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코렐리아.
그 이름을 이안의 입으로 듣는 순간, 망치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뒤통수가 얼얼했다.
‘뭐지? 코렐리아는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동명이인인가?’
아니, 동명이인일 수가 있나.
다름 아닌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코렐리아 폴린. 주인공의 이름이 이 세계에서 흔하게 쓰이는 이름일 리가 없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 어떤 여자였나요?”
“음?”
이안이 소파에서 상반을 일으키고 나와 눈을 맞췄다.
아뿔싸.
질문이 지나쳤다. 그의 눈에 의구심이 어렸다.
“…….”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척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이번만은 모른 척하기 힘들었다.
여자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사람.
반드시 확인해 봐야 할 상대였다.
“……당신이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지만.”
이안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여자의 정체는 나도 누구라고 단언할 수 없어. 조사는 해 봤지만, 어느 하나 신빙성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거든. 안개 같은 여인이었지.”
내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탄식을 내뱉자, 그가 내 손끝을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
“……?”
“그 남자와 똑같은…… 기분 나쁜 눈이었어.”
이안이 눈을 좁혔다.
“그 붉은 눈.”
“……!”
코렐리아다.
붉은 눈의 여자라면, 코렐리아가 확실하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코렐리아가 지금 여기에?
‘말도 안 돼. 아직 신탁이 내리기도 전이라고. 그 애는 태어나지도 않았단 말이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비틀거리자 이안이 날렵하게 내 몸을 받아냈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체이트는 코렐리아의 아버지가 아니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작중 열여덟이고, 올해 겨우 태어났어야 마땅한 코렐리아가 어떻게 이안과 접선할 정도로 커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시간 선이 잔뜩 어그러진 느낌.
골이 징징 울려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레티시아?”
이안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레티시아!”
머리가 핑 돌며, 익숙한 열기가 이성을 잠식해 갔다.
사지가 으슬으슬 떨렸고 뇌는 녹아내리는 마시멜로처럼 끈적끈적하게 느껴졌다.
현실과 이상이 분간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 * *
늘 가던 숲이 있었다.
새하얀 껍질을 반쯤 벗은 자작나무가 시가의 등불처럼 늘어서 있고, 상록의 관목들이 틈새로 빼곡하게 난 채 겨울 안개를 이불처럼 덮고 있는 곳.
동물들의 산행마다 목을 굽혀 다리를 놓다가 그만 누런색으로 기진해 버린 잔디를 따라가면, 살얼음이 낀 호수가 나왔다.
자작나무 숲을 거울처럼 비추는 호수. 그 투명한 표면을 감상하며 나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곳은 정령의 숲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르는 나만의 밀회 장소.
인내심을 갖고 한참을 기다리면 구름을 신고 걷는 것처럼 가벼운 발소리로 그가 나를 찾아온다.
눈처럼 새하얀 은발을 가진, 아름다운 사내였다.
‘지겹게도 오는군.’
늘 그렇듯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만 좀 와라.’
하지만 초콜릿처럼 달큼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는 매번 내게 ‘오지 말라’고 했다. 한 번만 더 오면 다시는 얼굴 비추지 않을 테니 이대로 얼어 죽기나 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가 결국 나를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세월 유한한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 하나가 눈에 밟혀 멀리 가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만큼 다정하고, 따뜻한 존재였다.
‘카히텐 님!’
환희에 차서 안겨들면 그는 항상 내 팔을 붙잡고 떼어내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면 나는 또 두 팔 벌려 달려들고, 그는 나를 밀쳐내고. 혀를 끌끌 차다가 뒤로 넘어지며 저도 모르게 내 허리를 받쳤다.
우리의 일상이란, 자작나무 숲처럼 안온했고 상록의 빛처럼 사철이 푸르렀다.
‘너 진짜 끈질기다.’
‘끈질긴 사람도 사랑하시지요?’
‘아니.’
‘만물을 평등하게 아끼는 게 신의 역할 아닌가요? 태업하지 말고 안아 주세요.’
마지못해 끌어안는다는 그 손이 마디마디 접히며 내 살갗에 깊이 파고드는 것이 좋았다.
그가 거짓말쟁이인 것도, 싫지 않았다.
‘신은 영생을 사니까 외롭겠어요.’
‘딱히.’
‘저 죽으면 슬퍼서 어찌 살아요?’
‘또 쓸데없는 소리.’
‘제가 아흔아홉 살까지만 끼고 살다가 곱게 자유의 몸으로 보내 드릴 테니 호상이라고 여기고 무덤에 꽃이나 한 송이 놔주…… 악! 왜 때려!’
‘……실없어.’
나는 유한했고, 그는 무한했다.
그러나 양초 심지 같은 내 삶이 싫지는 않았다.
그를 만난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어쩌지?
언제부터일까? 나는 두려워졌다.
그를 홀로 남기고 가는 것이.
‘카히텐 님, 카히텐 님. 신은 죽으면 영혼도 재가 되지만요, 인간의 혼은 여기저기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대요. 그거 진짠가요?’
나는 대답 없는 그의 귀를 붙잡고 속삭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아흔아홉 살까지 살다 가도 외로우면 말이죠, 그때는 그냥 다른 사람 만나지 말고 나 기다려요. 꼭 돌아올 테니까. 응?’
‘그 전에 질리겠는데.’
‘어? 아직 안 질린 거 인정했네!’
나는 까르르 웃으며 피곤한 표정의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거 봐, 사실 나를 좋아한다니까!’
* * *
머릿속이 우유를 잔뜩 풀어놓은 밀크 티처럼 뿌옜다. 시야도 정신을 따라 어그러졌다.
“아…….”
누군가가 나를 향해 무어라 얘기한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은발.
눈처럼 새하얀, 은발.
나는 그 머리칼을 쥐어야 했다.
그를 다시 내 곁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기나긴 고독을 홀로 견뎠을 그 남자를…… 있는 힘껏 안아 주어야 했다.
손을 뻗었다. 그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에 손끝이 닿는 감촉이 느껴진 순간.
입가에 미소가 절로 일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스르륵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카히텐 님…….”
* * *
이안은 무례한 손길에 침범당한 제 머리를 멍하니 매만졌다. 불시의 습격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는 다시 세상모르고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이안 홀로 견뎌야 하는 밤이, 상당히 길 듯싶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설마 또 쓰러진 건가?
‘이 몸뚱이 진짜 징글징글하다.’
평소처럼 나약한 내 신체를 욕하고, 기지개를 켰다.
“으으음, 오늘 날씨도 쌀쌀하네.”
…….
…….
“헉!”
맞다, 코렐리아!
나는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어제의 일들이 차례로 스위치가 켜지듯 하나둘 떠올랐다.
이안 카히텐, 성력의 충돌, 치료제는 체이트, 그리고.
“코렐리아라니…….”
뭐지? 이거 말이 되나? 아, 혹시 내가 원작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을 착각한 건가?
……그럴 리가 없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체이트와 연관된 인물인데 어떻게 잊어버려.
원작에서 나온 코렐리아는 체이트의 딸이 확실했다.
실제로 작중에서 어떤 건달이 체이트에게 ‘댁이 성녀님의 아버지라던데.’하고 시비를 걸다가 코렐리아에게 쥐어 터지는 장면이 있었다. 명장면이었지, 음, 음.
‘내 기억이 빙의하면서 어디 한 군데 크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건 확실하게 원작의 내용이 맞아.’
음, 혹시 내가 정말 빙의하다가 뇌를 다쳤나? 보통 빙의는 죽으면서 하기 마련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코렐리아가 지금 시간대에 돌아다녀?
아니면 두 번째 가설, 코렐리아가 내가 아는 코렐리아가 아닌 것이다. 미쳐 돌아버린 우연의 일치, 코렐리아(엑스트라, 27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으음, 예전에 가정한 대로 체이트 쪽이 여주의 아버지와 동명이인일 수도…… 음, 이건 가망성이 너무 낮나.
‘그러고 보니 이안이 본 코렐리아는 붉은 눈을 하고 있다고 했어.’
이안이 잘못 봤거나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진짜 코렐리아일 확률은 크게 올라간다.
체이트가 그랬듯이 이 세계에서 붉은 눈은 주인공 집안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나는 빙의 후 지금까지 체이트를 제외하고 적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으으, 어렵다, 어려워.”
나는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쥐어뜯다가 제풀에 지쳐서 팔을 아래로 툭 내려놓았다.
산발한 머리에 퀭한 얼굴, 축 처진 어깨까지. 지금 내 몰골은 아마 꽤 볼 만하겠지.
방구석에 앉아서 머리를 굴려 봤자 나오는 답들엔 한계가 있었다.
직접 보기 전까진 어느 쪽도 섣불리 확신할 수 없다. 이안이 만난 코렐리아가 내가 아는 원작 여주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또다시 밖으로 나가야 하나…….”
코렐리아를 찾아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면 내가 원작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확신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럼 난 자유의 몸이 된다.
이안의 사술이나 여주의 아버지 같은 원작의 전개에 더는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묘한 기대감이 일었다.
‘근데 코렐리아를 어디서 찾지? 이안에게 물어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려나?’
나는 늘 그렇듯 케이시 양이 마련해 둔 대야의 물로 세수를 마치고, 이안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
“…….”
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안이 내 침실 앞에 있었다.
내가 가기 전에 그가 먼저 나한테 오다니.
이건 또 새로운데.
나는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물었다.
“왜요? 걱정돼서 왔어요?”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차댈 걸 예상했는데 그는 웬일로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눈가도 조금 어두워진 것 같고, 표정도 음산한 것이 어째.
‘불안한데…….’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어제의 내 질문과 행동이 크나큰 의심을 산 건 아닐까.
오늘이 바로 레티시아 브링스턴으로서의 마지막 날일지도.
난 언제 으쓱거렸냐는 듯 한층 겸손해진 자세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응?”
“걱정돼서 왔다.”
그가 예상치도 못한 긍정을 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레티시아.”
“네.”
“혼인하자.”
“……?”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장미꽃도 없었고, 값비싼 목걸이도 없었다.
당연히 수락하리라 여기는 그의 오만한 태도도 더는 없었다.
그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그저 내 앞에 서 있었다.
빈손의 사내가 백기를 든 패잔병처럼 한숨 같은 제안을 해 왔다.
“지참금도, 가문도……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당신만 내게 와.”
두 번째 프러포즈였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