이름이었다. 태초에 이 대륙은 세 명의 신이 각기 세 구역으로 땅을 구분하여 세상을 다스렸다.

남부는 아르키드네, 수도가 있는 중부는 헬리아스, 북부는 카히텐.

현재 헬리아스의 후손은 제국의 황가로 남았고, 아르키드네는 대륙의 최다 신도를 보유한 신성의 상징이 되었다면, 카히텐은 그 입지가 조금 애매했다.

일단 카히텐 대공가가 카히텐 신의 후손들이라는 건 맞는데, 신이 소멸했기에 성력을 타고나는 이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 고로 북부 자체도 그냥 신 자체를 경시하는 분위기고, 카히텐 대공가도 본인들을 신의 후손으로 여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흑막이 성력을 갖고 있지만 신앙심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도 유명한 설정이지.’

카히텐 신을 착실히 모시는 드워프 요안나 양이 이안을 만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미남에 대한 추앙심과 신실함 중 무엇이 우선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 * *

체이트는 내가 나오고 얼마 안 지나서 거실로 나왔다. 직전의 대화로 어색해진 탓에 요안나 양이 건네준 찻잔만 열없이 매만지고 있자, 그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돌아가 있을게요. 쉬고 계세요.”

“어? 아냐. 로체가 이쪽으로 온댔어.”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돌아가 있을게요.”

“아…… 응, 알았어.”

쟤 아까 나한테 고백한 거 맞지?

내가 또 착각한 거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진 게 없지.

만우절 장난 같은 거였나.

‘나는 장난 아니었는데.’

체이트의 한결같은 친절함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는 다시 자기 최면을 여러 번 걸고 요안나 양에게 뜨거운 차를 부탁했다.

* * *

잠시 후.

딸랑딸랑-

문밖의 종이 울렸다.

“아, 왔나 보다.”

종 울리는 소리에 요안나 양이 신나서 현관으로 달려갔다. 뒤뚱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씰룩대는 게 엄청 귀여웠다.

“로체 구우우운!”

주접에 최적화된 저 말투만 고치면 그냥 귀여운 드워프 같을 텐데.

“32시간 만이에…… 허업.”

신나서 문을 열어젖힌 요안나 양이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요안나 양, 잘생긴 남자 좋아하지 않나? 왜 저렇게 굳어 있지?’

평소에 이안 정도 얼굴을 보면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면서 목 날아갈 소리를 해댈 텐데.

체이트와 로체가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은혜로운 조합이라며 손가락으로 액자 모양을 만들어 지켜보던 변태가 바로 그녀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요안나 양은 이상할 만치 조용했다.

“요안나 양?”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

털썩.

현관 앞에 무릎 꿇은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저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현관으로 다가갔다.

현관 앞에 떡하니 선 사람은 로체가 아니었다. 그 녀석은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보기만 해도 혈압 오르게 만드는 남자가 나를 보고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쓰러졌다더니 멀쩡해 보이는군.”

“……예, 뭐. 큰일은 아니었어요.”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몸을 조아리고 있던 요안나 양이 옆에서 내 발목을 손가락으로 쿡쿡 쑤셨다. 아 왜.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요안나 양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가 특유의 오만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데리러 왔다.”

아니 왜 굳이.

“감사 인사라면 됐어.”

아니 그것도 굳이.

난 팔짱을 끼고 뒤에 있던 로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그래, 네가 봐도 심각하지?

그 와중에 요안나 양이 감격에 겨워 중얼거렸다.

“카히텐 님…….”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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