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체이트 폴린은 항상 기다리는 역할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길 기다리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기다렸다.
이따금 감정이 흘러넘쳐 주체가 되지 않았지만 금세 갈무리했다. 긴 시간을 짝사랑으로 보내면서 그녀에게 진심을 내뱉은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레티시아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단 한 번, 제 사랑을 고백했다.
‘나는 오래 기다렸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그는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후회가 됐다.
그가 레티시아를 너무 잘 알기에 했던 행동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레티시아는 제 고백을 쉬이 잊지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마음의 짐처럼 여기고 소중하게 간직해 둘 것이다.
본래 체이트가 의도했던 바대로.
자신은…… 그녀에게 감정의 부채를 남겼다.
‘그저 편히 지내도록 놓아둘 수는 없었을까.’
왜 그때 전처럼 참아내지 못했을까.
체이트는 항상 인내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레티시아가 자신을 혼인시키기 위해 때 아닌 삽질을 할 때마다 매번 그에 응해 주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더라도 참고 웃어 주었다.
그러면 그녀가 마주 웃어 주었으니까.
심지어는 레티시아 자신이 결혼하겠다며 얼토당토않은 남자를 제게 소개했을 때도, 데이트를 한다며 옷을 봐 달라고 했을 때도.
체이트는 참아냈다.
그는 단 한 번도 레티시아가 골라온 그 말도 안 되는 남자들을 막아선 적이 없었다.
다만, 레티시아가 만나겠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참고 견디기 힘든 문제들이 있었다.
먼저,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한 그 남자.
그가 만취 상태로 제 어깨에 팔을 걸치며 혀 꼬부라진 말투로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귀를 씻어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레아가 나한테 푹 빠진 거 봤지? 처남, 아마 곧 있으면…….’
그가 이어서 입에 담아선 안 될 소리를 지껄인 순간, 체이트의 이성은 저 멀리 넴페르 산맥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그 일은 아직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안과 처음 마주친 날에도, 체이트는 그저 한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레아 안에 있니?’
‘잠시 외출 중입니다. 왜 그러시죠?’
‘아니, 내 통신구로 이런 메시지가 왔는데…….’
레티시아는 당시 신분이 불분명하여 한스의 통신구를 빌려 쓰고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외출 시까지 남의 통신구를 들고 나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빈손으로 외출했다.
‘레아가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던 남자 말이다. 약속에 못 나가게 됐다고 연락이 왔거든.’
그는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이었다. 거류증 만료 일자가 지났음에도 위법하게 북부에 머무르다가 강제 추방을 당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레티시아는 혼자 외출한 것이다.
미련할 정도로 남을 잘 믿는 여자였다. 분명 약속 시간이 다 지나도록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체이트는 곧장 레티시아를 찾아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 이안 카히텐을 만났다.
그는 레티시아가 전에 만났던 반푼이 같은 남자들과는 격이 달랐다. 태생부터 엄청난 권력과 돈을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는 레티시아의 약혼자였다.
‘약혼.’
계약상으로 그와 레티시아는 오래전부터 붉은 실처럼 묶여 있었다.
불안하다.
사실은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를 찧고 싶을 만큼 불안했다.
레티시아가 그에게 마음이 생긴다면, 그 때문에 자신을 잊고 기존의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마음 같아서는 다 찢어 버리고 싶어.
당신 주변의 모든 사내를 도륙내고 나 홀로 당신을 끌어안고 싶어.
평생 나만 보고 살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그냥 나와 함께 행복하게 있어 주면 안 되나?’
체이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고양이로 평생 살아도 좋으니까.
적어도, 당신 옆에 있게 해 줘.
그는 그녀 곁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의 본심이란 항상 이렇듯 지리멸렬한 모순투성이였다.
* * *
“야옹.”
오늘따라 마카롱이 애교를 자주 떨었다. 평소엔 밥 줄 때랑 놀아줄 때 빼고 아는 척도 잘 안 하던 게.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 없어. 바쁘다고.”
“애오오옹!”
마카롱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성큼성큼 이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제 일로 말도 못 붙일 분위기긴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치 않아!
‘딜을 하는 거다.’
너는 코렐리아의 정보를 주고, 나는 병을 고칠 정보를 주는 것으로.
나는 집무실 앞에서 노크를 하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전하!”
“……왔나?”
뭐야. 멀쩡하잖아.
그는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던 것처럼 태연했다.
‘어제 일은 그에게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었나?’
하긴, 잘생긴 대공 전하께서 인기가 오죽 많으시겠어. 나 하나 정도 없어도 티도 안 날걸.
“브링스턴 후작가에는 내가 따로 통보하지.”
“예? 뭘요?”
“뭐긴, 우리 결혼 말이다.”
태연한 게 아니었다.
그는 내 거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인생 혼자 살게 생겼다고 생각했더니, 진짜 인생 혼자 살려고 그러네.’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소리쳤다.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뭘?”
“모른 척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뭘.”
“그러니까 전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예?”
“그래서, 우리 사이에 달라질 게 있어?”
이안은 무표정했다.
“당신과 내 약혼은 애초부터 정략혼이었어. 사랑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지.”
“그거 미뤄졌잖아요.”
“나라면 충분히 밀어붙일 수 있어.”
“그러니까 왜 굳이 안 해도 될 결혼을 하려고 하시냐구요.”
“…….”
이안이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하고 싶으니까.”
“……?”
“너랑 혼인하고 싶어졌어.”
“……허?”
그전까진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가며 착각의 늪에 빠져서 결혼 ‘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본인은 정말 마지못해 하시는 것처럼 굴지 않으셨냐고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서 휘청였다.
“레티시아……!”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괜찮아요. 이 정도로는 안 쓰러져요. ……아마?”
“…….”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로 앉았다.
“나야말로 궁금하군.”
“뭐가요.”
“나와 결혼하겠다고 따라나선 건 다름 아닌 너였잖아. 왜 이제 와 마음이 바뀌었지?”
“그건…….”
처음엔 원작의 전개를 막기 위한 〈흑막 갱생 프로젝트〉였다. 사람 하나 환골탈태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당연히 장기적으로 플랜을 짜야 했고, 단서를 얻기 위해선 그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코렐리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내 계획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았으니까.
나는 그녀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대공령에 머물 수 없을 테고, 당연히 대공비도 될 수 없다.
“이제 와 마음이 바뀌었나?”
“……처음부터 제가 직접 전하를 좋아한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는데……요.”
이안의 낯이 조금 굳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결혼하겠다는 얘기는 진심이었잖아.”
“물론 그랬죠. 그땐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고, 그러자면 당신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100% 진심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편이 가장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브링스턴 후작가가 우리 결혼을 유보하겠다고 했잖아요. 당신도 조건 없는 결혼은 사양하는 주의고. 거래 품목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결혼이 연기돼도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했던 건 당신이야.”
“네, 브링스턴 후작가로 돌아가면 제게 무슨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웠거든요. 하지만 이제 마음의 준비도 다 끝났으니까 괜찮아요.”
“아, 브링스턴 후작가 말이지.”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 아나?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브링스턴 후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권세의 유혹에 약한 남자니까.”
“그렇게까지 저와의 혼인을 강행해서 전하께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요?”
“…….”
이거 봐, 대답도 못 하면서.
저 남자는 내 거절에 자존심이 상해서 고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평생 실연의 상처 한 번 겪어 본 적 없는 남자니까, 고작 나 같은 사람의 거절이 참기 힘들었겠지.
“내가 얻을 수 있는 거라…….”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가 조용했기에, 나는 억지로 할 말을 더 쥐어짜야 했다.
“봐요,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죠? 저와 결혼해도 당신은 아무 이득도 취할 수 없을 거예요. 이득 없는 거래…… 싫어하시잖아요.”
그는 처음부터 우리의 결혼이 정략혼이라고 못을 박았다. 나는 거래의 수단이자 물건이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감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 우리 사이에 남은 건 그런 계약이 존재했‘었’다는 기록뿐이었다.
언제든 파혼해도 양자 간 아무런 뒤탈도 없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실패한 중개인이었다.
“내가…….”
이안은 살며시 눈을 뜨고 나를 응시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당신을 찾았다면, 나와 결혼했을 건가?”
“그랬겠죠. 그땐 브링스턴 후작가도 어떻게든 저를 잡아다 당신과 엮고 싶어 했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신에게 잡혔어도 전 당신을 좋아해서 결혼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
“제가 당신에게 비뚤어진 애정을 가지고서 당신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도 없었는데 왜 굳이 도망까지 쳤을지, 그걸 생각해 보세요.”
이안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계산들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좋아, 파혼해.”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