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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49화 (49/140)

49화

“아니, 이게 누구요! 아르키드네 대주교께서 어찌 여기까지 오셨소?”

황제는 체이트의 예고 없는 방문에 입을 벌리고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눈은 반쯤 감긴 상태였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잘생겼구려. 꼭 내 젊은 시절 같아, 껄껄.”

그가 너스레를 떨며 체이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체이트는 그와 주변 기사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황궁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황궁은 온통 황금, 황금, 황금뿐이었다. 황금을 펴 바른 것도 모자라 아예 가져다 붙인 수준으로 사방이 번쩍거렸다.

‘이러니 눈을 못 뜨고 다니지.’

체이트가 양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황제가 ‘이리로 오시오.’ 하고 돌아보자 그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레티시아의 곁에서 얌전한 고양이인 척 내숭 떨고 살아온 세월이 이런 식으로 종종 도움이 됐다.

응접실에 시종장과 시녀들이 금세 자리를 마련했다.

황제와 체이트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체이트가 그를 기다리자, 황제가 씩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저 평범한 홍차일 뿐이요. 아, 오늘은 특별히 꽃잎을 얹었지. 어여쁘지 않소?”

“그렇군요.”

황제가 찻물을 입에 물자, 체이트도 그를 따라 차를 한 입 마셨다.

‘독은 없군.’

차라리 독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어차피 맹독에도 죽지 않는 몸을 가졌으니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제 몸을 미끼로 써먹겠나.

체이트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대주교께서 예까지 걸음하신 연유를 알고 싶은데.”

황제가 말했다.

“그저 격조했다는 말로 넘어갈 생각 마시오.”

“하하, 격조했다고 하기에도 워낙에 제가 나태한지라. 그런 식으로 방문을 하자면 대륙을 순회를 돌아도 모자랄 겁니다.”

그의 말에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지!”

황제가 손에 든 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선대 대주교께선 성실하셨지만 여간 꼬장꼬장한 분이 아니셨지. 이번엔 젊고 창창한 이가 좋은 자리에 앉은 것 같아 기쁘오. 어떻소, 우리 말벗이 되어 보지 않겠소?”

아무렇지 않게 망자의 험담을 입에 담는 황제의 얼굴은 태평해 보였다.

“사양하겠습니다. 곁에 있으면 목숨줄이 간당간당할 것 같아서.”

“…….”

그가 체이트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적이 많긴 하지!”

황제가 손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

“대주교께서도 내 적이 될 심산이오?”

훅 치고 들어온 공격에 체이트의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적이 되고 말고는 제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지요.”

“그렇지.”

황제가 종을 치고 시종을 불러 찻잔을 톡톡 쳤다. 시종이 금세 뜨거운 차를 가져왔다.

그가 김이 나는 차를 호호 식히고 말했다.

“내가 인복이 없어서, 주변이 불안증이 심해서 가끔 그렇게 선을 넘소.”

“선을 넘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 과거가 미상이지 않소? 그 와중에 독특하게도 북부로 걸음을 하질 않나.”

“…….”

“내 어머니께서 어찌나 불안에 떠시던지, 허튼짓을 저지르시는 것을 미처 막지도 못했소.”

체이트의 눈이 황제처럼 가늘어졌다. 황제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실수였소.”

“…….”

“미안하게 되었소.”

그는 체이트와 레티시아를 습격한 사실을 한 치 거짓 없이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아니라 그의 주변이 행한 잘못으로서 인정했다.

“너무 그리 밉게 보지 마시오.”

황제가 섭섭하다는 듯 입술을 늘어뜨렸다.

“나는 몰랐소. 알았다면 말렸겠지.”

“정말 모르셨습니까?”

“그렇소.”

그가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이번엔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전부 처리했으니.”

“무엇을 처리했다는 말씀이신지?”

“그대와 그대의 소중한 이를 해하려 한 나쁜 인간들 말이오.”

“그 나쁜 인간이 혹…… 폐하의 외가를 이르는 겁니까?”

“그렇지!”

황제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내가 모두 처리했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전부 씨를 말렸으니 이제 안심해도 좋소.”

“……하.”

체이트가 신랄하게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굴 위해 뭘 처리했다는 건가.

황제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자신의 외가에 덮어씌워 제 어머니의 세력을 견제했을 뿐이다.

체이트와 레티시아는 그에게 두 번 농락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뻔뻔하게 그 사실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되지도 않게 순진한 척을 하면서.

“……아직도 삐졌소?”

황제가 단춧구멍 같은 눈을 축 늘어뜨리고 물었다.

“아닙니다.”

체이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이번에 이리 불손한 세력을 일소하셨으니 앞으로는 주변을 잘 살피시는 게 좋겠습니다.”

체이트가 말했다.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면 신전도 황실의 저의를 오해하게 되어 비슷한 실수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황제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슬슬 신탁이 내릴 때가 되지 않았소?”

신탁의 해는 주기적으로 돌아왔다.

아르키드네 대신전은 신탁을 받고 그 내용 여부에 따라 세간에 공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했다.

“이미 신전은 신탁의 내용이 뭔지 알 것 아니오. 기왕 온 김에 내게 살짝 귀띔을 해 주는 건 어떻겠소?”

“그건 제 단독 권한이 아닙니다.”

“쩨쩨하기는.”

황제가 투덜거렸다. 아까의 당황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공포를 원하신다면 열두 명의 주교들을 모두 포섭하시지요.”

“다 아는 정보가 어디 쓸 만한 정보겠소? 비밀은 혼자 봐야 재밌는 것이지.”

황제의 얼굴에 나이에 맞지 않는 장난기가 어렸다.

“어떻소, 내가 비밀을 하나 알려 주면, 자네도 하나 알려 주는 거.”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 같은데.”

“일단 들어보시오.”

황제가 흥이 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사실 대주교께서 과거에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는지 알고 있소.”

체이트는 지난 8년간 레티시아와 함께 있었다. 그 정도는 이안의 뒤를 캤다면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신전은 본래 그대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소? 정확히는 그…… 지하였나? 그곳 말이오.”

“…….”

체이트 폴린이 어린 시절을 지하에서 세뇌당하며 보냈다는 것. 이건 대신전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체이트는 불유쾌한 기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로군!”

황제가 껄껄 웃었다.

“나는 선대 대주교와 친분이 아주 깊었소. 그 작자는 평소 고지식하긴 해도 돈 앞에서는 없던 융통성이 절로 생기곤 했으니까.”

“…….”

“그대는 신탁의 아이였지. 붉은 눈의 아이. 그렇지 않소?”

“중요치 않은 사안에 굳이 제가 답해야 합니까?”

“당신이 중도에 도망쳤다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소.”

“…….”

단순한 도망이 아니었다. 체이트는 본래 갇혀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거나, 이단이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영문 모르고 유년 내내 신전에서 갇혀 살았다. 누군가가 그를 신전에 제물처럼 바치고 간 까닭에.

“그때, 신전에 당신을 맡기고 간 이가 누군지 아시오?”

“…….”

알 턱이 없다. 까마득한 과거를 기억하기엔 당시의 체이트는 너무 어렸다.

황제가 의자를 당겨 앉고 말했다.

“바로 당신을 신전에서 빼낸 그 여자요.”

“……!”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

황제가 다시 물었다.

“어떻소. 이제 좀 수지가 맞소?”

* * *

황제의 빠른 인정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알 만했다.

레티시아는 브링스턴 후작가를 카히텐 대공 쪽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는 변수였다. 체이트 역시 친분을 나눈 선대 대주교와 달리 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로서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소에 공세를 퍼붓는 것이 일타이피를 노릴 수 있는 묘수였으리라.

만에 하나 지금처럼 실패하더라도 이 일을 빌미로 눈엣가시 같던 외가를 처리할 수 있다.

그는 이안을 추적하여 레티시아와 체이트를 동시에 발견한 순간에 바로 이 필승의 계략을 짠 것이다.

보통 여우 같은 자가 아니었다.

체이트는 대외적으로 그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일단은 그에게 신뢰를 주어 현재의 평화를 도모하는 게 우선이었다.

헬리아스의 성력을 단신으로 물려받은 황제는 체이트조차도 쉽게 상대할 수 없었으므로.

‘황실의 목적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파악했으니 앞으로 할 일은 명확하다.’

황제의 목표는 레티시아가 아니라 이안의 약혼자였다.

그렇다면 이제 레티시아가 이안과 파혼하여 아무런 사이도 아니게 된다면, 그녀 또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체이트는 카히텐 령으로 돌아가서 이른 시일 안에 레티시아를 데리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

그가 빈손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

느리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요동을 쳤다. 그녀를 생각하자니 조바심이 났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어.’

그의 눈가가 붉어지려고 할 즈음.

“야아…….”

누군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로체였다.

“당신……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체이트가 귀찮은 기색을 풀풀 풍기며 묻자, 로체가 훌쩍거렸다.

“소매치기당했어.”

“…….”

“수도 무섭다. 백 년 만에 이렇게 인심이 각박해졌을 줄이야.”

“한심하기는.”

체이트는 그를 무시하고 워프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로체 때문에, 결국 그를 데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 * *

황제는 창밖을 내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의외야.”

자신을 가두고, 탈출시키길 반복하며 가지고 논 여자를 거론하면 눈이 돌아갈 줄 알았는데.

체이트 폴린은 평온했다.

그는 증오도, 복수도 잊은 듯했다.

자신이 아는 그는 날이 바짝 선 맹수와 같았다. 하지만 현재의 체이트는 잘 길들어진 고양이처럼 변해버렸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무르게 만들었을까.

“역시 사랑인가.”

황제가 작게 키들거렸다.

“멍청하게도, 이번 생도 그 여자에게 전부를 바칠 요량인가 보군.”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에 맞춰 호응해 줘야겠지.

“브링스턴 후작가를 압박해야겠어. 그가 더 멍청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체이트의 유일한 소원이 레티시아와 함께하는 것이라면, 그의 소원은 그보다 훨씬 원대했다.

신의 능력을 타고났으면서 한 사람으로 만족하는 자는 어리석다.

그는 전부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는 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절대자가 되고 싶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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