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4화 (34/140)

34화

로체는 굳이 체이트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숲 한복판에 뜬금없이 생긴 통나무집.

누가 봐도 체이트의 작품 중 하나였다.

그것도 자신을 밖으로 내다 버리려는 용도로 만들었던 작품. 로체로서는 아주 불유쾌한 졸작이었다.

‘고양이 꼴로 어디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수고는 덜었어.’

못 찾으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눈에 띄게 있으니 말을 안 걸 수도 없다.

로체가 통나무집 문을 두드렸다.

“살쾡이, 너 거기 있냐?”

쾅쾅! 쾅쾅쾅!

지겹게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인기척이 들렸다.

“안 나오면 없는 줄 알지, 시끄럽게 구는군.”

“뭐야, 멀쩡해 보이네.”

조금 실망한 로체의 얼굴을 보고 체이트가 미간을 좁혔다.

“레티시아는?”

“레아 양이라면 아까 너 찾다가 나갔어. 카히텐 대공이랑 같이.”

“아아.”

이안 카히텐. 그 이름을 듣자마자 체이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네 상태 좀 대신 봐달라고 하던데.”

“끝까지 모질지를 못하네.”

체이트가 빙그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 태연함이 오히려 불길했다.

“……너, 괜찮냐?”

“뭐가 괜찮냐는 거지?”

“레아 양 말이야. 다른 남자랑 결혼하게 생겼잖아. 너라면 분명 미쳐서 날뛸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왜냐니, 그야…….”

‘너 레아 양한테 반쯤 돌아 있잖아…….’

하지만 지금의 체이트는 이상하리만치 태연자약했다.

로체는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이 레티시아와 말만 섞으려고 해도 촉각을 세우며 달려들던 녀석이었다.

“너, 나한텐 그렇게 날을 세우더니 사람 차별하냐?”

“그야 당신은 선을 넘었으니까.”

“내가 뭘 했다고! 선을 훌쩍 넘은 건 내가 아니라 카히텐 대공이지. 나랑 레아 양은 순도 100% 우정이라고.”

“그 우정이 마음에 안 들어.”

“……너무하네.”

로체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툴툴거렸다. 체이트가 그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정하지. 그냥 당신이 별로야.”

“더 너무해.”

체이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난 괜찮으니까 꺼져. 널 보자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니까.”

로체도 끈질겼다.

“어차피 피차 버려진 마당에 돕고 살자고. 이참에 나 좀 데려가지? 내가 갈 데가 없어서.”

“버려지긴 누가 버려져?”

체이트가 코웃음 쳤다.

“난 아직이야.”

“현실 파악이 덜 끝난 거 아냐? 레아 양 말이야, 결혼한다니까?”

“안 할 거야.”

“뭐?”

“결혼, 안 할 거라고.”

‘결혼은 별 의미 없어. 난 그냥 원래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이야.’

‘거짓말.’

체이트는 이제 레티시아의 사고 회로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후작가의 영애인 그녀가 왜 귀한 가문을 두고 이런 외진 곳까지 도망쳤으며, 그간 어째서 그토록 결혼에 무심했는지도.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그 누구와도.

‘욱신.’

가슴 한편이 아려왔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숙명과도 같은 혼약으로부터 도망친 여자.

그런 여자가 갑자기 결혼을 하겠단다.

단순한 심경의 변화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의 독립적인―그리고 조금은 독단적인―성격상, 분명 또 뭔가를 홀로 해결하려고 끙끙거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게 아직 숨기는 게 있어.’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그녀 혼자 감내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체이트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혼인을 억지로 하겠다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두면 사랑이 아니지.”

“하, 이젠 숨길 생각도 안 하는군?”

로체가 혀를 내둘렀다.

“처음부터 딱히 숨기고 산 적 없어. 때를 기다렸고,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시기가 아니었던 것뿐이지.”

“그래서, 뭐 하려고?”

“납치.”

“뭐? 너 설마 이번에야말로 기어코 레아 양을…….”

로체의 잔소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이트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 마침 오는군.”

이안 카히텐의 종자가 그에게 오고 있었다.

제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공증을 받기 위해서.

* * *

오솔길 한복판에 세 시간 남짓 지나 생긴 통나무집이라니.

대주교는 전생에 목수였던 걸까.

제스는 원래 있던 이층집보다 배는 깔끔해 보이는 통나무집을 보며 순수한 감탄을 토했다.

“대주…… 아니지, 큼큼.”

제스는 헛기침을 하고 노크를 했다.

“체이트 님! 안에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여기 계신다고 했는데…….”

슬쩍 문고리를 돌려보니 열려 있었다. 그가 안쪽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고 텅 빈 실내를 살폈다.

“그새 나가셨나?”

그가 무심코 안으로 들어간 순간.

탁!

문이 닫혔다.

“누구지? 정체를 밝혀!”

당황한 샌님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사이 뒤에서 커다란 손바닥이 그를 덮쳤다.

“우읍!”

순식간에 사지가 결박당하고 입이 막혔다.

“읍! 으읍!”

그 앞에 자신이 그토록 찾던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서 있었다.

“제스트리아 빈델.”

“우우웁!”

“내게 바라는 게 있어서 왔겠지?”

“웁웁!”

체이트가 반항하는 그를 제압하고 일으켜 세웠다.

“마침 나도 네게 부탁할 게 있다. 우리 얘기 좀 하지.”

제스의 눈이 토끼처럼 변했다.

‘이게 무슨 신의 사자야. 완전 악당 같잖아!’

* * *

체이트는 제스를 끌고 외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인적 없는 곳에 당도하고 나서야 제스의 입이 자유로워졌다.

“푸하!”

제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체이트는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네 주인이 레티시아를 데리고 갔겠지? 두 번 봐줄 성격은 아니니 그녀를 쉽게 놓아주진 않을 테고.”

“……잘 아시네요.”

“그래. 레티시아가 방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체이트는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다. 청력 또한 매우 예민했다.

그는 문밖의 대화를 통해 이안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레티시아가 마음을 정한 이상, 언제가 되었든 그녀는 이안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 순간에 붙잡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레티시아와 자신은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적이 누구인지, 아니, 그런 게 제 주변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당신은 알 필요 없어. 계속 모르고 살아.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자신과 레티시아, 두 사람을 한 번에 노린 겁 없는 작자가 누구인지, 그걸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 떠나보내는 것은…… 그녀에게 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카히텐 대공령이라면 그녀의 안전을 위한 최상의 방공호지.’

하지만 그녀가 이안 카히텐과 원치도 않는 결혼을 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안 카히텐과 결혼하고자 하는 이유가 레티시아 브링스턴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라면…….

‘정식 파혼이 가능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가능하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애석하게도 지금 레티시아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제 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안 카히텐을 그녀 곁에 일평생 놔둘 수도 없으니, 시간을 벌 방도를 마련해야겠지.

“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제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체이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예식, 연기할 수 있겠나?”

“예, 예식이요?”

당연히 제스 본인의 예식을 이르는 건 아닐 테고.

‘대공 전하와 브링스턴 영애인가…….’

“아예 못 하게 하라는 것도 아니야. 약간의 사건만 있으면 돼.”

“그게, 저로서는 굉장히 어렵습니다만…….”

“아, 그래?”

체이트가 팔짱 낀 채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고민하는 척하다 제스에게 다가왔다.

“어렵지 않게 도와주지.”

제스가 묶여있는 사지를 뒤채며 비명을 질렀다.

“히악! 오, 오지 마세요!”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다 소용없었다.

‘나쁜 사람이 이상한 짓 할 때 이렇게 하라면서요, 어머니! 이거 완전 쓸모없잖아요!’

체이트의 손이 그의 목에 닿았고, 동시에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윽!”

제스는 울상을 지으며 체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제, 제게 뭘 건 겁니까?”

“신성 계약. 한 달 내로 풀지 못하면 영혼이 분리될 거다.”

“히익……!”

“걱정하지 마라. 신성은 혼을 함부로 다루지 않아. 육신에서 분리될 뿐, 네 혼은 이승에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될 테니.”

“그거 그냥 귀신이잖아요!”

“흠.”

체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조금 달라. 귀신은 성력이 있는 인간과 일부 소통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인 영혼은 성력이 없으니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더 나빠!

제스는 숫제 오열하기 직전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물론이지.”

체이트가 그를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내 말을 잘 들으면.”

평소처럼 매혹적인 미소였으나, 제스에겐 그조차 공포일 따름이었다.

그는 평소 ‘부탁’과 ‘협박’을 혼동하던 제 주군과 체이트를 겹쳐 보았다.

체이트에 비하면 이안은 양반이었다.

진정한 협박꾼이 여기 있었다.

* * *

체이트가 제스를 풀어 주자마자 그는 줄행랑을 쳤다. 저래도 제게 한 달 내로는 돌아와야 한다.

‘신성 계약은 계약자에게도 부담이 가는 쌍방 계약이지만, 일반인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

약속된 시일 내에 계약이 이행되지 않을 시 타격을 입는 건 제스만이 아니었다. 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계약인 만큼 그런 면에서는 공정했다.

계약자의 양심이 공정치 못했지만.

‘본인 입으로 내게 잡혔다고 밝힐 리는 없지.’

이안 카히텐은 제 보좌관을 버리고도 남을 인물이니까.

제게 붙잡혀서 졸지에 약점을 잡혔다고 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보좌관의 목을 칠 것이다.

그건 자신보다도 곁에서 그를 직접 보좌한 제스트리아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능력은 있어 보이니 계약 상대로는 나쁘지 않아.’

체이트의 납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체가 아래로 내려왔다.

“너…….”

“뭐지?”

“……아니다.”

로체는 무슨 말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건드리면 큰일 날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이야.

그의 황망한 시선을 느낀 체이트가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관람료.”

“허.”

로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졌다.’

레티시아라는 억제기가 없는 체이트 폴린은 어지간한 마물보다 위험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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