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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42화 (42/140)

42화

아침이 유독 찌뿌듯했다. 밤새 잠을 설쳐서 그렇다.

‘피곤한 아침이라도 햇살은 여전히 밝네.’

난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뜨고 지난날의 악몽을 회상했다.

언제더라. 한 나흘 전인가?

남의 방에 멋대로 쳐들어온 잘생긴 불청객, 이안의 그림자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아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그날의 이안은 평소보다도 훨씬 의뭉스럽고 과묵했다. 속을 알 수 없는 태도와 말투가, 꼭 체이트 같았다.

‘나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이 있었나?’

예를 들면, 나에 관해서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거나?

이 세계의 배경이 현대였다면 이안은 흰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세단을 타고 다니며 지하를 점령할 것 같은 남자였다.

암흑가 보스처럼 생긴 주제에 의외로 건실하긴 하지만, 뒷조사 정도야 못할 것도 없지.

로판 세계에서 잘생긴 놈들의 음흉함은 참으로 유구하다.

‘뭐, 캐도 나올 건 없겠지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자꾸만 눈이 가물거린다. 간만에 모오-닝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케이시 양한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이래 봬도 찻집 경영만 십 년을 했다. 전직 카페 사장으로서 커피 내리는 건 일도 아니지.

나는 직접 주방으로 내려갔다.

꼬치를 해먹인 이후로 극적인 화해를 이룬 요리사가 나를 반겼다. 음, 원래 밥상 같이 쓰면서 정드는 거지.

“아가씨,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로?”

“커피.”

“예?”

“커피가 땡겨.”

나는 긴 설명 없이 찬장을 하나씩 열어가며 원두를 찾았다.

다행히 로스팅된 원두는 성내에 항시 갖춰져 있었다.

요리사가 자신이 직접 해 주겠다고 다가왔지만 손사래를 쳐서 거절하고, 손수 원두를 갈고 드립백을 내렸다.

“능숙하시네요.”

요리사의 감탄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렴 내가 이 짓을 몇 년을 했는데.

뿌듯해진 마음에 첫 잔은 요리사에게 건넸다.

“자.”

“감사합니다.”

요리사는 신중하게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가 입으로 커피를 요리조리 머금더니 꿀꺽, 삼키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대단합니다.”

“그 정도야?”

“예. 어떻게 같은 원두를 써서 같은 방식으로 내렸는데 이렇게 치명적인 맛이…….”

그러더니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역시 내 커피인가.’

효능 확실하군.

나는 조금 씁쓸해진 기분으로 내 몫의 커피를 마저 내렸다.

사람이 맛없는 식당 요리는 먹다 뱉어도 본인이 망친 음식은 참고 먹을 만하듯이, 나 역시 내가 내린 커피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하지만 독특한 커피 향을 스윽 맡고 입을 대기 직전.

“아가씨, 조심하세요!”

어디선가 케이시 양이 달려와 내 커피를 쳐 냈다.

그리고는 이마의 땀을 쓱 훔치며 멍한 나를 뿌듯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괜찮으세요?”

“아, 응.”

그녀가 예리한 시선으로 날아간 커피잔을 노려보았다.

“저 향, 누가 독을 탄 게 분명합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셨어요.”

“…….”

“누구죠? 저 독극물을 내준 작자가.”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왠지 시끄럽고 오지랖 넓지만, 내 커피를 누구보다 사랑해 준 어떤 부인이 조금 그리워졌다.

* * *

커피를 포기하고 터덜터덜 돌아가는데 대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예정보다 일찍 와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는 중이었다.

이안이 계속 눈치를 주는데도 꿋꿋하게 붙어 있는 걸 보면 저분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두 눈을 매섭게 부라리더니 흥 하고 등을 돌렸다.

행주로 면상 닦은 그날 이후로 사이가 심하게 틀어져 버렸는데 이걸 어찌 바로잡아야 하나.

그나저나…….

‘왜 저렇게 노랗게 떴어?’

나만의 만능 정보통, 케이시 양을 찾아갔다.

“케이시 양, 케이시 양, 질문이 있어요.”

케이시 양은 정말 대단한 정보통이었다. 어떻게 대부인이 변비라는 것까지 알고 있느냐는 말이다.

나는 케이시 양이 조금 무서워졌다.

‘대부인 안색이 안 좋았던 이유를 알겠네.’

케이시 양의 첨언에 의하면, 혼자 사실 땐 장 활동이 원활하신데 이안이랑 같은 공간에만 있으면 저런다고 한다. 심리적인 요인이 큰 듯했다.

‘안 됐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왠지 도와주고 싶어졌다.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계속 이렇게 데면데면한 것도 조금 그렇고.

마침 나만이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직접 커피 한 잔을 들고 대부인이 있는 응접실로 갔다.

“나가.”

네? 아직 안 들어갔는데요.

노크보다 빠른 축객령이라니.

이 집안사람들은 다들 감각이 예민하구나.

나는 못 들은 척 꿋꿋하게 안으로 들어가기는 무슨. 쿠션에 얼굴 맞고 빠르게 퇴장했다.

결국 또 케이시 양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 좀 부인께 전해줘.”

케이시 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가씨, 아무리 싫으셔도 독살은 좀…….”

너 고의로 이러는 거지.

“……그냥 커피야.”

“…….”

의심하는 것 같기에 다른 잔에 내려서 한 입 마셔 보았다. 다들 이게 뭐라고 질색하는 거지. 썩 맛있지는 않아도 먹을 만한데.

“앗, 안 돼!”

한 모금 더 머금기 직전, 케이시 양이 나를 끌어안았다.

“죽지 마세요! 죽으면 안 돼요, 아가씨!”

“안 죽어…….”

사태를 해명하고 그녀에게 커피 심부름을 부탁하기까진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케이시 양이 커피를 전하는 사이, 나는 벽 뒤에 쭈그러져 있었다. 왠지 연애편지를 친구한테 대신 맡긴 소심한 학생이 된 것 같다.

만에 하나 토하거나 집어던지면 언제든 튀어 나가서 내가 했다고 외쳐야지.

하지만 잔을 입에 대고 잠시 인상을 쓰던 대부인은 별다른 돌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아, 세 모금쯤 마시고 화장실로 뛰어가긴 했는데. 그건 내 예측 범위 안이었으니 논외로 친다.

* * *

커피가 입맛에 맞았는지 대부인은 종종 케이시 양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그게 내 커피라는 걸 알게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너였어?!”

그녀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내 커피를 끊지는 못했다.

행주로 소원해졌던 우리 사이는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개싫은 인간에서 조금 싫은 인간이 된 나는 오늘도 커피를 내린다.

‘진작 이쪽 타깃으로 장사를 해야 했나.’

똥쟁이들을 위한 특별 에디션, 물러가라 변비 변비.

대박 날 수 있었을지도 몰라.

* * *

마을을 떠난 지 한 달이 좀 안 됐나.

카히텐 성에서의 생활도 슬슬 적응이 돼 가고 있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데 몸이 편해도 너무 편했다.

초반에 까칠하게 굴던 하인들은 슬슬 내게 무심해졌다. 사람 못살게 구는 것도 평균 이상의 에너지와 끈기가 필요한 일이지. 근로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그런 감정 소모는 사치긴 하다.

날 지독하게 괴롭힐 것 같았던 카히텐 대부인도 커피 한 잔에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입으로는 귀에 피가 나도록 잔소리를 하시긴 하는데, 나는 전생에서부터 이쪽으로는 슈퍼 면역자라서 견딜 만했다.

하나 의아한 점이라면 브링스턴 후작가로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는 것이다.

이안은 서신을 보내고 2주 뒤에 식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지. 어느덧 그때가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조용한데.’

하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앗, 나의 실수! 당장 진행하자!’라고 할 것 같아서 다물고 있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내 진짜 목적은 애당초 결혼이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솔직히 내 미래를 생각해볼 때 결혼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았다.

아무튼 교통정리도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사술에 대해 파헤쳐 볼까?

……라고 팔을 걷어붙였건만.

“케이시 양.”

“네, 아가씨.”

“나 혼자 있고 싶어.”

“그건 곤란해요, 아가씨.”

전보다 감시가 엄중해졌다.

밤중에 이안이 방에 들어와서 내게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고 간 이후부터였다.

도망칠까 봐 감시를 늘린 건 아닐 거다. 그랬으면 초장부터 빡빡했겠지.

이건 명백한 의심이다.

이안이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나를 왜?’

물론 내게 비밀이 없는 건 아닌데, 그건 이 세계에서 캐내려야 캐낼 수가 없는 비밀이고.

세상에 레티시아만큼 무능하고 비중 적은 단역이 어디 있다고.

“……갑자기 슬퍼지네.”

아무튼, 이건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거야.

나는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의심병 말기 환자를 찾아갔다.

똑똑.

“들어와.”

늘 그렇듯 이안은 집무실에 있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안경을 내려놓고 콧대를 문질렀다.

“무슨 일이야?”

“나 숨 막혀요.”

“호흡해.”

“아니, 눈이 너무 많아서 갑갑하다고요.”

“그래 봤자 전부 하인들이랑 기사들이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살아.”

“그게 어떻게 돼요! 사람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쫓아다니는데!”

“난 되던데.”

당신은 본투비 귀족이고.

나는 빙의한 소시민이란 말이야.

내가 부루퉁하게 서서 버티자 그가 짧은 한숨과 함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갑갑해?”

“네.”

이안은 산처럼 쌓인 서류를 일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쩔 수 없군.”

끼익,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소음을 자아냈다.

“네 장단에 맞춰주지. 잠깐이라면 괜찮아.”

“네?”

“갑갑하다며.”

“……그렇긴 한데.”

“나가자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나가도 나 혼자 나가지, 왜 굳이 댁이랑…….

‘가만.’

이거, 기회일지도 모르겠는데.

사술을 사용한 시발점을 알기 위해선 원작에 나오지 않는 이안의 사정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본인과 친분을 쌓는다면 굳이 빙 돌아가지 않아도 자연히 단서가 보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안의 친모, 분명 뭐가 있는데.’

가능하다면 그 이야기도 슬쩍 물어봐야지.

나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나가죠!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그가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지.”

여전히 재수 없지만 참아 줄 만했다. 슬슬 저 남자의 오만함에도 면역이 생기는 듯하다.

* * *

한편, 수도의 브링스턴 후작가 타운하우스 응접실에서는 두 부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브링스턴 후작과 그의 막내딸인 셀레나 브링스턴이었다.

“언니가 결혼을 하려면 진작 했어야 했어요. 대공의 승계 초에.”

셀레나는 제게 오배송된 서신을 내밀며 단호하게 얘기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하지만 셀레나, 카히텐 대공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때 잘 잡아 뒀어야죠. 지금은 카히텐 대공과 헬리아스 황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때가 아니에요.”

셀레나가 말했다.

“황실은 죽어가는 북부를 경시해 왔죠. 그때는 양측에 절반씩 배팅을 걸어볼 만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몸집이 커진 대공과 섣불리 합종했다간 괜히 황실에 미움만 살 거라고요.”

“…….”

브링스턴 후작은 침묵했다.

셀레나는 화를 꾹 참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제 아버지는 능력에 비해 욕심이 너무 비대하다. 적절한 선에서 맺고 끊을 줄을 알아야 하는데, 두 마리 토끼가 보이면 양쪽으로 작살을 던지려 한다.

그래서는 잡힐 것도 안 잡힌다고.

“제 혼담이 도마 위에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일단 기다려 보죠.”

“그 말은…….”

“미루자고요, 언니 결혼.”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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