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체이트는 안타카스 주교로부터 황권과 싸우기 위한 내부적 단합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는 다른 주교들에게 사태를 알리고 전쟁을 대비하겠다고 했다.
일차적으로 내부를 정돈했으니 이제 대외적인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수도로 가야겠군.’
장거리 워프로 성력이 많이 떨어졌다. 수도까지 가는 길은 기차나 마편을 이용해야 했다.
몸만 달랑 온 처음과 달리 절차를 밟기 위해 대신전으로 돌아가려는데, 입구에서 누군가가 체이트를 붙잡았다.
“나 좀…….”
“…….”
“나 좀 데려가아…….”
거머리였다.
아니, 거머리 로체였다.
“그러게 왜 따라와서는.”
“금만 밟았다니까!”
로체가 울상을 지었다.
“진짜 살짝 밟았는데! 대체 왜 흙바닥 낙서가 성능이 좋은 건데…….”
지긋지긋하다. 체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많이 안 바랄게. 차표 살 돈만 줘. 응?”
그냥 쥐여 주고 보내 버릴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더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아, 돈이라면 주지.”
“정말?”
“대신 그 값을 해.”
“응?”
“일하라고.”
성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주교급의 성력을 가진 상대를 만나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물론 자신이 질 리는 없겠지만, 괜한 부상으로 일정이 늦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원흉을 밝히고 레티시아의 안전을 확보해서 그녀 곁으로 가야 했다.
“호위, 해 본 적 있나?”
* * *
모 일 모 시 모 분.
요안나는 수취인 불명의 봉투를 하나 받았다.
안에는 카히텐령에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미남 연극배우의 초상화와 왕복 기차표, 그리고 짤막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요안나 양, 좋은 거 보러 올래요?
요안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레티시아 님!’
그녀는 레티시아가 이안의 약혼자라는 걸 알게 된 시점부터 그녀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물론 마음속으로도.
카히텐은 드워프의 유일한 주인이다. 이안은 제 주인의 현신. 요안나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충직함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레티시아가 말없이 떠났지만 조금의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외부에 그녀의 정체를 발설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그녀가 이안의 약혼녀이기 때문이었다.
요안나는 신이 나서 짐 가방을 챙겼다.
꿀벌 모양 배낭에 빵과 과자, 음료수를 알차게 챙겨 넣고 마무리로 구급상자까지 넣은 그녀가 배낭을 야무지게 메고 문을 나섰다.
‘지금 갈게요, 레티시아 님! 카히텐 님!’
* * *
나는 요즘 심심했다.
얼마나 심심했느냐 하면 케이시 양과 원 카드를 하다가 질려서 포커를 배울 만큼 심심했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아가씨, 그건 그냥 플러시예요.”
“이쪽이 더 간지 나잖아.”
“그건 그렇죠.”
이후로 우리는 모든 패에 로열을 붙였다.
“로열 풀 하우스!”
“로열 포 카드!”
“로열 잡패!”
카드놀이에 열중하면 누가 들어와도 모른다. 뭔가가 걸려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이겼다! 자, 어서 내가 5분 동안 푹 고아 내린 로열 커피를 원샷 해 보시지!”
“크읏, 아가씨! 제 로열 밀크 티로는 안 될까요?”
“어림없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나는 문으로 들어온 남자를 향해 승리의 클로버 에이를 내밀었다.
“와, 내 로열 약혼자!”
“……로열?”
아, 저쪽은 이런 미사여구가 필요가 없지, 참.
이안은 원래 로열이었다.
“포커 칠래요?”
“아니.”
“그럼 차라도 한 잔?”
“됐어.”
“커피는?”
“요즘은 파혼 통보를 그런 식으로 하나?”
“…….”
말 서운하게 하네.
조금 의기소침해진 난 카드를 내려놓고 구시렁거렸다.
“할 일이 없어요.”
“그래 보여. 대낮부터 도박이나 하고 있으니.”
“돈을 안 걸었는데 무슨 도박이에요.”
“대신 목숨을 걸고 있잖아.”
내 커피는 이제 완전히 사약 취급하기로 결정한 건가.
“우리 결혼 준비 안 하나요?”
“준비는 이미 하고 있어.”
“예? 난 못 들었는데?”
“그야 당신이 손쓸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스드메가 원래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끝나는 거였나.
아닌데…… 그거 오래 걸리던데…….
‘내 의사는 진짜 안중에도 없구나.’
드레스 고를 권한도 안 주다니.
하지만 대거리를 하기엔 그간 해 온 짓들이 양심에 걸려서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다른 취미를 가져 봐. 카드놀이보다 유익하고 가치 있는 취미는 얼마든지 있잖아.”
유익하고 가치 있는…….
“……부X마블?”
“뭐야, 그건.”
“있어요, 달나라 가려다 서울에서 파산하는 게임.”
“그게…… 어디가 유익하지?”
“부동산 투자의 쓴맛을 간접 체험할 수 있죠. 영혼 끌어다 집 사면 망하기 십상이라는 것도요.”
“나쁘지 않군. 하지만 당신이 알 필요는 없는 개념이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지만, 말해 봐야 안 믿을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떤 게 제게 유익하고 가치 있는 취미일 것 같은데요?”
이안은 보기 드물게 고민에 빠졌다. 막상 던져 놓고 보니 여자들이 평소에 뭘 하는지 잘 몰라서 말문이 막힌 게 분명하다.
“내 어머니께 물어봐라.”
그는 그렇게 말을 뭉뚱그리고는 하고 방을 나섰다.
뭐야, 그럴 거면 왜 딴지 걸었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로열 로열 같으니.
‘카드도 슬슬 신물이 나긴 했지.’
다음날 나는 카히텐 대부인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대부인은 십 년을 천하게 살아온 네게 어울리는 취미를 내가 알 것 같으냐며 열을 올리다가 체스판을 들고 왔다.
룰을 모른다고 하니 또 너는 어릴 때 가정교사랑 이거 안 하고 뭐 했냐고 성을 내시기에, 체스판 위에 동전 열 개를 놓고 알까기를 알려 드렸다.
이런 거 했습니다.
“……재밌네?”
내 동전을 바닥으로 툭툭 쳐 내며 대부인이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왜 재밌지?”
“원래 단순한 게 재밌는 법이죠.”
“한 판 더해.”
“예이.”
대부인과 밤이 다 되도록 알까기를 했다. 까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분이라 그런지 나중에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대부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내게 로열 취미를 하나 알려 주었다.
“연극이라.”
난 카히텐 대부인이 추천한 연극의 팸플릿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우리 황자님이 악역이라니요>
어디서 많이 본 제목이다.
내용도 어디서 많이 본 그 느낌에 그 맛이었다.
사생아 황자님의 담당 시녀였던 여자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잘못 키워서 미친 집착남으로 흑화시키는 이야기.
결국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이긴 하다.
뻔하긴 하지만…… 엔딩이 몹시 마음에 드는걸.
“한번 봐 볼까?”
하지만 연극은 혼자 보면 좀 심심하지. 끝나고 함께 평론가에 빙의할 친구 한 명쯤 있는 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좋다.
“케이시 양, 연극 볼래?”
“죄송해요, 아가씨. 저 연극은 안 좋아해요.”
까였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까.
는 무슨 내가 카히텐 성에서 막역하게 지내는 건 케이시 양뿐이다.
제스는 항상 바쁘고 이안은 당연히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니까 물어볼 가치도 없고.
‘혼자 봐야 하나…….’
그 순간, 불현듯 이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드워프라면 내가 영지로 불러주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작별 인사를 못했다고 서운해할 때.
‘마침 남자 배우도 잘생겼고, 재회 기념 데이트로 딱이잖아!’
나는 신이 나서 이안에게 달려갔다.
“요안나 양을 성으로 불러도 될까요?”
“그게 누구지?”
그새 잊었구나.
“저랑 친하게 지냈던 드워프 의사 선생님이요.”
“아, 그 여자.”
이안은 별 고민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마음대로 해.”
“아싸!”
신이 난 나는 방으로 돌아가 곧장 요안나 양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간단한 얘기니 통신구로 하면 편하겠지만 거리가 멀어서 어차피 안 터지겠지.
기차표는 초대하는 사람의 예의고, 남자 배우 초상화는 혹시 모르니까 소환용으로 무조건 같이 넣자.
마지막으로 인봉을 하면…….
“끝!”
하인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보낸 나는 룰루랄라 신나는 마음으로 요안나 양을 기다렸다.
아, 카히텐 대부인이 오늘따라 유난히 내 눈에 자주 보였는데 기분 탓이겠지.
* * *
요안나 양은 나흘도 채 안 되어 카히텐령에 찾아왔다.
기차 정말 빠르구나. 그걸 놔두고 마차로 며칠이 걸려서 여기까지 왔다니 정말 화나네.
“요안나 양!”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서 기차역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던 나는 기차가 서자마자 얼른 문 쪽으로 달려갔다.
북부의 주도나 다름없어서 그런지 인파가 엄청 많이 몰렸다.
“요안나 양은 어디 있지?”
나는 케이시 양과 함께 요안나 양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오늘 온다던 요안나 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몰린 인파 위로 뭔가가 쑥 튀어나왔다.
꿀벌이었다.
오동통하고 작은 손이 고도비만 꿀벌을 깃발처럼 들고 흔들었다.
“가자, 케이시 양. 저기 꿀벌이 구애의 춤을 추고 있어.”
“어디…… 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 틈새에서 꿀벌과 요안나 양을 쑥 뽑아낸 케이시 양이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를 붙잡아 들고 달려왔다.
“아가씨, 여기 찾으시던 거요!”
요안나 양은 분실물이 아닌데…….
“괜찮아요, 요안나 양?”
“그어어어어…….”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초점이 나간 걸 보면 대충 물건에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