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북부의 중심인 카히텐령은 넴페르 산맥보다 아래쪽에 위치해서 상대적으로 온난한 편이었다.
그래 봤자 북부는 북부. 살랑살랑한 봄바람 따위는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에, 에취!”
게다가 나는 감기에 걸렸다.
카히텐령으로 가는 여정 내내 나를 괴롭히던 고열은 겨우 내렸지만, 면역력이 낮아졌는지 콧물을 훌쩍거리고 재채기를 하는 빈도가 늘었다.
“에치! 에치! 에치!”
이안은 3연속 재채기를 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짓으로 마차를 세웠다.
“왜 그래요? 에취!”
“당신 몸이 아직 덜 나은 것 같아.”
“거, 걱정 고맙…… 에이취!”
“지금부터 마차는 따로 타도록 하지.”
“…….”
이런 식으로 경계심이 낮아졌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참아 볼게요.”
“아니, 이미 여기 공기가 불결해졌다.”
이안이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기어코 마차를 옮겨 탔다.
‘매정한 놈.’
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잠시뿐, 나는 덕분에 마차에서 다리를 뻗고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카히텐 대공성에 도착할 때 즈음엔 감기가 완전히 나아 있었다.
고맙다, 결벽증.
앞으로도 열일해 주길 바라.
* * *
카히텐 대공성은 레티시아의 기억 속에 아주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웅장하게 뻗은 대리석 조각상들과 고서로 벽을 가득 채운 갤러리,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널찍한 중앙 홀, 장대 높이뛰기를 해도 될 만큼 높은 천장, 그 위에 펼쳐진 프레스코 천장화까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어린 레티시아는 카히텐 성을 ‘신의 요람’ 같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카히텐 성을 실제로 보고 감탄했다.
역시 남의 기억을 끄집어낸 것과 실제로 보는 모습은 느낌이 달랐다.
사진과 여행의 차이랄까.
“와, 정말…….”
난 양손을 얼굴 옆에서 마주 잡고 중얼거렸다.
“비싸게 생겼네요…….”
이런 집을 자가로 둔 남자의 인생이란 뭘까? 유지 비용이 장난 아닐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다 감당이 되니까 이런 데에서 사는 거겠지.
“한 300년쯤 지나면 국가에서 유지 보수를 위한 제반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평민 같은 소리 좀 작작해.”
이안이 징글징글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와 함께 여행하는 사이, 본의 아니게 떠들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정말이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가 조금 편해졌다.
하도 심심해서 마지못해 입을 열 때마다 가장 자주 들은 소리가 저거였다.
그놈의 평민, 평민.
“평민은 이런 소리 당신 앞에서 못 해요.”
“당신은 해도 되고?”
“안 되나요?”
“아직은 안 되지.”
“음, 그렇다면 죄송.”
나는 지난 십 년간 다져진 아가리 스킬을 다시 회복했다. 수평적 고객 응대가 습관이 됐다 보니, 살짝 윗사람과의 말장난에는 도가 튼 차였다.
긴장이 풀린 내가 서서히 입을 털기 시작하자 이안은 급격하게 수척해졌다.
“당신은 차라리 아플 때가 나았어.”
“헙.”
제스가 뒤에서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 말로 내가 상처받으리라 생각하나?
하하, 녀석. 마음에도 없는 남자의 개소리에 손수건을 적시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에취!”
재채기 한 번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오늘도 내가 이겼다.
아니, 내 감기 바이러스가 이겼다.
난 만족스럽게 이안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그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시녀를 붙여줄 테니 방에 가 있어.”
“예이.”
“마부처럼 말하지도 마.”
“예입.”
“……하.”
이제 이 남자가 나를 안 죽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하는 짓이긴 한데 말이지.
이미지 관리 빡세게 하는 놈들을 놀리는 건 정말이지.
‘너무 재밌어…….’
이상한 취미가 생긴 것 같아서 조금 곤란하다.
“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나를 보며 제스가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렴. 부러우면 네가 얘랑 결혼하든가.
* * *
이안은 내게 시녀 한 명과 전담 하녀 둘을 내어주고 바로 집무실로 사라졌다.
북부 카히텐령에서 수 세기를 보낸 준남작의 딸, 케이시 양이 내 시녀였다.
그녀는 성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이안과 멀거니 선 나를 번갈아 보았다.
“어, 그, 그러니까,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아가씨!”
“상처를 왜 받아?”
“아가씨, 흑흑. 제 앞에서는 아닌 척하실 필요 없어요…….”
케이시 양이 갑자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를 늘어놓았다.
“대공 전하께선 그저 아가씨께 화가 나신 것뿐이에요. 진심으로 아가씨를 싫어하시는 건 아닐 거예요.”
“…….”
“아가씨께서 그간 도주하신 탓에 하인들 대다수가 적대적이긴 하지만 아가씨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셔도 꿋꿋하게……!”
“잠깐.”
싸하다.
나 이거 알아.
이거 그거잖아.
정략혼으로 팔려온 여자가 남편의 무관심과 냉대로 인해 각종 멸시를 받으며 마음고생 다 하다가, 시한부 통보받고 쓰러지는 거.
나 방금 머릿속으로 비련의 여주인공 시나리오 한 편 다 봤어.
아니, 사실 이건 단순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십 년 전에 도주하지 않았다면 내가 겪었을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인생’이었다.
이 인생의 하드 버전이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수난이라면…….
“나 상처 안 받았어.”
거부한다.
“예?”
케이시 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사슴을 닮은 여자였다.
“날 싫어하는 하인이 많다고 했지?”
“읏, 네에.”
“이해해. 사람 감정이 무 자르듯 딱 잘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좀 싫을 수 있지.”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다.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밥상을 보기 전까지는.
* * *
카히텐 성에 도착한 이후, 이안과 나는 거의 남처럼 지냈다.
성이 넓어서 그런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덜 마주치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건 좋았다.
밥도 따로, 잠도 따로.
혼인 전 각방. 프라이버시 완전 보장.
아, 너무 좋다.
다 좋은데.
“……이야.”
오늘도 밥상은 답이 없었다.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음식들이 하나같이 너무 짜고 너무 달았다.
처음엔 요리사가 요리에 재능이 1그램도 없는데, 가업을 잇기 위해 마지못해 이 일을 하는 건가 싶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그 심정, 내가 또 너무 잘 알지.
애써 내린 커피가 찻잔째 날아가는 경험을 해본 나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최대한 참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만 싱겁게 해달라고 부탁해 줘.”
라고 하면 맹탕이 나오고.
“간을 약간만 더해 주면 안 돼?”
라고 하면 소태가 나왔다.
심지어.
“아가씨는 바라는 것도 많으시네요.”
라고 툴툴거리는 하녀도 있었다.
음, 그럴 수 있어.
다 업보지. 응.
난 정확히 나흘을 참았다.
나흘째, 내게 제일 새침하게 굴던 하녀 하나가 음식을 가져오며 이런 소릴 했다.
“아가씨, 무의미한 짓 좀 그만하세요. 아가씬 눈치도 없나요?”
“……쒸익.”
넌 나의 역린을 건드렸어.
세상 모든 눈치 없는 XX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치 않을 거다.
* * *
다음 날, 나는 이안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보고 싶었다는 소릴 하려면 그냥 돌아가. 바빠.”
……도로 나가고 싶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일이지?”
“태업하는 하인들이 있어요.”
“그래서?”
“걔네가 저 못살게 굴어요.”
내부가 곪으면 찌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찌르는 게 제일 편하다.
하지만 이안은 도리어 나를 비웃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그가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른한 수사자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그럼 당신이 환영받을 줄 알았어?”
“…….”
“당신은 무려 십 년을 도주했어. 북부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카히텐 성 사람들의 자존심을 당신이 십 년간 무참히 밟아 무너뜨린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성 사람들은 대개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많고, 카히텐의 종자로서 충성심도 남다를 테지.
내가 그들의 화를 돋울 만한 짓을 저지른 건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내가 제때 왔어도 쟤네는 날 인정하지 않았을 거거든?
당신, 원작에서도 레티시아가 못 참고 하소연했을 때 무시했잖아.
‘이번에도 도와주지 않겠다 이거지?’
그렇다면 내게도 나름의 방법이 있다.
난 그에게 다가가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읍. 그리고 있는 힘껏 재채기하며 고개 숙였다.
“푸에에엑치!”
“……?”
“푸엣치! 엣치치치치!”
“……제스! 끌고 가!”
“네, 알겠습니다!”
“어딜…… 엣취! 우에에엣치!”
“에잇, 억지로 재채기하지 마십시오, 영애!”
그날로 이안은 집무실을 옮겼고 기존 집무실은 소독 처리에 들어갔다.
내 밥상은 한층 맛있어졌다.
후후,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 * *
평화는 잠시뿐이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브링스턴가에서 편지가 왔다.
브링스턴 후작은 유려한 필체로 편지지에 육두문자를 꽉 채워 보내 주었다.
욕설도 예쁘게 보니까 타격감이 덜하다.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는 자학적 비난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는 거지.
나는 배움의 의미를 새로 터득했다.
“후작과는 이미 합의를 마쳤다. 예식은 2주 후, 이곳 카히텐 성에서 치를 거야.”
“2주요?”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후작 부처가 도착하면 바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다지 환영받을 일도 아니니, 최대한 간소하게 기본 격식만 차릴 거야.”
내 의견은 단 한 개도 들어가지 않은 결정이었다.
“왜, 새삼 마음이 바뀌었나?”
“아뇨.”
“그래. 다시 도망갈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한 번은 내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두 번은 없어. 그때부턴 무슨 소릴 해도 당신을 봐주지 않을 거야.”
“……네.”
이안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시선을 거뒀다.
“내 어머니도 곧 오실 거다.”
“카히텐 대부인 말씀이신가요?”
“그래.”
이안의 계모. 벨린다 카히텐.
그녀는 원작에서 이안을 냉혈한으로 만든 주범이었다. 그러니까 악역은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악역의 서사를 만든 원흉이랄까?
둘이 사이 더럽게 안 좋다고 했는데 시댁이 콩가루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고생 좀 하겠군.
난 마음의 준비를 보다 단단히 하기로 했다.
“……?”
그런데 어째 이안의 옆에 서 있던 제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내가 결혼한다는데 왜 쟤 얼굴이 저렇게 사색이지?
‘뭐야, 쟤 설마…….’
나는 제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사랑은 죄가 아니야.”
“예……?”
“힘내고. 나는 언제든 넘겨줄 준비가 돼 있다.”
“……예?”
제스가 영문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이거 아니냐?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