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단, 조건이 있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치사하다. 꼭 한마디 덧붙여야 속이 시원한가?
나는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체이트 폴린은 만나지 마.”
“예……?”
체이트가 여기서 왜 나와?
내 눈에 깃든 의문을 읽었는지, 그가 재차 말했다.
“만나지 마.”
“……왜요?”
“내가 싫으니까.”
……초딩인가.
아니 뭐, 코렐리아가 내가 아는 그 코렐리아라면 어차피 이안은 체이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무사히 병을 치료할 수 있을 테지만.
“…….”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상처만 주고 홀라당 떠나 버렸으니 체이트를 찾아가는 게 딱히 그에게 달가운 일이 아닐 거라는 것도 아는데, 거짓으로라도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알았다고 하고 넘겨!’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갑갑해 돌아가시려고 하는 중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입만 벙긋거렸다.
“하.”
이안이 별안간 천장을 보고 탄식했다.
“이렇게까지 처참할 줄은 몰랐는데…….”
혼잣말인 것 같았다.
나는 어물쩍하게 서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인생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모르고, 누굴 안 만나겠다고 해서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그가 도로 정면을 보고 턱을 괸 채 한쪽 눈썹을 비죽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고…… 안 그래요?”
이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탈하군.”
“…….”
“브링스턴가에는 내가 연통을 보내지. 딸을 보낼 테니 곱게 모셔 가라고.”
그는 의자 뒤로 깊게 등을 묻었다.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라 그런가. 왠지 사과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저 새끼가 감히 내 이번 생 첫 키스를 예고 없이 빼앗으려고 했으니 퉁치는 걸로 하자.
나는 속으로 맞교환을 했다 치고, 그에게 사과 대신 이렇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나한테 잘 대해 줘서.”
“……내가?”
“네. 사실 많이 걱정했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친절했다…….”
그가 턱을 괸 손 뒤로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웃기는군.”
……좀 그렇긴 하죠?
원래 잘하던 사람이 한 번 못하면 그렇게 꼴이 뵈기가 싫고, 개쓰레기인 줄 알았던 사람이 인간답게 굴면 선녀로 보이더라고요.
나는 자유분방하게 튀어 나가려는 속마음을 애써 눌러 참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이어서, 지난번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일들을 화두에 올렸다.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그 여자 말인데요.”
“음?”
“코렐리아……라는 여자요.”
그 이름을 내 입으로 말할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두근두근.
심장이 100미터 단거리 질주를 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이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모르겠군.”
“아…….”
맥이 탁 풀렸다.
“그날, 도주 중이던 당신이 나를 발견했던 그 장소 부근에서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어, 그러면 전하의 병은……?”
이안은 아직 성력 충돌을 겪고 있었다. 이 말은 곧, 코렐리아와 만났을 때의 그는 병을 완치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 코렐리아와 현재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는 건…….
“그래, 난 아직 이 병의 치료법을 모른다.”
“……!”
코렐리아는 이안의 병을 치료해 주지 않은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어째서지? 그 코렐리아가 내가 아는 여주, 그러니까 아르키드네의 성녀라면 이안의 병을 치료하지 못할 것도 없을 텐데.
아, 혹시 이안은 아르키드네가 아니라 헬레아스의 성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안이 만난 코렐리아는 역시 여주와는 무관한 제3의 인물이라거나.
실망감에 잇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안은 절망에 가까운 내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바로 그런 거야. 당신의 그런 행동이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고.”
“…….”
코렐리아의 행방을 모른다. 이안의 병도 그대로다. 그럼 나는 무얼 위해 파혼을 해 가며 여길 나가려고 한 건가.
‘파혼…… 취소할까?’
아니다. 내가 무슨 터키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쓸데없는 희망 고문은 하지 말자.
이안은 나를 관찰하듯이 뜯어보고 있었다. 난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잠깐 딴생각을 좀.”
“1분 전에 파혼 얘길 꺼내 놓고 잘도 공상에 빠지는군.”
아주 여유가 넘치나 보지? 그의 마지막 말은 눈치 바닥인 내가 들어도 명백한 비꼼이었다.
“코렐리아는 그럼 전하의 병을 치료해 줄 것도 아니면서 전하를 왜 만나자고 한 건가요?”
“애당초 나는 그곳에 병을 치료하러 간 게 아니야. 이 병의 원인을 알아보러 간 거지.”
살짝 울컥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은 내가 가진 병을 치료할 능력이 없다고 얘기했어. 정확히는, 치료할 능력은 있지만 나와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 했지.”
상성이 맞지 않는다?
코렐리아는 아르키드네의 성녀다.
그리고 이안은, 음, 아마도 분명 카히텐의 성력을 갖고 있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헬리아스?’
오, 최악인데.
헬리아스의 성력으로 그릇을 바꿔 줄 수 있는 건 현재 헬리아스 황제뿐이다.
‘어, 좀 이상한데. 그럼 지금도 그렇지만 원작에서도 이안이 병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황실과 북부는 신전보다도 훨씬 사이가 나쁘니까.
‘이안의 성력이 헬리아스와 맞는다면, 대체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
혹시 원작에서 이안은 병을 숨기고 평생을 살았나. 그런 거라면 끔찍하기도 끔찍하지만, 조금 대단한데.
힘을 숨긴 찐따는 생각보다 할 만하겠지만, 병을 숨긴 강자는 꽤 힘든 포지션이다.
나한테도 금세 발작을 들킨 걸로 봐서 그 패턴이 일정한 것 같지도 않고, 본인이 참는다고 참아질 수준의 고통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원작에서는 어떻게 서술 한 줄 없이 멀쩡하게 묘사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일단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음, 나 쓸모없네!’
이안에게 내가 가진 정보는 무의미했다.
체이트와 코렐리아 모두 아르키드네의 성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와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도 무의미할 테니까.
‘나…… 정말 쓸모없다.’
나는 무심코 내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근육 하나 없고, 성력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손.
무력하다는 기분은 역시 몇 번을 느껴도 씁쓸하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약한 주제에 꼭 뭔가 하려다가 어그러지기 일쑤지.’
내가 묵묵히 있자 이안이 중얼거렸다.
“……그런 표정이 정말 사람 헷갈리게 만든다고.”
조금 전과 별다를 것도 없는 혼잣말이었다.
* * *
내 파혼이 결정되었다. 이안은 브링스턴 후작가에 파혼서를 보냈고, 나 역시 용기를 내서 브링스턴 후작에게 ‘잘 지내시죠, 아버지?’라는 말을 서두로 한 안부 인사 겸 반성문을 보냈다.
답장은 없었다.
아쉽다. 욕설 편지 한 번 더 받으면 원작이고 뭐고 다 떼고 무병장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코렐리아를 찾으러 가자면 결국 브링스턴 가를 거쳐야겠지.’
나는 브링스턴가에서 나를 버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브링스턴 후작은 레티시아보다 셀레나에게 관심을 가져왔으니, 사고까지 거하게 친 지금의 레티시아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쫓아낸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나가서 코렐리아를 찾아 나서야지.’
나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또 한 번의 이별을 준비했다.
케이시 양은 아가씨 없으면 이제 누구랑 포커를 치냐고 엉엉 울었고, 나는 대부인이랑 치면 딱이라고 새로운 타짜를 소개해 주었다.
케이시 양의 눈물이 쏙 들어간 걸로 보아 상대가 썩 마음에 들진 않는 듯했다.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해 주면서 나를 견제하다가 이후 꼬치로 우정을 다진 요리사는 이번 여름에 바비큐 파티하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가면 누구랑 하냐고 해서, 날 싫어했던 하녀를 붙여 주었다.
둘 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소인배라서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대부인은 10년이나 끌어놓고 결국 파혼이냐며 밥상을 뒤집으려다가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소곳이 앉았다. 이걸 모성애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대부인은 이안 한정으로 분노 조절을 참 잘했다.
제스는 내 파혼을 묘하게 반기는 분위기라 그냥 몰래 하이파이브하고 쿨하게 작별 인사를 마쳤다.
원해서 하는 파혼이긴 한데 이게 또 묘하게 떠나기가 싫다.
솔직히 오래 있었던 게 아니라서 델린 영지처럼 정들었다고 말하긴 뭐하고, 그냥 브링스턴 후작가로 돌아가는 게 싫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이겠지.
파혼을 결정했다고 곧장 성에서 쫓겨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수도로 갈 채비가 끝날 때까지 카히텐 성에 머물면서 코렐리아의 행방과 사술에 대한 단서를 캐며 시간을 보냈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난 무능력이 능력인지라 건진 건 개뿔 하나도 없었다.
우리 마카롱은 내가 데리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역시 레티시아의 기억을 들춰보고 브링스턴 후작가에 대한 빅 데이터를 만든 결과, 여기 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마카롱은 내가 코렐리아를 찾아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케이시 양의 본가에서 은퇴한 케이시 양의 부모님과 함께하기로 했다.
사람한테 정드는 데는 한오백년이 걸리는데 동물은 하루만 같이 있어도 정이 드는지라, 나는 마카롱을 끌어안고 조금 울었다.
문득 오래전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내보낼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더욱 괴로워졌다.
케이시 양은 마카롱이 옆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라고 했지만, 곧 떠날 사람이 옆에서 치대는 건 사정 모르는 동물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최근 마카롱을 멀리하고 있었다. 내게 와서 냥냥 펀치를 날려도 모른 척했고, 야옹야옹 울어대도 모른 척했다. 생전 안 하던 꾹꾹이를 해줄 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역시 고개를 돌렸다.
“미야옹.”
하지만 오늘의 마카롱은 유독 끈질기게 떼를 썼다. 내가 무시하려고 하자 발톱을 드러내기도 했다.
“캬옹!”
“아얏.”
나는 마카롱을 째려보았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까 마카롱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구르며 놀았기에 먼지를 이렇게 잔뜩 묻혀 온 거야?”
나는 꾀죄죄해진 마카롱의 털을 툭툭 털었다. 갈색 털이 기다렸다는 듯이 풀풀 날리며 거대한 먼지 뭉치를 툭 떨어뜨렸다.
“어?”
개중 유독 커다란 먼지 뭉치 사이로 하얀 조각이 끼어 있었다.
“이건…….”
먼지를 털어낸 종잇조각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레아 양, 살려 주세요.
글씨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피로 쓴 공포 영화 포스터 제목 같다.
단 한 문장뿐이지만 나는 이게 누가 쓴 글인지 단숨에 눈치챘다.
‘로체?’
이게 조각난 채 먼지 쌓인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는 말은 곧…….
‘로체, 카히텐령에 와 있는 건가?’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