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안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카히텐령의 번화가였다.
북부 끝자락에서 시내라고 부르는 곳보다 열 배는 더 복잡하고 요란한 시가지에서, 난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뭐 하는 거지?”
“잃어버릴까 봐요.”
“……당신, 나이가 몇이야.”
“스물일곱?”
“일곱 살처럼 굴지 마.”
“아, 예…….”
민망해져서 슬쩍 옷소매를 내려놓았다. 체이트랑 다닐 때 들었던 버릇이 종종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걘 그럼 날 일곱 살 애 다루듯 대한 건가?’
난 내가 체이트를 과보호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과보호를 당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가 내게 이성적 감정을 내비친 날, 그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달리 보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관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장소.
그런 건 애당초 내 주위에 없었다. 일상도, 관계도, 장소도. 내 낙관과 그의 배려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했다.
우리는, 인형 놀이를 하고 있었던 거다.
가족 인형 한 쌍을 각자의 손에 쥐고 흔들었다. 내가 주최한 놀이였고 그가 동참해 주었다.
‘우린 남이야, 레티시아.’
그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의 인형은 망가진 지 오래인데 그와 내가 아직도 이어져 있다는 착각을 종종 하고는 한다.
아직도 내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멀뚱히 서 있지 마.”
이안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새 사이가 꽤 벌어졌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갔다. 금세 가까워졌다.
“우리 어디로 가요?”
“마담 로지나의 살롱.”
“응? 가게 이름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머니의 단골 가게이지.”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는 친모가 아니라 계모인 벨린다겠지.
그리고 단골이라면 역시…….
“말했잖아. 옷이라면 얼마든지 사 주겠다고.”
* * *
마담 로지나는 이안을 보자마자 입을 가리고 방방 뛰었다.
“어머, 어머! 대공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오시다니! 처음이야!”
리액션이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이안은 그녀의 반응을 보자마자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저런, 도트 딜을 받고 있구나.
“전하, 사인해 주세요!”
“거절하지.”
“걸어만 놓을게요!”
“그것도 거절하지.”
그는 못 견디고 나를 앞에 내세웠다.
“이 여자에게 어울릴 만한 옷으로 가져 와.”
마담이 나를 실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쪽은?”
“내 약혼녀.”
“헉……! 전하, 드디어 새 장가를……!”
약혼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서 그렇지, 이분 아직 미혼입니다.
그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기용으로 마련된 벨벳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져와.”
“네엣!”
마담이 행거를 통째로 들고 왔다.
“얼굴이 하얘서 뭐든 다 잘 받을 것 같네요!”
프로답게 그녀는 서비스 멘트도 잊지 않았다.
북부의 가장 번화한 곳이라서 그런가. 보온에 철저하면서도 맵시를 드러내는 훌륭한 디자인이 많았다.
내가 드레스를 흥미롭게 구경하자 마담이 다가와서 하나하나 꺼내 보이며 조잘거렸다.
“이 붉은 드레스는 어떤가요? 안감은 따뜻한 걸 썼지만 박사와 공단으로 마감해서 답답해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이 개나리색 드레스도 예쁘지 않나요? 오프 숄더 디자인이라서 아가씨처럼 어깨선이 예쁜 분한테 딱 맞지 않나요? 쌀쌀한 날씨를 감안해서 야외에서 걸칠 숄도 세트로 구성했지요.”
내 머리 색이 연분홍인 걸 감안하면 빨간 드레스는 좀 따로 놀 것 같고, 노란색은 꽤 예뻐 보였다.
“좋네요. 전하, 이 노란색으로…….”
이안이 마담에게 눈을 돌리고 물었다.
“분홍색은 없나?”
“아, 물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아가씨 머리 색이랑 딱이네요!”
“…….”
내 의견은 애당초 무의미했나.
아쉽지만 사주는 거니까 조용히 입자.
마담은 신이 나서 온갖 분홍색 드레스를 품에 낑낑거리며 들고 나왔다.
이안은 디자인을 살피지도 않고 말했다.
“전부 줘. 그리고.”
그가 행거에 걸린 옷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들도 모두 구매하지.”
“……오.”
내가 이 세계에서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를 듣는 날이 다 오는구나.
약간의 경의를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마담은 만면에 화색을 띠고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뭔가를 쓱쓱 적었다.
이번 달 매출이 저번 달 매출과 비교해서 몇 배가 나올지 추산해 보는 거겠지. 저 마음 안다.
혼자만의 계산을 마친 그녀가 신이 나서 내 손을 끌었다.
“좋아요, 당장 시착해 보죠!”
“네? 아니, 그럴 것까진.”
“그럼 저걸 그냥 입을 작정이야?”
이안이 말했다.
“다른 데는 몰라도 허리는 많이 남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죠. 매의 눈이시네.
난 뼈대가 가늘어서 기성복을 사면 상체가 항상 따로 놀았다.
“그럼 저거 다 맞춤 제작용이에요?”
“당연하죠!”
마담이 자부심을 담아 외쳤다.
“비싸겠다…….”
이안의 표정이 심드렁해진다. 눈이 말하고 있다. 궁상떨지 말라고.
그래, 저 남자한테 이 정도는 돈도 아니겠지.
“왜 머뭇거리지? 같이 들어가?”
“아뇨!”
난 뻔뻔해지기로 했다.
하지만 옷본을 따고 기진맥진해서 나왔을 때, 그가 낸 예약금을 보고 도로 고개 숙인 벼가 되었다.
와, 옷값이 내가 십 년간 모은 돈보다 비싸.
* * *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되네요.”
“곧 익숙해질 거야. 당신은 원래 귀족이었으니까.”
“뭐래요? 나는 외출 얘기한 거였는데.”
우리는 마차를 타고 카히텐령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는 길마다 널린 장터를 보니 내려서 주전부리라도 물고 걷고 싶었지만, 이안에게 그런 제안을 할 용기가 안 났다.
마차 옆 점포에서 파는 닭꼬치, 양꼬치, 과일꼬치를 눈으로 먹으며 입맛을 다셨다.
“배고픈가?”
아, 들켰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그냥 맛있어 보여서요.”
“음식 취향 하고는.”
“…….”
그래, 이렇게 나올 것 같았어.
하지만 그는 냉정한 말과 달리 마차를 멈춰 세우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저거 사와.”
“예, 전하.”
잠시 후, 닭꼬치와 양꼬치가 내 양손에 하나씩 들렸다.
“괜찮아요?”
“뭐가.”
“이런 냄새, 싫어하실 것 같은데.”
“싫어해.”
“…….”
“그러니까 빨리 먹어서 없애.”
그런 거라면 제가 또 전문입죠.
나는 재빨리 고맙습니다, 인사하고는 꼬치를 베어 물었다.
‘이 시판 소스의 맛, 최고다!’
역시 내 입맛에는 시장통 꼬치가 딱이야.
“드레스를 고를 때마다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니, 드레스도 감사합니다. ……음, 더 감사합니다.”
이안이 코끝으로 설핏 웃었다.
나는 다 먹은 꼬치를 마차 구석에 살짝 미뤄 놓고, 맞은편에 앉은 그를 흘끔거렸다.
북부의 투명한 햇살이 마차 창가 사이로 새어들어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두루 비추고 있었다.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네.’
턱을 괸 채 창가를 보던 그가 불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몰래 보지 말고 차라리 대놓고 봐.”
늘 그렇듯 자화자찬이었지만 이번만은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흘끔거리고 있었기에 자존심이 팍 상했다.
“딴 데 보고 계시면서 뭘 대놓고 봐요. 각도 제대로 안 줘 놓고.”
농담처럼 툴툴거리자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완전히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이러면 되나?”
“……측면이 나은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뇨, 부담스럽거든요.
“그건 다 먹었나?”
“아, 네. 덕분에 잘 먹었어요.”
“그래.”
그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
그의 표정에 의심이 잔뜩 쌓였다.
“내가 물어볼 게 좀 있거든.”
……안 그러던 사람이 친절하면 의심부터 해야 했는데.
“아르키드네 대주교 말이지.”
“체이트요?”
하루 열두 번씩 생각하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와서 조금 놀랐다.
“당신은 그자를 8년 전에 우연히 만났다고 했지.”
“네, 정말 우연히요.”
“어디서 어떻게 만났지?”
“음…….”
어디서 만났냐고 물어보신다면 저희 카페 근처고,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신다면.
“잘……?”
“내가 칼을 찼는데.”
“카페 앞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데려왔습니다. 정말 그게 답니다.”
나는 속사포로 대답했다.
“많이 다쳤었거든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무작정 데리고 들어왔다.”
“네, 환자를 무시하기는 좀 그러니까요.”
“다시 생각해 봐도 경계심이 형편없군.”
아니, 덜 자란 청소년이 추운 날 흙바닥에서 그러고 있는데 ‘부디 무사히 승천하십쇼’ 하고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물론 경계심이 부족하다는 것도 사실이기에 나는 군말하지 않기로 했다.
“왜 다친 건지는 아나?”
“요안나 양이 말하길 마물에 당한 상처라고 하던데요.”
체이트가 성력이 있는 건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안은 그 점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전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는 말이지.”
“네. 정말 그때 처음 봤어요.”
이안이 장갑 낀 손으로 제 무릎을 톡톡 쳤다.
“처음, 처음이라.”
이안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또 지난밤 그 얘기의 연장선인가.
‘아니, 캐물어야 하는 쪽은 나인 것 같은데 왜 항상 내가 취조당하지.’
나 역시 사술과 엮일 만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가 내게 의문을 던진 이 순간이 적시였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뭔가 있겠지.
나는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인 뒤 물었다.
“당신 친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그녀는 왜?”
이안이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카히텐 대부인께서 전에 그러셨거든요. 제가 당신 친어머니를 닮았다고.”
이안의 눈썹이 대각선으로 비죽 올라갔다.
“당신이?”
“네. 그래서 어디가 닮았나 해서…….”
“안 닮았어.”
이안이 말했다.
“단 한 군데도 당신과 닮은 점 없어.”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