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직위라면 언제든 버릴 수 있어.”
“너희 사제들은 파계하여 신의 노여움을 살 경우 성력을 잃을 수도 있다며?”
“상관없어.”
체이트는 그를 무감정하게 일별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저 녀석은 정말 남부로 돌아갈 작정인가.
“야, 그럼 굳이 정리할 거 있냐? 어차피 네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아무도 널 안 건드릴걸.”
체이트와 레티시아의 기묘한 관계를 오랜 시간 지켜봐 온 로체는 그가 스스로 원해서 대주교직에 오른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레아 양에게 잘 보이려다가 너무 멀리 가 버린 거겠지.’
저놈은 본인 능력치를 생각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재능이 미쳤는데 남들만큼 노력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나.
적어도 상대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에서 멈췄어야지.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는 게 대체로 송곳이 원해서 튀어나오는 경우는 없단 말이야. 그냥 주머니가 뚫리는 거지.
“잔소리 작작 하고 당신 갈 길 가.”
체이트가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니까.”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이기도 하지.”
다 내려놓고 심심하게 살자고 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체이트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나는 끝내야 해.”
그의 선홍색 눈이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닿았다.
“뒤를 깔끔하게 정리해야, 레티시아에게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체이트는 습격이 있던 날을 회상했다. 당연히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의 기습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고작 암살이 그 정도로 요란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게까지 타인의 이목을 끌어가며 상대를 공격할 가치가 있었느냐는 말이다.
신전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체이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새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자신만을 노린 공격이 아니었다.’
물론 주 타깃은 자신이었지만, 하나쯤 더 죽으면 이득인 상황이었다면.
그렇다면 광역으로 시도한 첫 공격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이 가설이 정답일 경우 부수적으로 해를 입을 수 있었던 상대는 두 명.
제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이 엘프와 레티시아였다.
이쪽 엘프가 그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레티시아에게 위험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지만, 그 가능성조차 남겨둘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안위를 지켜야 했다. 아니, 지킬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일을 정리할 때까지 그녀를 안전한 장소에 두고 비호해야 했다.
애석하게도 제 곁은 가장 위험하다. 그녀 혼자 이곳에 머물게 두는 것 또한 안심할 수 없다.
결국 모든 조건이 부합하는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카히텐 성.
이안 카히텐의 곁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안전하다. 다른 건 몰라도 권력과 능력만은 출중한 사내니까.
하지만…….
“……야, 너 이마에 핏줄 솟았어. 혈압 안녕하냐?”
감정은 통제가 안 된다.
마음 같아서는 카히텐 대공의 마차를 멈춰 세우고 당장에 레티시아를 데려오고 싶다.
안전이고 뭐고 제 손아귀 안에 가둬두고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평생을…….
“너, 눈깔도 이상한데. 정신은 안녕하고?”
로체가 그의 눈앞에서 알짱거리며 손바닥을 휘휘 내저었다. 체이트는 그 손을 잡아 던져 버렸다.
“치워.”
“입은 멀쩡하네.”
“좀 꺼지고.”
“아니, 안 멀쩡하네.”
저 주둥이는 원래 멀쩡한 적이 없었지……. 로체가 세상 말세라며 중얼거렸다.
체이트는 그를 무시하고 바닥을 신발로 대충 비벼 평평하게 했다. 레티시아 외에 챙길 건 딱히 없으니 여기서 바로 떠나도 괜찮겠지.
신성을 펼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아가 봤자 저 노인네가 지겹게 따라붙을 게 뻔하고.
체이트는 고른 흙바닥에 둥근 원을 그리고 아르키드네의 고대어를 적어 내려갔다.
로체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오, 너 진짜 천재긴 천재구나. 워프를 다 쓰고.”
체이트가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북부 산골에 틀어박혀 사는 엘프가 이게 뭔지 안다고?
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뒀다. 저자에게는 호기심을 갖는 것도 사치다.
“이거 한 번 쓰면 신성력이 바닥을 칠 텐데. 혼자 괜찮겠냐?”
로체가 계속 옆에서 조잘거렸다. 무슨 딱따구리도 아니고.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이겠군.’
체이트는 손을 더 부지런히 놀려 워프를 위한 주문을 적었다.
다 적자마자 그 위로 올라가 성력을 방출했다. 신성이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하얀빛을 내뿜었다.
“어, 야!”
로체의 외침이 점차 멀어졌다.
…….
…….
“……아.”
도착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뜨끈한 열기가 피부로 와닿았다.
남부, 아르키드네 대신전 앞이었다.
이제 신전에 가서 귀환을 알리고 바로 할 일에 착수해야 한다.
‘시간이 없어. 어서 들어가야…….’
“어우.”
등 뒤에서 불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되게 어지럽다. 나 토할 것 같아.”
“……뭐지?”
로체가 얼이 빠진 체이트를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아니, 나는 장난 좀 치려고 했지.”
“뭐?”
“금 밟았어.”
“…….”
원이 망가지면 워프가 취소되는 줄 알았다. 그간 쌓인 것도 많았기에 작은 복수 한번 해 볼 심산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아하하.
체이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로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등 돌려 신전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로체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야, 나 빈손인데 버릴 건 아니지? 응? 차비는 챙겨줄 거지?”
실수했다.
아무리 귀찮아도 저건 떼어놓고 이동했어야 하는 건데.
* * *
체이트의 실종을 매번 외출로 퉁치고 있던 사제들은 그의 등장에 눈물을 흘렸다.
“평생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뻔하기도 했지.
애당초 대주교직 자체에 미련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이 직위를 적당한 거래의 수단으로 써서 레티시아와 함께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려고 했었다.
누구는 앉고 싶어도 못 앉는 자리를 발판 취급했다고 하면 수많은 주교가 뒤로 넘어가겠지만, 체이트로선 알 바 아닌 일이다.
“카히텐 대공이 왔다 갔다던데.”
체이트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 그리 물었다.
“예, 대주교님이 부재하신 걸 알고 순순히 돌아갔습니다.”
순순히……? 체이트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눌러 참고 대꾸했다.
“공증이 필요하다지? 놓고 간 문서가 있겠지. 가져와.”
마음 같아서는 승인이고 뭐고 그 남자에게 도움 되는 건 한 톨도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레티시아가 있었다.
‘곁…….’
빠직.
“펜이 약했나 보네요. 여기 새것입니다.”
그 남자가 레티시아에게 해를 가할 만한 요소를 제 손으로 만들 수는 없다.
지금은 그의 부탁을 잠자코 들어주는 게…….
빠직.
“또 부러졌습니까? 공급처를 바꿔야 할는지 원.”
체이트는 힘겹게 서명을 마쳤다. 옆에 있던 어린 사제가 문서를 받아 들었다.
“그럼 이건 제가 위에 전달…… 어라.”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주교님, 글자를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평생 신전에서 나고 자란 순수한 영혼이 해맑게 물었다.
“XX가 무슨 뜻입니까?”
* * *
우여곡절 끝에 공증을 마친 후, 체이트는 남부 부속의 안타카스 신전을 찾아갔다.
안타카스 주교가 딱딱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대주교님,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 얘기 좀 하죠.”
둘은 접대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기도실에서 마주 앉았다.
“대주교님께서 저를 먼저 찾으시다니 의외로군요.”
말씨는 공손했지만 그의 표정에서 은은한 악의가 느껴졌다.
“제가 대신전을 나섰을 때.”
체이트가 입을 열었다.
“불시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안타카스 주교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러셨습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애석하게도 멀쩡합니다.”
안타카스 주교는 눈을 내리깔았다.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소행이 아니니 다른 주교 중 누군가의 소행일 텐데, 대체 누가 먼저 선수를 친 것인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자객들은 성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신성이 느껴지는 공격은 최초의 한 번뿐이었죠. 아마도 성력을 응축한 화구(火球)인 듯하던데.”
“하면…….”
“예, 자객들은 모두 성력이 없는 일반인이었습니다.”
신전 세력이 일을 벌였다면 구태여 체이트를 상대로 성력을 아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날 습격한 이들은 모두 신성과 무관한 일반인이었다는 뜻이다.
“본인은 성력을 쓸 수 있는데 본인이 부리는 이들에게는 그 힘을 물려줄 수 없는 집단.”
“…….”
“뭔가 유추되는 바가 없으십니까?”
북부의 경우 이안 카히텐 외에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남부의 아르키드네는 혈통에 따라 힘을 배분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에게 아낌없이 성력을 내어주는 자애로운 신이고.
소거법으로 배제해 가다 보면 서서히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헬리아스. 오로지 자신의 후손에게만 배타적으로 힘을 전수하는 무자비한 신.
그의 후손, 헬리아스 황가의 누군가가 체이트를 공격한 것이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안타카스 주교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반면 이 모든 사태를 파악한 체이트는 평온했다.
“신전과 황실은 오랜 시간 동맹을 맺어 왔죠.”
둘의 힘이 비등했기에 무의미한 소모전을 피하려고 이뤄진 동맹이었다.
“누군가가 장기간 이어진 유대를 끊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주교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안타카스 주교가 말을 멈췄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황태자가 없는 현재, 아르키드네의 대주교를 음해하려고 시도할 만한 담력과 권력이 있는 인물은 실상 한 명뿐이다.
‘헬리아스 황제.’
“이 얘기를 당신에게 가장 먼저 전하는 건 당신이 나를 제일 적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절대로 그런…….”
“부정할 필요 없습니다. 딱히 상관없으니까. 다만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건 질색이라, 다른 주교들께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체이트가 상체를 숙여 그와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거실에서 전쟁놀이할 시기는 지났다고.”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