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지난 며칠, 나는 이안과 기사들의 철통 감시 아래 쥐 죽은 듯이 지냈다.
혼례를 치르러 가는 신부라기보다는 죄인으로 이송되는 듯한 처지였다.
체이트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으나, 이미 마차는 넴페르 산맥을 빙 돌아 카히텐 영지를 향하고 있었다.
중간 지역 호텔에서 쉬어 가는 도중에 제스가 합류했다.
기차를 타고 겨우 우리를 따라잡은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피곤하다기보다는 창백하다는 쪽이 더 들어맞았지만…… 으음, 피곤해서 창백해 보이는 거겠지?
“돌아왔습니다, 전하.”
서류를 읽고 있던 이안이 반듯한 콧대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렸다.
“아르키드네 대주교는 만났나?”
“예.”
“공증은.”
“남부로 돌아가는 즉시 절차를 밟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생각보다 쉽게 내어주는군.”
푸른 눈이 내 쪽으로 넘어왔다.
“돌려받기 전까지는 절대 해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저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기차 떠났다고 알려주려는 거야. 그렇지?
‘그럼 감시나 좀 느슨하게 해주든가.’
그와 나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붙어 있었다. 침실은 따로 썼지만 내 방 앞에는 기사들이 호위를 명목으로 항시 대기하고 있었고, 이동 중이 아닐 땐 마음대로 방 밖에 나설 수도 없었다.
‘이게 죄수 이송이 아니면 대체 뭐냐.’
신부 인권이 바닥이다. 물론 지은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 저는 십 년 지났으면 진작 다른 여자 만나서 잘 살고 계실 줄 알았죠…….’
한가하니 별생각이 다 들어서 이러는 거 맞는데,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된다.
그다지 순정파도 아닌 인간이 왜 10년을 파혼도 안 하고 독신으로 살았던 거야?
나도 그렇지만 이 세계는 뭔가 문제가 있다.
다 같이 비혼을 희망하는 그런 세계인가.
그럼 나도 좀 끼워 주면 안 되나.
아니, 나만 끼워 줘…….
“브링스턴 영애, 오랜만입니다.”
제스가 내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이안은 넴페르 산맥을 지난 후부터 자신의 신분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고, 나 역시 어디를 가도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오히려 어색하다.’
돈도 써 본 놈이 쓰고 밥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나는 그들의 지나친 정중함이 도리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렇지만 제스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체이트와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눴을 테니까.
체이트의 근황이 궁금했다. 밥은 잘 먹는지, 할 일은 잘하는지, 나 없는 새 이상한 짓을 벌이진 않았는지.
“체이트는 괜찮던가요?”
“대, 대, 대주교님이요?”
제스가 유난스럽게 말을 더듬거렸다.
“자, 잘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서 많이 걱정했는데.”
분명 제스가 아까 그랬었지? 체이트가 남부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다행이다.’
이제야 상황이 안정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역시 내가 문제였나…….
“브, 브링스턴 영애…….”
“네?”
“그, 저기.”
제스는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이안을 바라보더니, 이내 허리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왜 저러지? 내 얼굴에 휴지 붙었나?’
슬쩍 볼을 매만져 보던 중에 이안이 말을 걸어왔다.
“좀 안심이 되나?”
“네?”
“아르키드네 대주교의 소식을 알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
당연한 거 아닌가. 나랑 걔랑 같이 산 지가 몇 년인데. 인사도 못 하고 떠났으니 당연히 신경이 쓰이지.
하지만 나는 조용히 있기로 했다.
로체가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상대가 왜 저러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을 땐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낫다고.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이안이 혼자 피식거렸다.
“아직도 서툰 연기를 하는군.”
“연기요?”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 소용없어.”
“…….”
난 그냥 눈치가 좀 없을 뿐인데 종종 저렇게 넘겨짚는 애들이 있다.
사람이 다 복잡한 줄 아나 본데, 나는 내 심리 상태도 잘 모르고 살 정도로 둔한 편이다. 제발 나한테 너네의 그 섬세한 감수성 좀 끼워 넣지 마라.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물론 이런 내 성격을 모르는 이안은 다시 안경을 걸치며 경고했다.
“허튼 짓으로 관심을 끄는 행동은 그만하는 게 좋아. 이번에도 도망치면 당신 가문은 영영 회생하지 못할 거거든.”
“브링스턴 가문이 저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었나요?”
“당신의 혼인에 걸린 예물이 몽땅 배상금 명목으로 지출됐지.”
어, 그건 좀…… 좀 많이 미안하네.
당시 난 브링스턴 가문에 조금의 유대감도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이 몸 자체가 완전 남으로 느껴졌다.
그들을 신경 쓰고 배려할 여력 자체가 없었던 거다.
“그때의 손해를 겨우 메웠는데. 한 번 더 당신이 사라진다면 이번엔 또 어디의 토지를 뜯어서 팔지 예측도 못 하겠군.”
“…….”
아주 많이 미안한데.
“이제 도망은 안 쳐요.”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책임을 느끼고 있으니까.”
나는 여러모로 책임질 일이 많았다. 개중 가장 큰 건 역시 이안이 사용한 사술의 정체와 계기를 파악하는 일이다.
저 이지적이고 냉정한 남자가 왜 그런 파괴적인 사술을 쓰려고 한 걸까?
세계를 무너뜨려서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는 지금부터 그 비밀을 파헤쳐야 했다.
* * *
카히텐 영지까지 가는 길은 험준했다. 나는 그사이 한 번 더 고열로 쓰러졌다. 기어코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그 탓에 영지를 지척에 두고 중간에 방을 빌려서 쉬어야 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이안은 나를 귀찮은 짐짝 취급해 댔다.
“영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안 그래도 죽겠는데 열 오를 소리만 골라 한다. 내가 저거랑 같이 살아야 한다니. 이건 악몽이야.
“일부러 아픈 사람도 다 있나요.”
“그런 여자들도 가끔 봤지.”
“그것참…… 신기한 분들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안은 침실 옆에 앉아 서류를 들췄다.
“여기서 주무시게요?”
“그럴 리가. 당신이 진짜 아프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바로 나갈 거야.”
뭐래. 그럼 가짜로 아프냐? 하여간 재수 없어.
“전 원래 몸이 약했다고요.”
“그 정도 약한데 도망은 어떻게 쳤지?”
“……악으로 깡으로?”
내 말에 이안이 코끝으로 비웃었다. 기분 나쁘네.
그나저나 요즘 들어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한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죽을 나이를 넘기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가…….’
레티시아가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 후계가 꼭 필요해요?”
“……?”
그가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남자의 손끝이 툭툭, 무릎 위를 쳤다.
“필요라기보다는 의무지. 가주가 후계를 생산하는 건 나 자신보다는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
“아, 의무…….”
지겹다.
어지럽고.
“의무 그거…… 안 하면 안 되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안이 자꾸 두 개로 보였다. 열이 올라서 사람이 흐리게 보이니 근거 없는 용기가 생겼다.
“나…… 진짜 죽기 싫거든요.”
흐린 시야로 살색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뭔가가 내 눈을 가렸다.
“자라.”
헛소리하지 말고.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 * *
이안은 잠든 레티시아를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연약하다 못해 병약한 여자였다.
이번에 아픈 것도 꾀병은 아닌 듯한데.
‘나…… 진짜 죽기 싫거든요.’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도망까지 친 건가. ……죽는 게 두려워서?’
처음에는 자신의 관심을 얻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그런 생각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관심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면.
자신만 보면 얼굴을 붉힐 정도로 좋아하면서도 도망을 감행할 이유는 이제 그것뿐이었다.
이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공교롭게도 제 약혼녀는 이런 점에서 저와 닮았다.
위치상 쉬이 속내를 내비치지 않지만, 자신도 죽음이 두려운 사람 중 하나였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아직 완벽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했다.
일전, 레티시아가 자신을 목격했다던 그날.
사실 그날 이안은 병을 고치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그러다 마부가 황실의 첩자라는 걸 알아채고 즉결로 처형했다.
레티시아에게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필 그 장면을 보이다니.’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엔 충격적인 장면이다.
‘그날도 고열로 앓았으려나.’
이안은 레티시아의 잠든 얼굴을 보며 과거의 레티시아를 상상했다.
가진 능력 하나 없는 여자가 낯선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이 어떠했을지.
‘쉽지는 않았겠지.’
자신의 순탄치 못했던 유년이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쳤다.
“제스.”
그가 보좌관을 불렀다.
“예, 전하.”
“의사를 불러와라.”
“전하, 이 마을은 의사가 없습니다.”
“옆 마을을 뒤져서라도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제스가 나가고도 한참 동안 이안은 레티시아의 곁에 있었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의사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 후 내내 불편한 기분에 휩싸였다.
왠지 이 여자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쩐지 아주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