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어두운 밤이었다.
고요하고 야심한 시각.
침실에 아무도 없어야 마땅한 시간.
어두운 침실 내 커튼 너머에 긴 그림자가 져 있었다.
‘누구……?’
낯선 인기척에 잠에서 깬 나는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체이트……?”
“그자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
동굴 같은 저음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전하? 왜 여기 있어요?”
“여기가 내 집이야.”
“여긴 내 방이에요!”
그가 낮게 웃었다. 심해로 가라앉을 듯한 웃음소리였다.
이윽고 자잘한 웃음마저 완전히 멎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네?”
“당신, 뭔가 숨기는 거 있나?”
뜨헙.
하마터면 사과할 뻔했다.
“없……는데요?”
“그래?”
이안은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눈이 적응되면서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은한 달빛에 반짝이는 그의 머리카락은 파도가 자아내는 물거품 같았다.
“당신의 혈통이라면 누구보다도 명백하게 잘 알고 있어. 어느 하나 의심할 구석이 없지.”
“……그런데요?”
“유일하게 불가해한 부분이라면 당신의 도주 후 행적인데…….”
“…….”
“그조차도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저렇게 무게를 잡고 뜸을 들이는 걸까. 긴장돼서 잠이 확 깨 버렸다.
“레티시아.”
“네.”
“당신이 이해가 안 돼.”
“……네?”
“당신이 엮인 모든 상황이 그저 우연일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놀랍다.
솔직히 되는 대로 살았을 뿐인데, 평범을 추구하던 내 삶은 어느새 스토리의 핵에 너무 깊숙이 닿아 버린 듯하다.
수습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려 버리기 일쑤였고.
매 순간 의도는 진짜 투명했는데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니 나도 답답하다.
“하나만 묻지.”
“네, 물어보세요.”
“혹시 당신이 도주해서 그 마을에 정착하기 전까지, 누군가 만난 적 있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세상에서 누군가의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
나는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면 어떤 누군가요……?”
대답이 바로 나왔다.
“예를 들면, 체이트 폴린만큼 강한 성력을 가진 여자.”
“으음.”
거지랑 같이 동냥 다닌 적은 있어도 그런 비범한 여자를 만난 기억은 없었다.
내가 고개를 휘휘 젓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네.”
“……그래. 우연은 거기까지였나.”
그가 기대고 있던 벽에서 일어났다.
“당신에게 물어도 확인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겠지. 좋아, 당신을 믿어보지.”
그가 문고리를 돌리고 나가며 인사처럼 말을 던졌다.
“우린 곧 부부가 될 테니까.”
그의 말을 들으니 문득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구나.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뺨을 툭툭 쳤다.
“뭐하냐.”
누구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잠이나 자야지.
* * *
제스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체이트가 자신에게 걸어 놓은 계약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날짜가 목을 죄어 왔다. 숨이 막혔다.
‘이대로 가다간 혼이 분리되기 전에 스트레스로 절명할 거야.’
제스는 요즘 매일 꿀 같은 휴식 시간마다 혼자 정원에 나가서 풀을 뜯었다.
전하께 얘기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오늘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전하가 자신을 가만히 둘까? 아니, 그렇지만 체이트 폴린이 원하는 대로 계약을 이행하려고 해도 간자 짓을 한 걸 들키는 순간 끝장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호상으로 끝나지 않을까…….’
헉.
하마터면 포기할 뻔했다.
제스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도리질 쳤다.
이러나저러나 들키면 죽는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안 죽을 확률이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하는데.
‘모르겠어. 나, 용기가 안 나…….’
이대로 죽는 걸까.
제스가 시름시름 앓던 그때.
손바닥에 뭔가 이상한 문자가 적혔다.
‘이거 혹시…….’
체이트 폴린의 전언이었다.
‘이것도 계약의 효과인가?’
제스는 잠시 울컥했지만, 침착하게 이성을 되찾고 손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글자를 읽었다.
‘엥? 이걸로 되겠어?’
제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지령이었다.
하지만 안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제스는 풀떼기를 던지고 벌떡 일어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브링스턴 후작가에 보내려던 서신의 머리글자를 살짝 비틀었다.
브링스턴 후작가의 가주에게 갈 편지가 그 여식인 셀레나 브링스턴에게 먼저 갈 수 있도록.
그저 발송 과정의 실수로 보일 만큼 미세한 오타였다.
* * *
레티시아가 돌아온 이후.
브링스턴 후작가는 하루하루가 소란스러웠다.
우선은 브링스턴 후작 부처.
그들은 기쁨과 분노로 하루에도 몇 번씩 신에게 감사를 올렸다가 제 딸을 저주하길 반복했다.
“내 딸이 살아 있었어! 레티시아, 그 어여쁜 아이가 살아 돌아오다니……! 이건 기적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실종이 아니라 진짜 도주였다고? 십 년을 가족에게 안부도 없이 잠적했단 말이야? 불효막심한 녀석!”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다가, 주먹을 그러쥐었다가. 그리고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가.
다채로운 두 사람의 반응에 그저 기가 막혀 코웃음 치는 여자가 있었으니.
‘왜 저러는 거야?’
바로 브링스턴 후작가의 차녀, 셀레나 브링스턴이었다.
‘화내는 건 이해가 가. 이게 좋아할 일이야? 실종이면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둘러댈 수야 있지. 이건 금전적으로 손해 본 것만이 아니라, 우리 가문의 명예까지 실추될 만한 일이잖아.’
십 년 전에 셀레나는 열 살이었다. 언니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애정을 유지하기엔 십 년이 체감상 너무 길었다.
‘그 여자는 죽었어야 했어.’
셀레나는 속으로 언니를 비난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망친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누구는 결혼이 싫어서 십 년을 제멋대로 살아도 젊고 멋진 대공과 다시 혼인하고, 누구는 악착같이 소임을 다 해도 스무 살 연상인 황제의 후처로 들어가야 한다니.
‘이런 건 불공평해.’
레티시아가 돌아오기 몇 달 전, 황실과 브링스턴 후작가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 북부와 혼인 동맹을 맺는 일이 애매해진 브링스턴 후작이 황실로 눈을 돌린 결과였다.
그것까지는 좋다. 문제는 황실에 젊은 피가 하나도 없다는 거지.
황제는 사별한 전처에게서 아이를 보지 못했다. 사생아가 하나 있었지만, 그 애는 아장아장하는 꼬맹이였다.
결국, 마땅한 결혼 상대가 마흔 줄에 가까운 황제뿐이었다는 거다.
셀레나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나이 차가 무려 스물이나 나는 남자와 정략혼을 하라니. 좋을 리가 없었다.
해보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많은 나이.
그녀에게도 연애와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늙은 황제와 혼담이 오간 이후로 모두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래도 자신은 어떻게든 받아들였다. 전처에게서 아이가 없었으니 어떻게든 차기 황제를 낳아야겠다며 사랑을 야심으로 치환했다.
제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도 언니가 돌아왔다.
사지 멀쩡한 상태로, 제 약혼자에게 덜미가 잡혀서.
그는 혼인 계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며, 자신이 브링스턴 후작가에 파혼을 통보하지 않는 아량을 베풀겠다고 하였다.
마치 죄인을 선처하듯이.
‘어차피 그때 예물로 약속한 것들은 다 받아먹어 놓고.’
셀레나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분통이 터지지만, 십 년째 연락이 없던 약혼녀를 직접 찾아서 결국 혼인하려는 남자의 일편단심이 한편으로 부러웠다.
어차피 정략혼이라면 자신도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왜 나만 희생하는 것 같지?’
세상이 자신을 따돌리는 기분이 들었다.
셀레나가 아랫입술을 앙다물고 돌아서려던 그때.
“아가씨?”
하녀가 다가왔다.
“편지입니다.”
“아, 거기 둬.”
하녀는 쟁반 위의 편지들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셀레나는 사교계에서 발이 넓은 편이었기에 매일 열 통 넘는 편지를 받고는 했다.
지금은 편지를 읽을 기분이 아니다.
그녀는 편지들을 모아서 제 방 서랍장에 넣어 두려고 했다.
하지만 유독 문양이 화려한 봉투 하나가 눈에 띄어 버렸다.
“이건…….”
셀레나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그녀가 편지 더미 속에서 그것을 쏙 빼 들었다.
이윽고 좁아 들었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카히텐 대공령에서 송달된 편지였다.
굳이 아버지를 두고 카히텐 대공이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이유는 없을 텐데.
‘실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셀레나는 커팅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봉투 겉면의 냄새를 맡았다. 진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셀레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어서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살폈다.
“……과연.”
표정은 금세 죽상이 되었다.
이건 레티시아와의 결혼에 대한 편지였다.
카히텐 가문이 제안한 식의 날짜는 매우 일렀다. 어차피 하려던 거, 속전속결로 끝내자는 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던 셀레나가 불시에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도둑놈…….”
카히텐 대공이 혼수를 요구하고 있었다.
앞서 브링스턴 후작가로부터 받은 광산과 항만은 계약의 불이행에 대한 대가일 뿐이니, 갱신을 위해서 추가적인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순순하다고 생각했지.’
이걸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계산적인 이야기였다.
‘먼저 봐서 다행이네.’
브링스턴 후작은 자식에게 뒷얘기를 거의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게 아버지에게 갔다면, 자신은 카히텐 대공이 뼈까지 발라 먹을 인사라는 사실을 추호도 모른 채 황실로 업혀 갔겠지.
‘얼굴도 가물가물한 언니를 위해 가문이 희생하는 짓은 더 이상 못 봐.’
셀레나는 편지를 구기고 다짐했다.
이런 밑지는 결혼 장사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내겠다고.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