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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44화 (44/140)

44화

“그럼 대부인께선 왜 저를 그분과 닮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글쎄.”

이안이 창가로 눈을 돌렸다. 왠지 시선을 피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저 느낌일 뿐인 걸까.

“아마 내 친모에게 느끼는 감정을 당신에게 느끼고 있어서일지도 모르지.”

“음. 그분과 제 공통점은 ‘싫다’는 걸까요.”

이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벨린다 카히텐은 내 아버지의 연인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

그게 이안 카히텐이지. 이건 알고 있었던 정보라서 크게 놀라지 않았다. 카히텐 대부인이 선대 카히텐 대공의 연인이었다는 건 처음 들은 사실이지만.

“정략결혼을 해야 했기 때문인가요? 우리처럼?”

“우리?”

그가 차게 웃었다.

“당신과 나는 귀족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계지. 내 친모는 달랐어. 정략이라기보다는 약탈에 가까운 혼인이었으니까.”

“……!”

새로운 정보였다.

“야, 약탈이요?”

“내 친모는 본래 누구와도 혼인할 수 없는 여자였거든. 그런 여자를 데려다 강제로 베일을 쓰게 했으니 약탈이 맞지.”

“……그분이 왜 결혼을 할 수 없었는데요?”

혹시 나랑 비슷한 이유인가? 궁금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이안은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입을 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과거사가 제법 흥미로운가 봐?”

“아, 아니. 그게.”

이안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어느새 몸이 앞으로 쏠려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무심한 낯으로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수지에 맞지 않아.”

“…….”

“그러니까 더 알고 싶다면 당신도 좀 더 쓸 만한 패를 꺼내.”

제 대답이 무척 쓸모가 없었나 봅니다. 그게 팩트인데 말이죠…….

난 알겠다고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그 정도라도 얘기해 줬다는 건, 적어도 그만큼은 절 믿고 있다는 거겠죠.”

그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더 신뢰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당신 말마따나, 우리는 결혼할 사이니까.”

“…….”

그가 날 빤히 쳐다보기에 나 역시 마주 눈을 맞춰 주었다. 내 대답에 거짓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며.

이윽고 그가 무어라 입술을 떼려던 찰나, 매끈한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전하?”

그가 가슴팍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윽…….”

“전하, 전하 괜찮아요?”

난 얼른 그를 살폈다.

“전하…… 이안!”

“……끄러워.”

“기다려요. 마부한테 의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할게요.”

마차 앞좌석으로 고개를 내밀려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그가 고통으로 얼룩진 눈을 들었다.

“가지 마.”

“…….”

“알아서…… 진정될 테니까.”

“하지만.”

“괜찮……다고.”

나는 결국 마차를 돌리는 걸 포기하고, 그가 앉은 의자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안색은 시퍼렇고 호흡은 불규칙하다. 당장에라도 심장이 멎을 것처럼 헐떡거리는데 이걸 그냥 두는 게 맞을까.

내가 못 참고 마부를 부르기 직전, 그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하아…….”

어느새 이성을 되찾은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투명한 얼음처럼 맑은 눈이었다.

“괜찮아요?”

그가 이마 아래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서 궁상맞게 뭐 하는 거지? 자리로 돌아가.”

“걱정해 줘도 뭐라 하네.”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그 순간 마차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크게 들썩였고.

“으악!”

무게 중심이 무너졌다.

내가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지자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

“…….”

뭔가 단단한 것이 이마에 닿았다.

가슴이 넓으시네요. 아니, 죄송합니다.

다소 민망한 자세로 굳어 있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쿵!

“악!”

그러다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씨 창피하게.’

또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겠지.

난 울상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마에 혹 난 것 같은데.’

평소라면 한 번쯤 비아냥거렸을 남자는 웬일로 조용했다.

민망함에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어쩐지 스쳐 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난 착각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안 카히텐이라는 미래의 흑막이 여자와 제대로 손 한번 잡아 보지 않은 숙맥일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 *

‘이안 카히텐, 어디 아픈가?’

침대에 누워서 나는 오늘 마차에서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원작에서 흑막이 아프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완벽했고, 이성적이었다. 그의 유일한 패착이자 폭주는 엔딩 직전에 사술을 행한 것뿐이었다.

‘흑막도 사람이니까 물론 살면서 한두 번쯤 아플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의 그는 보통 병을 앓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심장 마비로 죽어 버릴 것처럼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그런 데 비해 너무나도 태연하게 사람을 거부하는 태도.

한두 번 앓은 병이 아니다.

그 정도면 지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병…….

흑막이 지병을 앓고 있었다.

‘만약 불치병, 이라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어둠의 수법에 충분히 손길을 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우선인 남자니까.

계기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가 행한 사술은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세계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가 파괴된다면 흑막도 안전하지는 않을 텐데, 왜 굳이 그런 무의미한 짓을 벌인 걸까.

사술의 목적과 그의 계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아프니까 그냥 다 같이 손잡고 뒈지자, 이런 막 나가는 의도였나?’

나는 허공으로 손사랫짓을 쳤다.

이안을 직접 보기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는 그런 가정을 염두에 둘 수가 없었다.

이안 카히텐은 이성적인 사람이다.

나는 이제 원작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한 걸음 벗어나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성적이며, 냉정하다.

필요하다면 살생도 가차 없이 저지를 사람이긴 하지만, 무의미한 살인극을 벌이는 테러리스트는 아니었다.

‘지병은 사술의 원인이 아닌 건가…….’

애써 얻어낸 정보지만 연결점이 없어서 폐기 직전이었다.

나는 일단 이안의 병에 대한 건을 보류해 두고 그의 가족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흑막의 친모는 일찍이 병사했고, 친부는 그가 열여덟이 되던 해 죽었다.

이게 원작에서 나온 그의 가족사였다.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봐도 뭔가 사연이 있는 흑막 같지만, 그 사연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일은 없었다.

소설은 극초반을 제외하고는 이안의 시점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빙의한 시점이 그와의 결혼 직전. 이안이 열여덟일 때다. 그때 이안은 막 아버지가 죽고 작위를 계승한 시점이었어.’

이안이 작위를 계승한 나이는 평균보다 일렀다. 새파랗게 어린 십 대였기에 브링스턴 후작이 결혼을 밀어붙일 수 있었겠지.

지금 브링스턴 후작가는 이안에게 끌려 다니고 있다. 누가 봐도 이쪽이 ‘을’이고, 이안이 ‘갑’이다.

이렇게까지 전세가 역전될 수 있었던 데는 대공이라는 작위보다도, 카히텐의 성력을 물려받은 그 자신의 위상이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안은 카히텐의 현신이라고 불렸다.

‘소멸한 신의 현신이라. 북부의 희망이나 다름없었겠어.’

북부의 신 카히텐은 100년 전에 소멸했다.

물론 신이란 그 실체가 추상적이기에 그가 실제로 소멸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어떠한 계기를 기점으로 소멸했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100년 전 어느 날, 카히텐의 사제와 종자 드워프들이 일시에 성력을 상실했다.

카히텐 대공가도 마찬가지였다.

카히텐의 후손을 자칭하며 막강한 성력을 기반으로 권력의 중심에 섰던 카히텐 대공가는 이후로 단 한 명도 성력이 있는 아이를 배출하지 못했다.

북부는 그렇게 버려진 땅이 되었다.

그곳에서 100년 만에 태어난 성력을 가진 존재. 북부의 기적. 북부의 희망.

이안 카히텐.

그런 남자라면 신이 현신했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냥 인간이지만.’

신이 장미꽃 아흔아홉 송이를 들고 고백을 갈기러 오거나,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안은 모두의 동경과 칭송을 받으며 자랐다. 이건 북부 사람들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의 유일한 결핍은 모친이 일찍이 죽어 타인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뿐이다.

그 결핍이 원작에서는 깊게 서술되지 않았고.

오늘에서야 그의 친모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정략도 아닌, 약탈에 가까운 혼인.’

그렇게 말한 이유는 ‘본래 누구와도 혼인할 수 없는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정략혼보다 더하다는 듯이 얘기한 걸 보면 단순히 상대의 의사가 없는 결혼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고.’

병이 있었나? 아니면, 유부녀였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일반적으로 볼 때 절대 혼인을 생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거나?”

앞선 예시 말고 그런 게 또 뭐가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 * *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레티시아가 이안을 따라나서고 체이트가 제스에게 일방적 계약을 건 그날.

로체는 체이트의 행동에 속으로 기함했다.

카히텐 대공의 측근을 협박하다니, 간도 크지.

“너 진짜 레아 양 일이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구나.”

체이트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울컥한 로체가 구시렁거렸다.

“이해가 안 되네. 어차피 대신전의 사제들은 혼인도 못 하잖아?”

일반 사원의 사제는 절차가 몹시 까다롭긴 하지만 신전의 허락하에 파계 후 혼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위 사제와 주교, 성녀는 신과 결혼한 것으로 간주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혼인할 수 없다.

신에게 영원히 버려질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은.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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