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난 방전된 요안나 양을 충전하기 위해 우선 초코바를 입에 물렸다.
넋은 나가 있었지만 아기가 분유 병 물듯이 본능적으로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요안나 양이 곧 정신을 차렸다.
“레, 레티시아 님?”
“정신이 들어요?”
“으허엉, 레티시아 님!”
기차에서 맺힌 게 많은 듯했다.
“다들…… 훌쩍, 드워프에 대한 배려심이 눈곱만치도 없어요!”
요안나 양이 꿀벌 배를 가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훌쩍…… 근데 미남 배우는 언제 볼 수 있나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성에 가서 쉬고 내일 보자고 했다.
요안나 양, 입은 공손해졌어도 마음만은 여전한 걸 보니 참 보기 좋다.
* * *
요안나 양은 카히텐 성에 들어오자마자 언제 힘들었냐는 듯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이곳이로군요. 카히텐 님이 나고 자란 곳…….”
그녀는 나를 ‘레티시아 님’이라고 부르면서 이안은 ‘이안 님’이 아니라 ‘카히텐 님’이라고 불렀다.
정말 그를 카히텐 신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장엄하네요.”
“그쵸.”
나도 처음에 보고 놀랐다.
바티칸의 천장화를 연상하게 하는 중앙 홀의 프레스코화는 정말 바닥에 붙어 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위압적이다.
케이시 양이 요안나 양에게 카히텐 성을 구경시켜 주었다. 아직도 길을 잘 못 외운 나 역시 어부지리로 따라다니며 내부 구조를 외웠다.
이후 요안나 양은 이안과 마주치고 혼자 5분을 절하는 자세로 있다가 이안이 오래전에 떠났다는 걸 알고 머쓱하게 일어났다.
1박 2일의 짧은 만남을 알차게 쓰기 위해 우리는 밤에도 함께 잤다.
자기 전에 케이시 양을 불러서 셋이서 포커를 쳤는데 요안나 양이 완승했다.
의사가 아니라 다른 걸 했으면 지금쯤 갑부일 것 같은데/,/ 생각 없이 칭찬하면 진짜 전업할 것 같으니까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다음 날 우리는 연극을 보러 갔다. 요안나 양은 연극 내내 에이스 한 명만 전담 마크하는 수비수처럼 잘생긴 남자 배우 하나만을 바라봤고, 난 그런 요안나 양이 웃겨서 그녀를 구경했다.
끝나고는 눈치 없는 여자주인공과 혼자 Z까지 달려 버린 남자 주인공 중 누가 더 유죄인지를 논하며 차를 마셨다.
좋았던 시절의 좋은 친구를 다시 만나는 건 정말 꿈만 같았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새 우리는 헤어질 때가 되었고 나는 울면서 요안나 양을 배웅했다. 이제 가면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다른 마을 사람들은 볼 수 있을까. 그립다. 흑흑.
요안나 양을 배웅하고 /역에서 케이시 양을 만난 후/<수정> 성으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
“야옹.”
잘못 들었나.
“야오오오옹!”
자기주장이 강한 고양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발에 하얀 장화를 신은 치즈냥이였다.
“와, 귀엽네요.”
케이시 양이 고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냥.”
무시당했다.
케이시 양에게서 고개를 홱 돌린 녀석이 내게 쪼르르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야옹, 야옹.”
“고양이 주제에 줄 댈 곳이 어딘지 아나 봐요.”
케이시 양이 뾰로통해졌다.
“사람인 거 아냐?”
“네? 고양이가요?”
“아닌가…….”
사람으로 변하는 고양이를 한번 겪어 봐서 그런가. 비슷한 상황에 놓이니 의심부터 든다.
난 쭈그려 앉아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10초 내로 사람으로 변하면 10만 리스 줄게.”
“……야옹?”
“응, 사람 아니네.”
얜 진짜 고양이가 맞는 것 같다.
“확인했으니 네 갈 길 가렴.”
“미야옹……!”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마차로 갈 때까지 고양이는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그렇구나. 진짜 고양이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하긴, 종이 다른데.
“아가씨, 제 손 잡으세요.”
케이시 양에 마차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으음…….”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좋아, 돌아가자.”
* * *
내가 고양이를 주워오자 이안은 한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그 흉물은.”
너무해. 이렇게 귀여운 게 흉물이라니.
“얘 제가 키우면 안 될까요……?”
분명 안 된다고 하겠지. 거절당하면 하인들이랑 기사들한테 물어봐서 주인 만들어 줘야지.
“당신 동물을 좋아했었나?”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내 품속에 쏙 파묻힌 고양이를 개미 관찰하듯 노려보았다.
“딱히 닮은 구석도 없고…….”
“……?”
“좋아, 당신 원하는 대로 해.”
“정말요?”
난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고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그가 날 보며 말했다.
“당신, 여태 본 중 제일 환하게 웃는군.”
“제가 그랬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뒤돌아 집무실로 걸어갔다. 열이 있는지 귀 뒤가 조금 붉었다.
나는 고양이를 데려다 케이시 양과 함께 씻기고 내 방 침대 옆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곳이 제 새로운 보금자리라는 걸 알았는지 녀석은 빠르게 적응했다.
골골거리며 자는 모습을 밤새워 지켜보다가 나 역시 잠이 들었다.
그날은 그리운 고양이 꿈을 꾸었다.
* * *
다시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서, 기차 일등석 개인실 한편.
흑발의 남자가 눈을 감고 등받이가 긴 좌석을 전세 내어 누워 있었다. 소매와 옷깃이 헐렁한 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언뜻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영혼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중이었다.
일전 여인에게 붙여 놓은 신성은 여전히 북부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종종 이렇게 여인이 처한 상황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위급상황에 대한 기준치가 매우 낮은 녀석들이라, 가끔 크게 위험하지 않은 상황까지도 전달하고는 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레티시아와 함께 연극을 보고 연극의 절정 부분에서 과몰입을 한 나머지 흥분해서 이야기가 전달되었다.
레티시아의 감각과도 어느 정도 연결이 돼 있다 보니 그녀가 연극 내의 위기 상황을 긴박하게 받아들여서 생긴 일이었다.
그 탓에 체이트는 연극의 일부 내용과 뒤풀이에 레티시아가 흥분에 차서 한 이야기들을 일부 전해 들었다.
‘글쎄 황태자가 너무한 거라니까요? 시녀는 어디까지나 의도가 선했잖아요.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인 건 황태자 아니에요?’
‘어머, 레티시아 님. 아니에요. 시녀도 잘못이 있죠. 황태자가 초반부터 그렇게 눈이 휙 돌아서 플러팅을 숨 쉬듯 했는데 죄다 튕겨내는 것도 아무나 못 해요. 사람이 눈치가 있는데.’
‘초반부터 눈이 돌아있었다고요? 난 몰랐는데…….’
‘처음부터 돌아 있었어요. 제가 연극 내내 그 배우분만 쳐다본 거 아시죠? 제 집중력을 믿어 보세요. 확신할 수 있어요.’
시답잖은 이야기로 열성을 다해 토론하는 두 사람의 얘기를 전달받고 체이트가 코를 씰룩거렸다.
글쎄, 둘 다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쌍방 아닌가.’
다행히 여태까지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일은 없는 듯했다.
체이트가 안심하고 있을 즈음.
“야.”
미성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미미하게 찡그린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속눈썹이 촘촘하게 드리운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가며 루비 같은 눈동자가 위를 응시했다.
“꺼져, 늙은이.”
“이건 뭐 밥 먹으라고 깨워줘도 불만이야.”
그가 고양이처럼 손바닥으로 세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얼마나 왔지?”
“거의 다 왔어. 다음 역이 수도라고 하니 식사를 끝내면 곧 도착하겠지.”
그 말에 체이트는 도로 자리에 누웠다.
“그럼 거를래.”
“최고급 풀 옵션으로 예약해 놓고 전부 거르겠다고? 너 식욕이란 게 있긴 하냐?”
“잔소리할 시간에 커튼이나 좀 치지?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
태양신 헬리아스의 영역인 중부는 수도에 가까울수록 하늘이 밝았다.
해가 뜨고 지는 건 다른 지역과 똑같은데, 황궁이 해처럼 번쩍거리며 주기적으로 빛을 뿜었다.
일종의 화이트 아웃이었다.
이 시기의 수도 중심은 온통 새하얀 빛무리로 가득하게 된다. 수도에 가까운 지역들도 일시적으로 밤을 잊을 정도의 일광에 사로잡혔다.
잠이 많은 편인 체이트로서는 상극인 지역이었다.
“진짜 밥 안 먹어?”
“커튼.”
“…….”
로체는 입술을 비죽이며 개인실의 커튼을 쳤다. 실내가 조금 어둑해졌다.
로체가 혼자 밥을 먹으러 식당 칸으로 이동하고 개인실에는 체이트만 남아 있었다.
한층 고요해진 실내에 만족하며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신성의 속살거림이 영상처럼 망막 안에서 재생되었다.
레티시아가 웃고, 떠들고, 돌아다닌다.
체이트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제 세상에 보이는 것이 온통 레티시아였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잠들지 않아도 기운이 났다.
곁에 있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 같다.
이윽고 신성의 이야기가 끝났다.
체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잘 코팅된 마호가니 천장과 덜커덩거릴 때마다 커튼 틈새로 흘러드는 빛이 번갈아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레티시아가 없었다.
체이트는 그늘진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