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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9화 (39/140)

39화

나는 오늘 처음으로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했다. 그간은 이안과 완전히 따로 식사했으니 굳이 여기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다.

세로로 사람 셋이 눕고도 남을 길이의 롱 테이블에 온갖 진수성찬이 차려졌는데, 전부 그림의 떡이었다.

“…….”

“…….”

침묵. 침묵. 침묵.

고요하다. 교수님과의 저녁 식사도 이보단 활기찰 것 같은데.

나와 이안, 카히텐 대부인. 단 세 명뿐인 식탁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인사치레 외엔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안이야 원래 저런 캐릭터니까 그렇다 치고. 대부인은 잔소리꾼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저렇게 조용하지?’

왕년의 딱따구리로서 한마디 얹고 싶었지만, 막 도착했을 때의 대부인을 생각해 꾹 눌러 참았다.

나는 전식으로 나온 수프와 후식으로 나온 푸딩만을 깨작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제 폭식해서 정말 다행이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즈음 이안이 내게 물었다.

“아픈가?”

“아뇨.”

“수저를 거의 안 들던데.”

그런 것까지 감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냥 입맛이 좀 없어서요.”

“그래?”

네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속이 더부룩하면 차는 마시지 말고 들어가.”

“어, 그래도 돼요?”

“그래.”

“이안!”

대부인이 그것만은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지만 이안은 무시했다.

“들어가서 쉬어.”

“가, 감사합니다.”

뒤통수가 찌릿찌릿한데 그냥 내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방에 들어가자 케이시 양이 속삭였다.

“전하께서 아가씨를 많이 살펴 주시네요.”

“그런가?”

“네. 마님께서 이렇게 말씀이 적으신 건 처음 봤어요. 아마 전하께서 따로 하신 말씀이 있었겠죠.”

“음.”

나는 나중에 따로 제스에게 사정을 물었다.

그가 말하길 이안이 ‘제 약혼녀에게 쓴소리하실 거면 그냥 다물고 계십시오.’라고 했다고.

제스는 식사 중의 인위적인 침묵이 카히텐 대부인의 암묵적인 시위일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난 그거 아니면 너희한테 할 말 없는데?’라는 비언어적 의사 표현이란 말이지?

하지만 이안은 그 정도 시위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었다. 상대가 말을 안 한다고 본인도 입을 다문 걸 보면, 둘 사이의 신경전이 보통은 아닌 듯하다.

‘그럼 차를 마시지 말라고 한 것도…….’

보통 귀족들은 식사 후에 응접실에서 차를 나눈다고 했다. 본격적인 대화는 그때부터라고.

어쩌면 대부인은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안도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돕고 있었구나.’

나름의 방식이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이런 식으로 요구하기 전에 먼저 배려받은 건 처음이었다. 미래를 도모하는 의미로 감사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겠지.

나는 티 타임이 끝날 시간에 맞춰 이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던 찰나.

“……이라고?”

말소리가 들렸다.

‘제스랑 업무를 보던 중인가?’

NPC처럼 집무실에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쉴 틈도 없이 일하는구나. 힘내라, K-흑막.

‘괜히 일 방해하지 말고 나중에 얘기하자.’

그렇게 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리운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면, 엿들을 마음도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체이트 폴린.’

그들은 체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안 그래도 체이트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다.

“…….”

“…….”

하지만 대화는 귀신같이 뚝 끊겨 버렸다.

‘뭐야. 끝물에 왔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노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툭툭.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찔렀다. 돌아보니 카히텐 대부인이 ‘오늘 일 끝나고 한 잔 고?’ 하고 외칠 것 같은 포즈로 엄지를 뒤로 흔들고 있었다.

* * *

카히텐 대부인은 기어코 나와 찻잔을 마주하는 데 성공했다.

‘끈질기시기도 하지.’

속으로는 좋다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겉으로는 아주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뭔지 여쭤봐도 되나요?”

내 물음에 그녀가 찻물을 한 번 머금은 후 대답했다.

“왜 돌아왔는지 궁금해서.”

“아, 그게…….”

댁 아드님이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면 저 성격에 내게 찻잔을 던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미래를 바꾸려고 왔습니다!’하고 털어놓으면 미친 사람 취급받겠지.

이건 나 혼자만의 비밀이다. 믿어줄 사람 하나 없을 거 다 아니까 그냥 다물고 있자.

“말을 못 하겠어?”

“그게…….”

내가 머뭇거리자 대부인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 알아. 네 철없는 행동이 날이 갈수록 후회가 됐겠지?”

아, 이번에도 답이 있는 문제였나. 이 집안사람들을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걸 참 좋아하는구나.

“그래. 우리 이안이 한번 보면 누구나 반할 법한 미남에 소나무처럼 듬직하고 능력도 출중하긴 하지. 이런 괜찮은 남자를 만날 기회가 네 평생 어디 또 있겠어.”

그 괜찮은 남자를 저런 나르시시스트로 망쳐 놓은 게 누군가 했더니 댁이셨군요.

“그런 아이가 십 년을 썩혔어.”

“…….”

“너 때문에.”

그 순간 고개가 모로 기운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게 정말 나 때문인가?

이안은 이미 나와의 결혼에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다 취해 놓은 상태였다.

내가 장기간 실종 상태였으니 약혼이야 언제든 파기할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새 사람 찾아서 성대한 웨딩 마치를 올릴 수도 있었다.

브링스턴 가문이 내게 육두문자를 날리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얘네가 나에게 화를 내는 건 솔직히 좀 책임 전가 아닌가.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은 건 내가 아니라 순전히 이안 카히텐의 의지인데, 왜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죄송한데요.”

“죄송하면 말을 하지 마.”

아, 예…….

난 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러면 왜 물어봤어…….’

다들 화가 많구나. 어디든 풀고 싶은데 내가 제일 만만한 거지?

그래…… 인간이 다 그렇지 뭐.

나는 자세를 편하게 고쳐잡고 안면에 너른 미소를 띠었다.

자, 쏟아내라. 난 지금부터 고막 터진 사람처럼 있을 테니.

“난 말이지,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시작됐다. 좋아, 참아주지.

“특히 네 얼굴이.”

“얼굴이요?”

못 참았다.

“이 얼굴 마음에 안 들기 힘든데…….”

레티시아, 병약하긴 해도 나름 호감상 아닌가…….

대부인은 찻잔 테두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너무 닮았어…….”

“닮았다고요?”

누구랑?

고개 숙인 그녀의 눈동자가 위로 바싹 올라갔다.

“그 여자랑.”

그 여자?

“그 미친 여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였다.

‘뭔 소리야.’

모르면 닥치고 있자.

알아서 떠들어 주겠지.

적당히 미안한 척하고 있으니 예상대로 대화가 이어졌다.

“너도 알지? 난 이안의 친어미가 아니야.”

이안 카히텐의 친어머니는 이안이 어릴 때 병사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기억에도, 원작에도 딱 그 정도 정보뿐이었다.

“그 아이가 툭하면 하는 말이지. 친어머니도 아닌 주제에 잔소리 말라고.”

대부인이 비뚜름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이안에게 해준 게 뭐가 있지? 내가 키웠고, 내 자식이야.”

그 여자는 아마 이안의 친모를 뜻하나 보다.

‘내가 이안의 엄마를 닮았다고? 머리 색부터 다른데?’

이안이 어릴 때 그린 그림에서 본 그녀는 백발에 가까운 은발이었다.

“내가 그 애에게 얼마나 충실했는지 너 아니? 결혼도 뭐 나 좋자고 하라는 건가? 다 지 생각해서 얘기하는 거지!”

어, 뭐지. 이 기시감. 그리고 이 미친 공감대.

나는 무심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옳습니다!”

“……어?”

“피도 안 섞인 애 거둬 먹인다고 애쓰고 살펴서 겨우 멀끔하게 만들어 놨더니 다른 사람 만나서 홀라당 떠나길 바라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겠어요? 옆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 주면 외롭지도 않고 오히려 좋지!”

“그, 그치! 후계가 없으면 앞날이 불투명하니까 다 그 애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일 뿐인데…….”

“맨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맞아!”

한순간에 뜨거운 전우애가 형성되었다.

“걔는 자기가 평생 젊을 줄 안다니까? 늙어서 혼자인 게 얼마나 서러운데.”

“아 맞죠, 맞죠.”

“그런데 그 애가……! 나한테, 조용히, 흐읍, 조용히 있으라고……!”

오늘 식사 전에 이안에게 한 소리 들은 게 어지간히 서운했는지, 대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유, 너무하셨네!”

“잠깐, 너어…….”

“예?”

대부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다 너 때문이잖아!”

“아.”

“너 때문에 이안이…… 이 나쁜 계집애!”

“아니…….”

왜 맞춰줘도 XX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흐윽.”

“부인, 콧물 나왔어요.”

난 얼른 테이블 위에 있던 천을 건네주었다.

‘보기보다 눈물이 많으시네. 이 집안사람들은 처음엔 세 보이는데, 꼭 어느 한 부분에서 깬단 말이야.’

방금 격한 공감대를 형성해서일까. 그녀와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크흥! 흥!”

그녀가 내가 준 천으로 시원하게 코를 풀어 젖히면서 말했다.

“근데 너 생각보다 섬세하네? 손수건도 다 들고 다니고.”

“아, 그거 그냥 여기 있었는데.”

“…….”

“…….”

하녀가 까먹고 놓고 간 행주였다.

“죄송…….”

“꺄아아아악!”

대부인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더러워! 불결해! 세, 세수해야 해! 세수!”

그녀가 허우적거리며 딸랑 종을 울리고 하녀를 찾았다. 하녀가 다급하게 세숫물을 가져왔다.

허겁지겁 대야에 얼굴을 박은 그녀는 세수를 마친 후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사라졌다.

음, 아무래도 냉전이 다소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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