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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48화 (48/140)

48화

체이트가 수도에 당도했을 때 황궁의 광휘는 끝나 있었다.

인위적인 낮의 연장도 끝이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의외로 조용하네.”

기차에서 내린 로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다들 널 보러 올 줄 알았어.”

“그래서 그러고 있었던 건가?”

로체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보자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유아용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좀도둑 같은 모양새였다.

“나한테도 이런 식으로 주목받고 싶지 않은 사정이 있다고.”

“당신의 사정 같은 건 딱히 알고 싶지 않아.”

체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답게 인파가 꽤 많았다.

잘 포장된 거리 위로 사람들이 열을 맞춰 오갔고, 모두가 바쁘게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없는 듯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체이트는 대주교직을 승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대외 활동에 그다지 적극적인 편도 아니었으니까.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바뀌었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제 얼굴을 보고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일반인은 손에 꼽을 것이다.

남부에서는 대신전의 승계식을 참관했던 신도들이 이따금 그를 알아봤지만, 수도에서는 일부 귀족들만이 그 승계식에 참여했다. 북부는 뭐, 거의 자유민 취급이었고.

게다가 이 외출은 비공식적이었다. 신전이 황실의 동태를 수상히 여긴 만큼, 그의 행적을 황실을 포함한 외부에 굳이 알릴 이유가 없었다.

“어디로 갈 셈이야?”

“황궁.”

그야말로 비공식적일 뿐, 그가 황실을 확인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난 또 고목의 매미 신세겠군.”

로체는 나름대로 호위에 충실했다.

“그럴 필요 없어.”

성력은 이동 중에 거의 회복되었다. 게다가 황궁은 헬리아스 황실 사람들이 대거 머무르는 공간인 만큼 강한 성력을 가진 이들이 군집해 있었다.

그 정도면 로체의 존재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체이트가 500리스 지폐 두 장을 꺼내 로체에게 건넸다.

“당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야. 원하는 대로 표값을 줄 테니 북부로 돌아가.”

“정말 제멋대로네. 내가 고운 피부까지 희생해 가며 야밤에 뜬눈으로 지켜 줬더니만.”

돈을 받아 든 로체가 금액을 보고 말을 정정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체이트가 코끝으로 짧은 웃음을 흘렸다.

“돌아가.”

그는 로체를 역에 버려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황궁 이전에 갈 곳이 있었다.

* * *

체이트는 고양이 모습으로 브링스턴 후작가의 타운하우스를 찾았다. 남부와 수도에서 고양이는 길한 동물이기에, 가까이 다가가면 누구든 음식과 하루 잘 곳을 마련해 주었다.

브링스턴 후작가도 마찬가지였다.

하녀가 그를 발견했고, 후작 부인의 명령으로 그는 어렵지 않게 후작가 내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후작가 내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십중팔구 레티시아의 귀환과 혼인 관련 가족회의겠지.

체이트는 말소리가 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몸집이 작아서 눈에 띄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조건에 그와 혼맥을 맺는 게 정말 이득이라고 보세요?”

레티시아의 여동생, 셀레나 브링스턴의 날카로운 음성이 천장을 찌를 듯했다.

체이트는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레티시아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어차피, 그녀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레티시아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마저도 연분홍인 레티시아와 달리 자주색에 가까운 진분홍색 머리였다.

“언니가 결혼을 하려면 진작 했어야 했어요.”

셀레나의 단호한 반대에 이어 브링스턴 후작의 우유부단한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셀레나, 카히텐 대공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때 잘 잡아 뒀어야죠. 지금은 카히텐 대공과 헬리아스 황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때가 아니에요.”

“…….”

체이트는 그들의 대화를 어느 정도 듣다가 걸음을 돌렸다.

이쪽은 예상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레티시아의 결혼을 유보하는 방향으로.

‘셀레나 브링스턴을 고른 건 옳은 선택이었군.’

신전에 기재된 주요 인사들의 인적 사항은 단순한 귀족 연감과 개념부터가 달랐다.

서고 내에 빽빽하게 차 있는 문서들은 신전 소속이 아닌 외부 세력을 파악하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정치 백과사전이었다.

체이트는 살아 있는 모든 귀족과 유력 인사들의 서류를 찾아 읽었다. 한번 읽으면 잊지 않으므로 기억을 되살려 현실에 적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브링스턴 후작가는 대대로 욕심이 많은 가문이다. 이미 꽤 높은 작위에 올라 넉넉한 부를 축적하고 있지만 항상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서 목이 마른 가문.

브링스턴 후작의 경우, 그 욕심이 지나쳐서 오히려 애매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문서에 기록된 투자 지표만 봐도 그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셀레나 브링스턴도 제 아비만큼이나 야심 가득한 여자였지만, 그녀는 객관성이 뛰어났다. 자기 위주로 사태를 보는 경향이 있지만 적어도 아비보다는 영리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일찍이 그들 관계와 성향을 파악한 체이트는 적절한 시기에 제스에게 셀레나 브링스턴을 이용할 방도를 알려 주었다.

그가 제 말대로 일을 처리했는지 보러 온 것인데, 다행히 그는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계약은 풀어 줘도 되겠어.’

하지만 아직 만료 기한이 되지 않았으니 혹시 모를 쓸모를 위해 한 달을 꽉 채울 때까지 유지하는 것도 좋겠지.

‘그럼 다음은…….’

수도에 온 진정한 목적, 황실을 살필 차례였다.

* * *

헬리아스 황실에는 광대한 유리 정원이 있었다.

사시사철 넉넉한 일조량을 채울 수 있는 황궁의 특성에 맞게 아름다운 꽃과 과실수로 조경된 정원은 천장과 벽을 감싼 유리가 반짝이면서 걸음마다 빛이 부서지는 듯했다.

“아름답지 않니?”

그 정원 아래에서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태양처럼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에 그와 어울리는 붉은 비단옷을 걸친, 화려한 남자였다.

그는 뒷짐을 지고 느린 걸음으로 정원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예, 폐하.”

“언제 보아도 아름답지.”

그의 가느다란 시선이 천장에 닿았다.

“언제 보아도 반짝이고.”

살짝 말려 올라간 입매가 한층 더 위로 솟았다.

“언제 보아도 눈부시지.”

밤이 없는 세상에서 사십 평생을 살아온 황제, 하르온 헬리아스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이 눈에 부셨기에, 황제는 눈을 크게 뜨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항상 졸린 듯한 얼굴에 눈동자는 어디로 향하는지 보이지도 않았으며, 황제라고 하기 민망할 만큼 맹하고 어리숙해 보였다.

“너 그거 아니?”

나긋나긋한 말투도 그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 공헌했으리라.

“말씀하십시오, 폐하.”

“내 약혼녀 집안에 경사가 났더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실종되었던 장녀가 살아 돌아왔다는데 경사가 아니면 뭐겠니.”

“그렇군요.”

“듣자 하니 그 아이 배필이 이안이었다는데.”

“카히텐 대공 전하와 혼약한 사이셨군요.”

시종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황제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도 눈치채고 있었으나 어느 쪽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종은 그에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존재지, 무언가를 제공하거나 반문하는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북부는 춥잖니. 내가 걱정을 많이 했지. 여자애가 추운 데 시집가서 몸이라도 허해지면 어떡해? 픽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내 약혼녀는 무려 십 년 만에 만난 언니인데 저승에서 다시 보는 날까지 영영 이별인 거잖니?”

그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너무 슬플 것 같지 뭐니.”

“역시 사려 깊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말이야.”

황제가 검지를 치켜들고 해맑게 웃었다.

“내 약혼녀가 언니의 혼인에 그리 부정적일 줄은 내가 또 몰랐던 거야! 그렇지, 음, 음. 내 약혼녀는 착한 아이거든. 그리 착한 아이가 언니 생각을 안 할 리가 없지.”

그가 화사하게 핀 분홍 장미 화단 앞에 섰다.

“참으로 다행이지 뭐야.”

그가 분홍 장미의 꽃잎을 어린애처럼 대중없이 만지며 가지고 놀았다.

“내가 나서기 전에 끝났으니 말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툭, 장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아까워라.”

그의 말에 시종이 얼른 떨어진 장미를 손수 주워 흙을 털어냈다.

황제가 말했다.

“꽃차는 풍미는 부실해도 보기에 어여쁘지. 오후 티타임에 찻잔 위에 띄워 놓으렴.”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이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장미를 한 번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도 사달이 있었던데.”

그가 물었다.

“아르키드네 대신전의 주인이 돌아왔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가 끌끌 혀를 찼다.

“어린아이가 과분한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그 무게가 오죽했겠어. 그 마음, 내가 누구보다 잘 이해하지.”

그가 혼자서 고개를 주억이고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어떡하니. 내가 도와주어야지.”

시종이 머리를 조아렸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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