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요안나 양,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카히텐 님의 앞이라고요. 하찮은 종이 감히 허락 없이 고개를 들 수는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굴종적인 거 아닌가. 이안이 진짜 카히텐 신도 아닌데.
‘누가 보면 진짜 신이 재림한 줄 알겠네. 드워프에겐 카히텐 대공가의 위상이 그렇게 대단한가?’
“대공 전하.”
나는 요안나 양 일으키기를 포기하고 이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말했잖아. 데리러 왔다고.”
“어차피 그쪽으로 가야 했어요. 집주인이랑 할 얘기가 남아서.”
“그 여자라면 내 선에서 이미 다 처리했어.”
“아니, 왜 굳…….”
생각해보니 내 자산은 전부 집에 있다. 그리고 그 집은 활활 불타버렸지.
“감사합니다.”
귀를 쫑긋거리던 요안나 양이 다시 내 발목을 쿡쿡 찔렀다.
“사, 상황 설명 좀요…….”
요안나 양의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안이 대신 말을 받았다.
“당신이 지금 건드리고 있는 여자가 내 약혼녀인데.”
굉장히 표현이 뭐 하네요.
“야, 야, 야, 약……혼녀?”
요안나 양의 손가락이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레아 양이…… 카히텐 님의 약혼녀……?”
“아, 그게.”
“레, 레아 양?”
“레티시아 브링스턴. 내 약혼녀의 본명이다.”
“아니, 상의 좀 하고 말해요!”
10년간 함구해 온 정체를 그렇게 허무하게 발설하시면 저 몹시 서운하거든요! 빙의했다는 거 빼면 그게 제 최고 아웃풋이거든요!
“사실인데 말해서 문제 될 거 있나?”
“많죠.”
“어떤 점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요.”
난 한숨을 푹 내쉬고 퍼렇게 질린 요안나 양을 가리켰다.
“일단 요안나 양부터 일어나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러다 다리에 쥐 날 것 같은데.”
“저 여자가 멋대로 꿇은 거다.”
자기를 신처럼 모시는 사람한테 태도가 저게 뭐야.
성격 진짜 개 못생겼어.
결국 내가 요안나 양을 잡아 일으켰다.
“자. 일어나요, 요안나 양.”
아까와 달리 그녀는 순순히 일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레아…… 아니, 레티시아 님.”
“적응 안 되니까 레아 양이라고 불러줘요.”
“하, 하지만 종복이 어찌 감히.”
“명령이에요.”
“……네, 레아 양.”
요안나 양과의 거리가 멀어진 기분이 든다.
“이런 좀스러운 곳에서 물을 건 아니지만, 마음의 결정은 끝냈나?”
이안은 내 기분 따위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어차피 내가 뭐라고 답하든 제멋대로 할 작정이면서.’
“네, 끝냈어요.”
“결론은?”
“따라갈게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 뭔가 열받네…….
“오늘 당장 출발하지.”
네? 물론 땡전 한 푼 없는 노숙자가 되긴 했지만 그건 좀 갑작스러운데요.
“저 아직 짐도 안 챙겼는데요?”
“그 엉망인 집구석에서 챙길 게 남았나?”
“찾아보면 멀쩡한 거 하나쯤은 나올지도 모르죠.”
“내 아내가 될 사람이 십 년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았다니.”
빠직.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제스에게 부탁해. 그 낡아 빠진 집에 있던 게 뭐든 간에 그보다 열 배는 더 좋은 물건으로 구해줄 테니까.”
‘지금 낡아 빠진 집 무시하십니까? 바리스타 자격증도 없는 주인장의 커피집을 150년 전통의 수제 맛집처럼 보이게 하는 시골 할머니 인테리어를 진정 무시하시는 겁니까?’
……하긴, 불로소득으로 먹고사는 인간이 월세 밀릴 걱정으로 매일 밤 지폐를 세는 영세 자영업자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내 돈, 그래도 조금쯤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물건도 챙기고 작별도 준비할 겸, 이안에게 부탁했다.
“가기 전에 사람들에게 인사 좀 해도 되나요?”
“그 정도야.”
“작별 인사는 저 혼자 하고 싶어요. 레아 핀볼트로서 마무리를 하고 싶거든요.”
“……그러든지.”
이안은 의외로 쉽게 승낙해 주었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길목마다 기사를 몇 붙이긴 했지만.
* * *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건 거리상으로 가장 가깝게 지냈던 한스 아저씨였다.
한스 아저씨는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보다도 나와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듯했다.
“레아! 너 약혼자가 있었다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나온 말이었다.
‘소문이 벌써 퍼졌나. 역시 이 동네 좁다.’
“그렇게 됐어요, 한스 아저씨.”
“세상에, 우리 레아가 결혼을…….”
그는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 같은 얼굴로 감개무량하게 날 쳐다보았다.
“초대는 해줄 거지?”
“그, 조금 멀어서요.”
한스 아저씨의 어깨가 축 처졌다.
‘죄송해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서.’
다음은 델린 남작 부인이었다.
내가 이안 카히텐과 조우하게 만든 원흉…….
“어머, 레아 양! 그럼 약혼자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한 거야? 어머, 어머!”
델린 남작 부인은 손뼉을 짝짝거리며 지극히 푼수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저도 제 약혼자를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아니, 그보다.”
“응?”
“혹시 우심결에 제 초상화 보내셨습니까?”
“응! 잘 나왔지!”
“…….”
‘이 세계는 개인 정보 개념이 없는 건가.’
원흉의 뇌가 너무 청순해서 화도 안 났다.
옆에 있던 델린 남작님이 함께 축하해 주셨다.
“축하하네, 레아 양. 그리고 내 아내 일은…… 음, 내가 대신 사과하지.”
“감사합니다, 영주님.”
개인 정보 개념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남작 부인이 개념이 없는 거였구나.
“레아 양, 신혼집은 구했어?”
“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조금 많이 멀어서, 다시 돌아오기 힘들지도 몰라요.”
“그렇구나…….”
델린 남작 부인은 서운하다며 훌쩍거렸다.
“레아 양 커피를 이젠 못 마시겠네.”
그녀는 내 커피를 좋아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연락은 해야 해?”
나는 그저 열없이 웃었다.
마지막은 로체였다.
“로체.”
“네, 레아 양.”
“체이트가 안 보여.”
“지금 봐도 뭐, 좋을 건 없을 것 같은데요.”
“하긴…….”
그 애에겐 마지막에 너무 모질게 대했다.
“나중에 찾으면 상태 좀 대신 봐줄 수 있어?”
“그러죠.”
“응, 고마워. 여러모로.”
로체에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많이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내가 가장 외롭다고 느낄 때 옆에 있어 준 소중한 친구였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이어서 그의 엄지와 검지가 둥글게 맞닿더니, 익숙한 동전 모양을 만들어 냈다.
“퇴직금만 넉넉히 보내주세요.”
“…….”
넌 진짜 한결같다.
* * *
난 마지막으로 카페를 겸하고 있던 내 작은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1층의 테이블과 카운터를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체이트가 좋아했던 방석, 다 타 버렸네.’
녀석이 고양이로 있을 때 자주 쓰던 방석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세월이 가면서 많이 낡았는데 이번에 완전히 불타 버렸다.
로체가 제 방처럼 쓰던 휴게실도,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던 창가 앞 테이블도 시꺼먼 재가 가득했다.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돈은 멀쩡해!’
이건 기적이다.
난 눈물을 훔치며 그간 모아 놓은 피 같은 비상금을 챙겼다. 이 중 절반은 체이트 결혼 자금으로 쌓아 놓은 건데, 결국 쓸모없게 됐구나.
‘그래도 돈은 소중해.’
그간 모아 놓은 돈을 한 아름 들고 돌아가려던 차,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
멀쩡한 옷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입을 수 없어도 꼭 가져가고 싶은 옷이 한 벌 있었다.
* * *
“그건 뭐야?”
낑낑거리며 들고 나온 물건들을 쓰레기 보듯 하던 이안이 유독 망가진 분홍색 천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옷이요.”
“옷? 그게? 거적때기 같은데.”
말 진짜 함부로 하네.
난 조금 새치름해져서 대답했다.
“기념품 같은 거예요. 부피도 가벼운데 가져가면 안 되나요?”
“뭐, 마음대로 해.”
무신경하게 넘어가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그거, 저번에 입었던 그 옷이군.”
“네, 맞아요.”
“아끼는 옷이었어?”
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끼는 거예요.”
“돌아가면 비슷한 디자인으로 잔뜩 사주지.”
이런 얘기를 미래를 모르는 상태에서 들었으면 참 설렜을 텐데.
이안이 날 에스코트하며 말을 이었다.
“그 옷 색, 당신이랑 잘 어울려.”
“네?”
“예뻤다고.”
우리 사이에 갑자기 웬 칭찬.
계면쩍어진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수도로 갈 예정인가요?”
브링스턴 후작, 그러니까 이 세계 아빠의 얼굴이 가물거렸다.
내 입장에서는 딱 한 번 본 얼굴이니까.
‘열일곱 먹은 딸이 가출 후에 10년간 실종 상태였다면 그냥은 안 넘어가겠지.’
내 친아빠라면 10년 동안 등짝을 난타할 법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현실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일단 내 영지로 갈 거야.”
휴.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그쪽이 더 가까워서인 거죠?”
“그래. 굳이 내가 움직일 바엔 브링스턴 후작을 북부로 부르는 게 동선상 편하지. 그편이 더 안전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에는 몰랐는데 딸린 기사가 꽤 많았다.
감시가 살벌하다.
“…….”
‘나 꼭 잡혀가는 것 같다. 아니, 그게 맞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계속 조잘거렸다.
“맞다. 체이트에게 공증……이었나? 그거 받아야 하지 않아요?”
“그쪽은 내 보좌관을 붙여놨어. 우린 바로 북부로 갈 거야.”
“네…… 아니, 네에?”
잠깐만요. 바로 간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왜 그러지? 원하는 대로 작별 인사까지 하게 해줬잖아.”
“아직 덜 했어요! 요안나 양한테도 아무 말 못 했고.”
“그 드워프라면 내가 영지로 불러주지.”
“……체이트에게도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모진 말을 한 뒤로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다.
“아니. 하지 마.”
“……?”
“이제 그자는 만나지 말라고.”
“……그거 설마 명령이에요?”
“아니, 부탁인데. 그런데 내가 거절에 면역이 없어서. 어떻게 하든 당신 자유인데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장담을 못 하겠군.”
우리는 그걸 협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거절할 텐가?”
“……아뇨.”
“말 잘 듣는 부인이 생길 것 같아 기쁘군.”
말 잘 듣는…….
왠지 목줄 잡혀 끌려가는 개가 된 것 같다.
‘최악이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