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성력의 충돌.
체내에서 생성되는 성력이 본인의 타고난 기질과 맞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남주인 레오넬은 성력이 들끓을 때마다 심장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기절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증상들이 비슷한데.’
흑막이 남자주인공과 같은 병을 앓았다는 건 원작에 나오지 않은 부분이라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병이 맞는다면, 지금 이안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심장에 무리가 가는 병이니만큼 한 번씩 발작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든다. 자칫 잘못하면 예고 없이 사망에 이를 수도 있겠지.
이 병의 치료 방법은 단 하나.
자신의 기질에 맞는 성력을 받아서 성력의 근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일종의 그릇 바꿔치기라고 생각하면 쉽다.
접시에 국물 음식이 있다면 줄줄 흘러서 못 먹을 수준이 되겠지만, 완전히 흐르기 전에 오목한 그릇에 옮긴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마찬가지로 아르키드네의 성력이 맞지 않아서 충돌을 일으키는 자는 헬리아스나 카히텐의 성력을 대량 받아서 성력의 근원을 헬리아스나 카히텐의 것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크게 두 가지.
1. 성력으로 근원을 바꾸기 위해서는 신의 가호를 받은 자의 성력이 대량 필요하다.
2. 아르키드네, 헬리아스, 카히텐 중 확실하게 자신의 기질에 맞는 성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1번부터 난제였다.
이안은 카히텐의 성력을 타고났을 테니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아르키드네나 헬리아스의 성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들 중 특별히 신의 가호를 받은 자라고 하면 야수화가 가능할 정도로 신에 가까운 자들. 즉, 아르키드네의 성녀나 헬리아스 황제 정도뿐이다.
황제가 이안에게 제 성력을 나눠줄 리가 없다. 병을 들키면 오히려 약점으로 써먹겠지.
아르키드네의 성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불가능했다.
현재 대신전에는 공식적인 성녀가 나타나지 않았고, 신탁의 성녀인 코렐리아는 태어나지 못할 테니까.
‘결국 돌고 돌아서 원점인가.’
이번에도 그녀가 모든 일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을 여인이.
‘코렐리아 폴린.’
여주의 부재가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아으으.”
이제 후회하는 것도 지친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늘어졌다.
“체이트가 자식을 봤어야…… 아니, 내가 애당초 가출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고작 단역 한 명이 일탈한 대가가 너무 크다.
작은 묘목 하나 사라졌다고 관목이 죄다 옆으로 자랄 줄은 몰랐지.
“아냐, 분명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난 끙끙거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잠깐, 발작이 주요 병증이라면 원작에서 이안이 멀쩡한 척하고 다니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이안은 원작에서도 같은 병을 앓고 있었겠지? 하지만 작중에서 병을 앓는 기미는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감춘 것이 아니라, 그가 원작 시작 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한 나름의 방도를 찾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황제나 코렐리아가 그에게 협조한 게 아니라면, 야수화가 가능한 다른 인물이 그를 도와주었다는 건데.
“아. 설마……?”
그런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신의 가호를 받은 방대한 성력의 소유자.
코렐리아의 아버지.
“체이트…….”
체이트의 성력이라면 원작에서 공인한 수준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비벼볼 여지는 있다.
문제는 현재 체이트와 이안의 사이가 극악 중의 극악이라는 건데. 그 원인이라면 역시.
“아으으…….”
또 나야! 또!
아르키드네 신이시여,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회귀시켜 주세요. 가늘고 짧게 살다 가겠습니다. 할 일 다 마치거든 다시 원래 세계로 곱게 돌려만 놔주세요…….
난 누운 채로 이불을 수십 번 걷어차고 나서야 이성을 차렸다.
이번 생에서 체이트가 순순히 이안을 도와줄 리는 만무하다. 내가 그 애를 데려다가 설득하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이게 또 난처하단 말이지.
난 체이트와 아주 어색한 이별을 하고 장기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내 약혼자 좀 살려달라고 하는 건 너무 양심에 개털 난 짓이 아닐까.
‘일단 로체에게 연락해 볼까.’
다이렉트로 연락하기 애매할 땐 한 다리 건너서 물어보는 게 좋다. ‘야 너 요즘 잘 지내지?’라고 안부 인사를 건네는 척하면서 딴 놈 안부를 슬쩍 끼워 넣는 거다. 사회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지.
다음 날, 나는 요안나 양에게 서신을 보냈다.
로체 아직 그쪽에 있죠? 혹시 만나면 카히텐 성으로 연락 좀 달라고 전해 줄래요?
하지만 며칠 후에 돌아온 답장은 예상 밖이었다.
로체 군도 체이트 군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한날한시에 미남이 둘이나 사라졌으니 비극적인 일이죠.
‘로체가 북부에 없어?’
집도 절도 없고, 가진 거라곤 나잇값 못하는 상판대기밖에 없는 우리 로체가 대체 어디로 날랐다는 말인가.
나는 요안나 양에게 로체를 찾으면 알려 달라고 편지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체, 살아는 있는 거겠지?’
* * *
다음 날, 나는 마카롱의 말랑말랑한 배를 만지작대며 이안의 병을 생각했다.
‘이안은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럼 세상은 파괴될 여지 없이 평화로워지는 거니까 오히려 나은 결과일까.
‘아니, 되레 예정보다 더 빨리 흑화할지도 모르지…….’
내 인생은 대체로 기대한 방향대로 일이 흘러간 적이 없었으니, 더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를 죽게 내버려 둔다면 죄책감이 엄청날 것 같다.
‘미운 정이 무섭다더니.’
이젠 그가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툭하면 코렐리아를 보겠다고 밖으로 나돌던 레오넬이나 제 잇속만 챙기는 헬리아스 황제보다 열심히 사는 이안이, 흑화만 안 한다면 썩 괜찮은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끔 되바라진 언행을 보이거나 귀찮은 부탁을 해도 어지간하면 다 승낙해 주었지.’
요즘 자꾸만 그가 흑막이 아니라 그저 성격 나쁜 사람 1로 보였다.
사람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병을 앓으며 살아왔으면 그만큼 삐뚤어지는 것도 조금쯤은 납득이 가고.
어쨌든, 그를 이대로 방관할 수는 없다.
설사 그가 악인이 될 운명일지라도, 그건 미래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도출된 하나의 결과일 뿐이니까.
앞서 미래는 몇 번이고 달라졌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끝이 원작과 같으리라는 보장도 이제는 감히 할 수 없었다.
‘앞날을 확신할 수 없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겠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체이트와 만나 보라고 제안해 보자. 둘이 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그만큼 강력한 조합도 찾아보기 힘들 테니까.
나는 큰 결심을 안고 이안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똑똑, 대공 전하 계십니까.”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안에 없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서려는 찰나.
“으으…….”
아주 작은 신음이 방 안에서 들려왔다.
혹시 또 병이 재발한 건가?
나는 재빨리 방문을 열어젖혔다.
“대공 전하!”
이안이 바닥에서 심장을 움켜쥔 채 나뒹굴고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난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하, 하지만 안에서 신음이 들리는데 무시하기가…….”
“돌아가.”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싫어요.”
“…….”
그의 새파란 눈이 나를 꿰뚫어 보듯 내리꽂혔다.
“귀찮은…… 여자…….”
이런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네.
난 그의 머리에 딱밤을 먹여주고 싶은 걸 참고 낑낑거리며 거대한 몸을 소파까지 끌고 갔다.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대게 한 뒤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전에 마차에서도 그러더니.”
“…….”
“어제오늘 일이 아닌 거죠?”
“……말이 많군.”
발작이 점차 멎어 가는지 그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표정도 평온해졌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레티시아.”
“네.”
“당신이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 실망이 크겠어.”
얘가 웬일로 이런 자학적인 소리를 다 하지.
“제가 원하던 모습이 뭐길래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사내를 원했겠지. 다들 내가 그런 모습으로만 지내길 기대하니까.”
그랬구나. 왜 다들 그런 걸 기대했을까. 애 인성 버리게.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길 하기엔…… 당신은 너무 많은 걸 봤군.”
그는 평소와 달랐다. 들키기 싫은 모습을 들킨 듯, 만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가 눈을 내리감은 채 입을 열었다.
“당신, 이제 나와 파혼하고 싶어졌나?”
“어…… 네?”
그래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답하면 왠지 눈으로 베일 것 같은데.
우리 대공 전하는 대체로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던지는 편이므로, 나는 일단 대답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 그런 걸 왜 갑자기 물어보시는 거죠?”
“그야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
저, 아직도 그런 착각에 희생당하는 중이었습니까.
이안이 누운 채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좋아하는 남자의 꼴사나운 모습을 연달아 보면, 보통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그건 아닌데.’
그의 생각은 근본부터 글러 먹었다. 세상의 어떤 바보가 사람이 완벽하기를 기대하나. 인간은 다 결함이 있는 법인데.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꼴사나운 모습을 봐도 보통 귀엽기만 하지. 지켜주고 싶어질 때도 있고.’
아니, 그런 것보다도…….
나는 이때다 싶어 말했다.
“전하, 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안의 철옹성 같던 경계심이 조금 풀린 때를 노리기로 했다.
“뭐지?”
“전하의 병에 대해 알고 싶어요.”
해결방안부터 대뜸 말하는 건 너무 수상하다.
일단 모른 척하며 포석을 깐 뒤, 차근차근 치료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왠지 이대로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아서 조금 조바심이 들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이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주 같은 거야.”
“저주요?”
“그래.”
그가 팔로 눈가를 가린 채 말을 이었다.
“내 어미가 내게 물려준 저주.”
이안의 친모가 물려줬다고?
그녀에 대한 의문도 이번에 풀어낼 수 있는 걸까.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난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줄곧 노력해 왔다. 하지만 도저히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지.”
그랬겠지. 성력의 충돌이라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나도 원작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앓고 있는 병이 뭔지 겨우 유추해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았나요?”
“……실마리는 잡았지.”
이안은 역시 원작이 시작하기 전에 방도를 찾았던 거구나.
지금 그는 치료법을 찾아내는 시작점에 서 있는 듯했다.
“실마리요?”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우습군. 약점을 들춰서 좋을 것도 없는데.”
안 그러셔도 이미 굉장히 우스우시니까 이참에 더 말해 주세요.
나는 평소처럼 깐족거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아냈다. 그가 한마디라도 더 해주길 기다리면서.
다행히 두 번의 발작을 목격당한 뒤로, 이안은 완전무결한 본래의 이미지를 반쯤 포기한 듯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난번, 당신이 도주 중에 나를 목격했다고 했던 것 기억하나?”
“……네. 기억해요.”
나로서는 유쾌한 기억이 아니라서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때 나는 한 여자를 만나러 가고 있었어. 내 병을 고칠 방도를 알고 있다는 여자였지.”
“그, 그 여자가 누군데요?”
빙의자인 나와 성녀인 여주 말고도 이 병의 치료법을 아는 이가 있었단 말인가?
“어차피 가명일 테니 얘기해도 상관없겠지.”
이안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코렐리아.”
“……네? 방금, 뭐라고.”
이안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 여자는 자신을 코렐리아라고 소개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