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카히텐 대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신도 아니고 인편도 아니라, 다름 아닌 통신구 메시지로 단 세 글자.
가는 중.
통신구는 거리가 멀면 수신이 되지 않는다. 관계가 소원하여 이안의 작위 승계 후에 별거한다고는 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살진 않는 듯했다.
‘귀족들은 고루한 경향이 있어서 어지간히 급한 사안이 아니면 고오급 금박 종이에 인장을 찍어서 서신을 보낸다고 했는데. 가족끼리는 무의미한 예절인 걸까?’
제스의 말에 따르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마차를 잡으실 분이라고 하니, 그 행동력으로 미뤄볼 때 내일이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둘이 사이 안 좋다고 했으니까 나도 엄청나게 싫어하겠지.’
죽은 줄 알았던 양아들의 약혼녀가 살아 돌아왔으니 그 꼴이 보기 좋을 리가 없다.
나는 전생에 숱하게 봐온 로맨스 소설들을 떠올렸다.
K-로맨스는 이상하리만치 신파가 많고 또 이상하리만치 시댁들이 죄 비정상이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인공을 갈구지 않는 시어머니는 손에 꼽았다.
대다수는 ‘감히 네깟 게 우리 아들을 뺏어가?’라고 표독스럽게 외치다 뒤로 넘어가시거나, ‘이거나 먹고 떨어지렴.’ 하고 돈 봉투를 내밀기 일쑤였다.
예로부터 나는 후자의 상황을 매우 선호해 왔다. 하지만 무를 수 없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 제2의 델린 남작 부인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높은 확률로 나를 갈구시겠지.
난 이제 낮에는 시어머니 구박에 고통받고, 밤에는 남편의 무심함에 홀로 고독을 씹는 캔디가 되는 걸까.
“음…….”
슬프네.
그러니까 뭐라 할 사람 없을 때 많이 먹어 둬야겠다. 소화 잘될 때 미리미리 비축해 둬야지.
“케이시 양, 오늘 저녁은 성대하게 먹자!”
물론 이안이 뭐라 하지 않는 선에서.
* * *
툭.
이안은 들고 있는 깃펜을 잉크병에 무성의하게 꽂아 넣었다.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의 계모, 벨린다 카히텐으로부터 연락이 온 이후부터 줄곧.
‘그 여자를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나올 줄이야.’
하여간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
괴팍하고, 시끄럽고, 품위 없는 여자.
벨린다 카히텐.
피도 섞이지 않은 자식에게 어미 대접을 받으려는 뻔뻔한 여자였다.
그녀가 오늘 메시지를 보내왔다.
‘온다고? ……지금?’
자신은 혼인을 준비하고 있으니 시일에 맞춰 도착하라고 했다. 날짜를 정확하게 명시한 것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얼굴도 비추지 말라는 소리였는데.
‘눈치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벨린다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이미 카히텐 성내에 짜하게 퍼졌다. 아마 레티시아, 그 여자도 이 얘길 들었겠지.
‘지금쯤 꽤 시름하고 있겠군.’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카히텐과 브링스턴 양가에 중한 잘못을 지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필시 자신의 계모가 될 터.
하인들은 결국 아랫사람이기에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 매우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히텐 대부인 정도 되는 사람이 작정하고 그녀를 못살게 군다면, 레티시아는 건강에 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벨린다는 레티시아가 함부로 왈가왈부하기에도 어려운 상대였다. 지난번처럼 맹랑하게 제게 찾아오지는 못하겠지.
“…….”
그는 의미 없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제스를 불렀다.
“레티시아는 지금 어디 있지?”
* * *
최후의 만찬은 역시 고기다.
고기 하면 바비큐지.
내가 비록 손재주는 부족하지만 먹는 데에는 진심이다.
나는 우선 가져온 비상금 일부를 털어서 식자재를 샀다.
“소고기, 돼지고기, 대파, 버섯, 아, 당근도!”
그리고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재료들을 무작위로 꼬치에 꽂아 구웠다.
연기가 많이 나는 요리라서 야외에서 해 먹는 게 제격이지만, 그랬다간 이안이 내 뒷덜미를 잡아서 정원 분수대 위에 널어놓을 것 같았다.
나는 하인들의 식당에서 우리들만의 파티를 열었다. 여기가 눈에 덜 띄거든.
“아가씨, 이거 맛있네요!”
케이시 양이 돼지고기 꼬치를 우물거리며 입가를 가리고 감탄했다.
“그렇지? 만들기도 쉽고.”
“네. 그냥 있는 거 아무렇게나 꽂아 먹는 게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나는 뿌듯하게 웃어 주고는 다른 하인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먹을 거에는 장사가 없었는지 알차게도 모여 있었다.
원래 사람은 미워해도 밥은 미워하는 게 아니지.
“많이 먹어.”
나는 툭하면 까칠하게 굴던 내 전담 하녀의 등을 퍽퍽 두드려 주었다.
“네…….”
하녀는 조금 의기소침해진 상태로 남은 꼬치를 입에 넣었다. 아유, 잘 처먹네.
이어서 다른 이들에게도 꼬치를 하나씩 나눠주고 나도 한 입 크게 먹어 보려던 차.
“당신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울렸다.
“저, 전하!”
하인들이 급하게 일어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꼬치를 향해 입을 벌린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씨, 들켰다.
“내가 평민처럼 굴지 말라고 했지?”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귀족처럼 살아본 전력이 없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될 리가 있나요…….
“본인 처지도 입장도 잊고 속 편하게 이러고 있다니.”
이안이 내 앞으로 걸어와 미간에 고랑을 만들었다.
“걱정한 내가 다 우스워지는군.”
“걱정하셨습니까?”
“…….”
“큼, 아무튼.”
나는 머쓱하게 들고 있던 꼬치를 내밀었다.
“한 입 하실래요?”
“치워.”
“네.”
내 입으로 꼬치를 야무지게 치우고 이안을 따라 식당을 나갔다.
“아, 저기.”
“기름 낀 손으로 붙잡지 마.”
“잡을 생각 없었는데……요.”
그가 피식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무심한 척할 심산이지?”
“예?”
“내게 관심받으려고 하인들과 이런 짓까지 벌이는 거, 솔직히 좋게 보이지 않아.”
“…….”
누가 관심을 받으려고 했다는 거지.
이 인간이랑 얘기하다 보면 자꾸 대화를 못 따라잡겠는데, 이번에도 내가 이상한 건가.
“그, 딱히 관심받으려고 한 적은…….”
“변명할 필요 없다.”
아, 예.
변명으로 들리시는구나…….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오픈 북 될 때까지 조용히 있자.
“이번엔 또 상처 입은 척하는 건가?”
“…….”
조용히 있으면 반이라고 간댔다. 나는 반이라도 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내가 침묵하자 그는 혼자 다채롭게 불편함을 내비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네.”
“억지로 참을 필요 없다.”
“예?”
“당신은 내 약혼자야. 과정이 어찌 됐든 나는 혼인 후 당신을 부인으로서 존중할 거다.”
“어, 고맙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불안하다고 이런 식으로 관심 끌 생각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예? 뭘요?”
“내 어머니가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한다지.”
“아.”
“불안해하지 마. 내가 있는 이상 그 여자는 당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고마워요.”
“그래.”
그게 본론이었는지, 이안은 말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왜 저럴까.’
뭐 딱히 도움을 요청할 만큼 불안하진 않았지만…… 걱정이 요만큼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니까.
그의 호의만은 감사히 받아 두기로 했다.
* * *
카히텐 대부인은 엄청나게 새하얀 말이 끄는 엄청나게 커다란 마차를 타고 왔다.
그녀가 내리자 엄청나게 긴 공작새 깃털로 장식한 엄청나게 챙이 넓은 모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작새가 날개 펴고 파드득거리는 것 같다.’
그녀는 엄청나게 화려한 사람이었다.
“이안은?”
대부인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작 전하께선 안에서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스가 다가가서 공손히 대답했다.
“마중 나올 생각 없다는 거네. 하여간 무뚝뚝한 건지 아빠랑 똑 닮았어.”
그녀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케이시 양의 뒤에서 움츠러들어 있었다.
안 무서웠는데.
분명 안 무서웠는데.
공작새 깃털이 너무 위압적이었다.
“흐음.”
그녀의 시선이 대문을 빙 돌아 나에게 정착했다.
순간 다트 핀으로 꽂힌 기분이 들었다.
“아, 너구나?”
레이스가 유난스러운 부채를 탁탁 치며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내 아들을 28살 먹도록 독신으로 만든 원흉이.”
싱긋 웃는 얼굴에 닭살이 절로 돋았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입니다.”
“응, 초상화라면 지겹도록 봤어. 내 아들과 결혼하기로 한 여자였으니까.”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차댔다.
“초상화가 낫네.”
“그, 그런가요.”
“응. 근데 너 좀 아파 보인다. 그래서 애는 낳을 수 있겠어?”
아뇨. 저 진짜 그 대사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거든요. 제발 참깨처럼 들들 볶아서 그 전에 이혼시켜 주세요.
“몸은 멀쩡한 거 맞지?”
전혀 멀쩡하지 않다고 하면 쫓아내실 건가요. 소기의 목적만 완수하면 저 언제든 쫓겨날 의지가 만반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는 입술을 꾹꾹 깨물어 혈색을 올리고 애써 웃었다.
“그럼요. 건강합니다.”
“하긴, 그러니까 혈혈단신으로 십 년을 버텼겠지.”
“…….”
“그걸 또 잡아 온 내 아들도 참 용해. 그 시간에 새 장가를 들었으면 자식을 열은 봤겠다.”
자식이 열이라니, 부인 죽어 나갈 일 있습니까? 나는 또다시 무서워졌다.
제스가 초조하게 창가를 살피며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마님, 대공 전하께서…….”
“아, 그래. 그 애가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라 했지. 그런데 이게 쓸데없는 소리인가? ……뭐, 그 애한테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야.”
카히텐 대부인은 제스의 만류에 겨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열을 식혔다.
“어쨌든 반가워. 십 년이나 기다린 내 며느리.”
“네, 저도…….”
“아니, 너는 반갑다고 하면 안 되지. 도망까지 쳐 놓고 이제 와 양심에 개털 났니?”
“죄송합니다…….”
낯선 가문의 대부인에게서 익숙한 전생의 향기가 난다.
70년대를 힘겹게 살아온 우리 엄마의 시대착오적인 단어 선택과 따발총 같은 잔소리.
‘심지어 어조까지 비슷해…….’
이 세계관에서 추구하는 대공가의 이미지와는 여러모로 괴리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안 들어오니?”
“가, 갑니다.”
“너 말고 제스.”
“……넵. 죄송.”
아무튼 이 사람, 엄청나게 무섭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