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갑작스러운 구혼에 나는 당황했다.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실까.
혹시 병약한 사람 좋아하나.
아픈 사람을 보면 쾌감을 느끼는…….
그런…… 그런 취향인 건가.
질겁한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가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지 마요!”
“내 집이야.”
“내 방이래도!”
그가 한 걸음씩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에 발맞춰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벽이었다.
“부부가 네 방 내 방이 따로 있나?”
“우리 아직 결혼 안 했어!”
“그러니까.”
벽에 갇힌 채, 그의 시선이 묵직한 추처럼 내 쪽으로 떨어졌다.
“결혼하자고.”
“…….”
원작과 현실의 괴리가 극명해지는 이 희망적인 순간에 이런 식으로 머리채를 붙잡히다니. 미치겠네!
“왜 그러지? 당신은 원래부터 나와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
그는 어느새 평소의 여유를 반쯤 되찾은 상태였다.
“제가 언제요!”
“전에 결혼하겠다며.”
“그건 사정상……!”
“날 좋아하잖아.”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난 씩씩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진짜 그와 결혼할 이유는 사라졌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그의 기나긴 착각에 마침표를 찍어줘도 된다는 뜻이지.
그런데…….
“레티시아 브링스턴.”
“……히끅.”
왜…… 왜 눈이 돌아갔는데?
나 뭐 잘못했어?
왜 갑자기 흑막 같은 눈깔로 나를 쳐다보는데…….
‘대공 전하, 눈에 흰자가 너무 많아요. 별 모양으로 예쁘게 좀 떠 주세요. 무서워요…….’
“레티시아.”
“……으으.”
내가 대답을 궁싯거리자 어디서 버튼이 눌렸는지 그의 얼굴이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턱에 닿았다.
‘헉.’
이 각도. 예사롭지 않아.
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가볍게 닿아 있던 손가락이 턱을 꽉 잡고 고정한 탓에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으…….”
제발 좀…….
“허락받고 하라고!”
퍼억!
“윽…….”
“……헉.”
쳤다.
일…… 쳤다.
나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뺨을 감싸 쥔 이안을 바라보았다. 싸아아……. 피가 식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너…….”
“그, 그게…….”
새털 같은 제 주먹 정도는 강철 같은 대공 전하의 피부에 흠집 하나 낼 수 없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면 내가 강철 주먹에 나가떨어질 것 같아서 소심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근데 나 왜 사과하지?
아니, 내 억울함은 지금 중요치 않다. 저 넋이 나간 표정을 보라.
저 남자, 살면서 처음으로 맞아봤다.
입으로 때리는 것도 못 견뎌서 새어머니랑 사이 틀어지고 별거한 남자다.
내가 그런 남자를 때렸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실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부풀어 오르는 제 뺨을 쓱쓱 매만지다가 멍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왜 거부했지?”
“네?”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아뇨, 그…….”
전생에선 사귀지도 않는 남자가 무작정 다가오면 어퍼컷을 날리라고 배웠지 말입니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그런 말 안 통하겠지요?
“죄송합니다.”
“…….”
그가 하도 딱딱하게 굳어서 나는 순간 내가 메두사라도 된 줄 알았다.
돌처럼 굳은 사내에게 조심조심 손을 흔들어 보았다.
“…….”
반응이 없다.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틈이다.
나는 게걸음으로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문고리가 손에 잡히자마자 방문을 열고 냅다 튀었다.
“잠깐……!”
“화 풀리면 얘기해요!”
냅다 튄 내가 아무 방문이나 잡고 열어젖힌 게 하필 대부인의 침실이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꺄아악! 변태야!”
“으악,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나까지 주먹을 얻어맞을 뻔했다.
이제 겨우 해 떴는데 벌써 3번째 사과를 하고 있었다.
정신을 단디 차리고 두 번째로 간 곳은 케이시 양의 방이었다.
“어머, 아가씨?”
“케이시 양, 케이시 양! 나 좀 살려줘요!”
“응? 아가씨 아침부터 왜 그러세요?”
“강상죄를 저질러 버린 것 같아요…….”
“으응? 강상?”
케이시 양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께서 뭔가 저지르신 건 알 것 같네요.”
“……?”
뒤가 싸했다.
나는 기름을 덜 먹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팔짱을 낀 채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나와.”
“……케이시 양.”
케이시 양이 나를 슬쩍 밀어냈다.
내 로열 포커 메이트면서, 나빴어!
나는 그대로 이안에게 덜미를 잡혀 그의 집무실로 호송되었다.
* * *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이안이 거만하게 턱을 들고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조건 없는 혼인이라면 당신 입장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일 아닌가?”
“그건 저희 집안이 좋아할 것 같기는 한데요…….”
“당신은? 달리 원하는 게 있는 건가?”
“…….”
나는 난처한 시선으로 이안을 흘깃 바라보았다.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 평소처럼 반쯤 정상인 같다.
좋아, 이 정도 상태라면 용기 내서 얘기할 수 있겠어.
“저는 전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또 무슨.”
헛소리를 내뱉기 전에 얼른 다음 할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를 좋아한 적이 없거든요.”
그가 눈을 슴벅이다가 피식 웃었다.
“또 아닌 척하려는 건가. 그럴 필요 없어. 이제 나도…….”
“아뇨.”
이런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니지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뿐일 것 같았다.
나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전하를 이성적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미간을 모으고 있던 그의 눈이 움찔거렸다.
“날…… 좋아한 적이 없다고?”
“예. 관심받으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부끄러워서 얼버무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할 법한 헛소리를 원천 차단하고 말을 이었다.
“진심이에요. 진짜로, 저 전하 안 좋아해요.”
“…….”
이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나를 지나쳐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이어서 서류를 하나 집어 들더니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한다. 뭐 하자는 거지?
뭐 하나 싶어서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의 반듯했던 이마가 좁아 들었다.
“안 나가고 뭐 하지?”
“저기, 방금 제가 한 말은…….”
“무슨 말?”
눈썹을 찡그리는 모습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안 카히텐이었다.
‘설마 무시하겠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했다.
“그보다 전하, 제가 어제 일로 긴히 여쭤볼 게 있…….”
“나가 봐.”
“…….”
“내가 일이 좀 바빠서.”
아니.
바쁘다고 하기에는.
지금 서류…… 거꾸로 들고 계시는데…….
“……넵.”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 주자.
* * *
쫓겨났다.
나는 집무실 문밖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를 안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쫓아내? 진짜 웃기네.
세상 사람 다 자기 좋아해야 하나. 안 좋아할 수도 있지.
아니, 물론 약혼한 입장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조금 그렇긴 한데…….
‘그냥 대충 넘어갈 걸 그랬나.’
계속 착각하고 사셨으면 언젠가 내게 마음을 열고 코렐리아나 사술과 관련해서 썩 괜찮은 단서를 제공해 줄 것 같기도 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사람 마음을 갖고 멋대로 오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농락이나 다름없으니까.
한숨을 푹 내쉬면서 돌아가는 길에 제스를 발견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제 손을 붙잡고 ‘살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로 슬쩍 다가가 뒷짐을 졌다.
“거기서 뭐 해요?”
“허억!”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보니 알아 달라고 소리친 건 아닌 것 같다.
“뭐 좋은 일 있나 봐요?”
“아뇨, 아닙니다!”
제스는 손사래를 치다가 제 손을 휙 뒤로 숨겼다.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아뇨!”
“…….”
수상한데.
그의 손을 억지로 빼서 확인해 봤지만 딱히 새로운 건 없었다.
“후우…….”
그가 매끈한 손바닥을 보며 숨을 깊게 몰아 내쉬었다. 진짜 뭐 있는 것처럼 구니까 더 수상하네.
* * *
한편, 카히텐령 초입새.
두 명의 미남자가 서로를 부둥켜 안…….
“떨어져.”
“으악, 싫어!”
……한 명의 미남자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나무늘보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모양새였다.
휘청, 그가 매달려 있던 나무가 비틀거렸다.
“어어, 야! 귀한 얼굴 깨질 뻔했잖아!”
“어지러우니까 말 시키지 마.”
체이트가 로체를 밀쳐내고 머리를 짚었다.
“야, 괜찮냐?”
촐싹거리는 몸짓으로 체이트의 상태를 살핀 로체가 빠르게 혀를 찼다.
“워프를 두 번이나 해대니까 그렇지. 성력 바닥났지? 어?”
“…….”
“너 그래서 카히텐 성으로 들어갈 수나 있겠냐?”
카히텐 성의 경비는 엄중하다. 범인이 쉬이 뚫을 수도 없거니와, 성력을 가진 사제들도 멋대로 침입하기 힘든 구조였다.
북부의 요새라고 불리는 곳이었기에, 체이트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뒤로하고 레티시아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스스로 요새로 들어가서 안전하기를 바라며.
이제는 그가 그 엄중한 요새를 뚫고 들어가야 했지만.
“…….”
체이트는 말없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제스에게 걸어둔 계약이 자연히 사라졌다.
성력의 마지막 한 톨까지 쥐어짰다는 증거였다.
“멍청하기는. 그럴 거면 차라리 기차를 타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가 카히텐 성 방향을 응시했다.
“……기다릴 것 같아서.”
로체는 그가 한심했다.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어차피 이렇게 돌아올 거, 왜 하필 이안 카히텐에게 가게 둔 거냐? 그러다가 레아 양이 진짜 이안 카히텐에게 마음이라도 주면 어쩌려고.”
로체는 레티시아를 향한 체이트의 오랜 집착을 알고 있었다. 그 집착이 정상 범주를 아득히 벗어났다는 것도.
‘레아 양이 딴 남자 얼굴만 바라봐도 눈이 돌아가는 주제에.’
하지만 체이트는 그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
체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안은 레티시아의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레티시아가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자신을 잊고 그 남자에게 가겠다고 한다면.
아마…… 곁에 있게만 해 달라고 빌지 않을까.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