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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7화 (37/140)

37화

나는 케이시 양에게 카히텐 대부인에 대한 사전 조사를 부탁했다.

“대, 대부인 마님이요?”

케이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조, 조, 조, 조, 좋은 분이세요.”

성격 진짜 개더럽나 봐.

“저, 저, 저희를 꼼꼼하게 챙겨 주시고, 전하께도, 그, 많은 애정을 주시는 상냥하고 품위…… 음, 품위 있는…….”

그만 알아보기로 했다.

“됐고, 서재나 가자.”

“네…….”

뒤에서 휴, 하고 안도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아가씨, 무슨 책을 읽으시려고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카히텐 성의 서재는 규모가 대학 도서관 급이라서, 혼자서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신학 관련 책들을 보고 싶은데.”

“신학이요? 아가씨 신학에 관심 있으셨나요?”

케이시 양은 의외롭다는 표정을 했다. 북부 사람들은 종교적인 부분에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었지.

대다수 편의 시설에 성력을 사용하는 수도나 남부와 달리 북부는 마력을 주로 사용했다. 이 또한 신전이 없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체이트의 공증을 받는 대가는 북부에 아르키드네의 선교 활동을 허가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 반응을 보면 쉽지는 않겠어.’

뭐 그거야 아르키드네 사제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내 알 바 아니다.

내가 여기 있는 목적은 오로지 하나, 이안이 쓴 사술의 정체와 이유를 밝히고 최악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나 수도 사람이잖아. 그간 신학 공부를 못 했더니 신경 쓰여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음, 사실 자료가 많진 않아요. 구색만 갖춰 뒀거든요.”

케이시 양은 서재 한편으로 나를 안내했다. 넓은 서재에서 책장 하나만이 신학 관련 저서의 전부였다.

‘확실히 상대적으로 보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엄청나네.’

나는 부지런한 신도였던 전생의 레티시아가 읽었던 책들을 넘기고, 기억에 없는 책들을 추려서 책상 위에 모아 놓았다.

일자로 세우면 내 키만큼 될 만한 책이 쌓였다.

‘이걸 다 하루만에 읽을 순 없겠지. 목차 위주로 훑자.’

이안의 사술은 마력이 아니라 성력에서 근원했다. 그렇다면 그가 어디서 그러한 사술을 배웠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가장 간단한 시도는 역시 그가 읽을 법한 책들을 살피는 것이었다.

“……으음.”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기계적으로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는데 책갈피 같은 게 떨어졌다. 책 자체는 평범했기에 나는 무심하게 책갈피를 주워 들었다.

“이건…… 그림?”

책갈피라고 생각했던 건 색이 바랜 그림이었다.

몇 살짜리 아이의 그림인지 색채가 엉망이다. 추상화 같은 그림이 초상화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실력이 내 수준인데.’

자세히 보니 여자였다. 이안과 같은 은발의 여자.

‘뭐지. 성안에 어린애가 있나?’

“케이시 양, 이 성에서 제일 어린아이가 몇 살이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케이시 양이 곰곰 생각에 잠겼다.

“으음, 주방의 톰이 열세 살인데 그 애가 제일 어릴걸요.”

열세 살의 그림이 이 정도면 진짜 내 수준인 거다.

‘하인이 서재 책갈피로 그림을 끼워 넣진 않을 거고.’

그러니까 이건 아마…….

팔랑, 뒷장을 넘겼다.

[어머니]

‘음, 역시는 역시구나.’

이건 이안이 유년 시절에 그린 친모의 초상이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쥐어짜서 이안의 친모를 회상했다.

원작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건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게 아니면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원작에선 이안에 대한 묘사가 듬성듬성했다.

그러니까 이건 빙의 전 레티시아의 기억이었다.

‘이안의 친모는 남부 사람이었지, 아마?’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그녀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그녀의 집안, 배경, 살아온 환경까지.

모든 게 불명이었다.

작중에 ‘추위를 너무 타서 외출도 하지 않았으니 남부 출신일 것’이라는 추측성 서술이 나왔을 뿐.

선대 카히텐 대공은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그녀를 대동하지 않았다. 북부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다.

마치 탑에 갇힌 공주처럼…….

오싹.

‘나, 나는 아니겠지.’

이안 카히텐은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고 본인을 가장 사랑하는 나르시시즘 환자잖아?

걔랑 나는 아주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다.

사랑과 전쟁을 찍을 요소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다는 거지.

“그럼, 그럼.”

“뭐가 그렇다는 거야?”

낮은 음성에 몸이 절로 흠칫거렸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서재 문에 삐딱하게 상체를 기댄 이안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글쎄, 3분쯤 됐나.”

그가 큰 보폭으로 다가와 내가 들고 있던 그림을 뺏어 들었다.

“아, 미안합니다. 소중한 걸 멋대로 봐서.”

“별로 상관없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겨서 책상에 던져 버렸다.

“정리가 안 된 쓰레기가 있었네.”

“……어머니 그림, 아니에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본 순간처럼 등골을 저릿하게 만드는 냉랭한 눈빛이었다.

“아니, 쓰레기야.”

* * *

책에는 단서가 없었다.

하지만 책갈피라는 예상 밖의 수확을 얻었다.

‘이안 카히텐은 어린 시절 친모의 초상을 그릴 만큼 그녀를 사랑했어.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과거를 부정하지.’

그의 친모에게 사술을 사용한 원인이 있는 거 아닐까.

“으으으음.”

일단 여기까진 알겠는데, 내 똥촉으로 더 이상의 전개를 짐작하기란 무리였다.

눈치 빠른 로체나 체이트가 있었다면 좋은 추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보고 싶다.’

침실에서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보며 고향 생각하는 거 남 일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카페에서의 일상이 그리웠다.

그때는 시골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로체랑 티격태격하고, 요안나 양이나 델린 남작 부인이랑 커피 한 잔 두고 수다도 떨고, 한스 아저씨랑 고기도 구워 먹고, 체이트의 결혼 문제로 다 함께 머리를 싸매던 그 시절이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체이트.”

또다.

또 심장이 욱신거렸다.

요즘 그 아이만 생각하면 매번 이런 통증이 찾아왔다. 상처만 주고 떠난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지.”

아니, 다들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나는 말 안 해 주면 그런 거 잘 모른단 말이야.

내 감정이 어떤지도 잘 모르는데 남의 감정을 어떻게 읽어.

미안한 마음 뒤에 일말의 억울함이 치미는 것도 익숙했다.

“미리 말해 주지.”

진작 알았으면, 그랬으면…….

“…….”

나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알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코렐리아를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괴로운 건, 그때 함께 괴로워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었다.

* * *

레티시아가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을 때, 이안 역시 과거를 곱씹는 중이었다.

그녀가 그 낡은 그림을 찾아낸 것이 계기였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별생각을 다 하게 되는군.’

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를 회상했다.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해서 안달인 벨린다가 아니라, 친모였던 무명의 여인을.

그녀는 항상 하얀 옷을 입었다.

발목까지 가리는 하얀 드레스를 질질 끌고 미친 여자처럼 복도를 걸어 다녔다. 머리도 산발이었다.

이안이 기억하는 한 그녀는 단정하게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인은 낮에는 나오지 못했다. 낮에 여인의 방문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오로지 세간의 이목이 사라진 밤에만 문이 열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하게도 이안은 친모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일반적인 모성애 또한 기대하지 못했다.

카히텐에서 몇백 년 만에 성력을 타고난 천재. 이안을 모두가 아끼고 숭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애정이 충족되지 않았다.

모친의 부재는 이안의 유일한 결핍이었다.

어느 날, 어린 이안은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녀들이 동화책을 읽어줄 때 졸음을 꾹 참고 눈만 감고 있다가, 어스름한 시각에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을씨년스러웠다.

이안은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어, 어머니?’

멀리서 하얀 옷의 여자가 보였다.

이안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어머니……!’

여인이 돌아보았다.

이안과 같은 은발에 벽안, 눈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안을 발견하는 순간 이지러졌다.

‘카히텐, 네놈……!’

‘어머…… 컥!’

새하얗고 앙상한 손이 이안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마디에 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센 악력이었다. 여인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해갔다.

‘죽어, 죽어……!’

그날의 기억, 목의 감각, 어머니의 비명.

모든 게 어제의 일처럼 선연했다.

현재로 돌아와, 이안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평소 얼굴이 어떠했는지는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저를 죽이려는 악귀 같은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카히텐 가문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만 가득했던 그 표정…….

어머니는 쇠해 가는 카히텐 대공가의 명맥을 잇기 위해 팔려 온 여자였다.

제 아버지가 아르키드네 신전과 거래하여 데려온 여자.

모두가 이안을 카히텐의 진정한 후손이라고, 신이 내린 기적이라 칭송했지만……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추악하고 싸늘했다.

이안이 타고난 힘은 아르키드네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안이 물려받은 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성력이었으니까.

카히텐의 힘 같은 건 이미 멸절한 지 오래였다.

소멸한 신을 아직껏 추앙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게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이안은 자신이 만들어진 천재임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비극으로 태어난, 계획된 기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윽.”

다시 통증이 도진다.

체내의 성력이 주인을 거부하며 날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이 자리까지 올려놓은 성력이 그의 육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 또한 어머니의 인생을 희생시키며 태어난 대가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안은 순순히 죽어줄 마음이 없었다.

‘당신의 삶은 안타깝게 됐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자신은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자다.

만들어졌든, 그저 태어났든 간에. 그 생조차 손아귀에 쥐어야 만족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자신의 결핍을 모조리 채우고 완벽해지기 위해서.

이깟 저주쯤,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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