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한편, 카히텐 대공령의 작은 숲속 오두막.
“야, 살쾡이. 쓸데없는 시도 좀 하지 말고 성력을 진득하게 모을 수는 없는 거냐?”
로체는 체이트가 늘어놓은 임시 오두막 한편에서 피투성이로 돌아온 그를 맞이했다.
“시끄러워.”
“성질 급하기는. 대체 지금까진 어떻게 참은 거야?”
카히텐 성의 방벽은 정말 대단했다. 아마 체이트가 본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어도 그걸 뚫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력이 아니라 마력으로 겹겹이 둘러친 방어벽이니. 근본부터 다른 힘이 맞붙으면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
심지어 현재의 체이트는 약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후회하고 있지? 응? 그냥 기차 타고 올걸, 생각하고 있지 않아?”
“…….”
로체가 키들거렸다.
“하여간 이상한 데에서 이성적이지 못하기는.”
체이트는 피딱지 앉은 손을 툭툭 털고 로체가 앉은 의자를 그대로 빼 버렸다.
“으헉!”
그대로 의자 아래로 고꾸라진 로체가 비명을 질렀다.
“이거.”
체이트가 의자의 먼지를 검지로 쓸어 보이며 말했다.
“제대로 안 닦았군.”
“아니, 어차피 임시 거처인데 굳이 열심히 청소할 이유는 없…….”
“닦아.”
“…….”
다시 알거지가 된 로체는 체이트의 곁에서 온갖 시답잖은 일을 거들며 살고 있었다.
북부라면 걸어서 델린 영지까지 이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로체는 그러지 못했다.
‘노숙은 피부 상한다고…….’
게다가 이제 델린 영지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어졌다. 그는 갈 곳 없는 불쌍한 엘프였다.
“다 닦았는데.”
“…….”
체이트는 의자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바닥 쓸어.”
“…….”
레아 양은 정말 좋은 사장님이었구나. 로체는 지금이라면 그녀를 진짜 사장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레아 양, 보고 싶습니다아…….’
체이트와 계기는 조금 달랐지만, 어느새 그도 레티시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돈은 엄청 많이 주니까.’
수도의 강퍅한 인심에 한순간에 다 잃긴 했지만, 기차역에서 체이트가 준 돈은 푯값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
한번 돈맛을 본 이상 쉽게 돌아갈 수는 없다. 아니, 사실은 돈이 아니라도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레티시아를 보고 싶은 마음은 같았으므로.
로체는 버티고 버텼다.
체이트가 조금씩 흑화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버틸 만했다.
며칠이 지나고 체이트의 성력이 거의 회복되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카히텐 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보통의 방비 수준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야, 너 다 회복됐다고 신나서 나가지 않았냐?”
체이트는 전보다 훨씬 심각하게 피떡이 되어 돌아왔다.
“그 미친 XX…….”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너, 설마…….”
카히텐 성이다. 이안 카히텐의 성.
당연히 그 안엔 이안 카히텐이 산다. 그리고 그는 체이트와 능력이 비등했다.
“싸웠냐.”
“…….”
“졌구나.”
“…….”
체이트의 잘생긴 얼굴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체이트와 이안의 능력은 막상막하였다. 힘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가정하에 체이트 쪽이 실전에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이곳은 이안 카히텐의 영역이었다.
원래 전쟁도 수비보다 공격이 열 배는 빡센 법이다.
애석하게도 체이트는 이안보다 열 배 강하진 않았다.
“너…….”
체이트가 이안에게 개같이 깨지고 입구 컷을 당한 그날.
“꼴이 참…….”
로체는 참았어야 했다.
“……푸흡!”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체이트가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시뻘건 눈으로 로체를 돌아보았고, 그렇게 지옥이 시작되었다.
* * *
며칠 후, 로체는 조난 신호를 보내는 섬사람처럼 초췌해진 몰골로 유리병에 쪽지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온 마력을 담아서 카히텐 성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유리는 방어벽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종이만 좌우로 팔랑팔랑하며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로체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제발 아무나 좋으니까…….”
레아 양한테 좀 전해줘…….
* * *
난 SOS 신호나 다름없이 보이는 쪽지를 주워 들고 고민에 빠졌다.
이런 과장된 쪽지를 보낼 만한 사람은 로체뿐이긴 한데.
‘적어도 위치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카히텐령은 대단히 넓다. 델린 영지가 시골에 단 하나뿐인 구멍가게라면 카히텐령은 도시에 있는 최대 규모 백화점이었다.
보통 미아 신고를 해도 몇 층 무슨 코너에서 잃어버렸는지 정도는 알려주지 않나.
얘는 왜 이렇게 센스 없이 쪽지를 보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일단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로체가 현재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나가 보면 어떻게든 얼굴을 보이겠지.
내가 나가려고 하자 당연하게도 케이시 양이 따라붙었다.
“이 앞에만 잠깐 나갔다 올 거라 안 따라와도 돼.”
케이시 양을 애써 떼놓고 카히텐 성을 나섰다. 성 자체도 에X랜드 뺨치게 넓어서 걸어 나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성안에 마차가 왜 그리 많은가 했더니.’
자주 안 나가서 몰랐다. 몇 번 나갔을 땐 전부 마차 타고 나갔는데, 역시 사람은 몸이 편하면 기억 세포가 일을 게을리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헉헉거리며 문지기 앞에 섰다.
“요 앞 가도만 나갔다 올 건데 성문 열어주실 수 있나요.”
“도망입니까?”
“저 파혼했는데요.”
“가출입니까?”
“아니 왜 그렇게 되는데…….”
“농담입니다.”
문지기 바꿔 주세요.
마력으로 겹겹이 둘러친 방어벽을 부분 해제하는 것만도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참 만에 문지기가 성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보안 카드와 공인 인증서 조합을 뛰어넘는 개빡센 도어 록 해제 과정을 거쳐 힘겹게 문을 열어 준 그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밖을 나섰다.
북부도 이제 완전히 날이 풀렸다. 한낮의 공기는 쌀쌀하다기보단 쾌청했고, 걷기 딱 좋은 날씨라서 가도의 풍경이 그림처럼 예뻤다.
‘나오니까 좋긴 좋네.’
가도를 잠깐 구경하다가 나는 원래 목적대로 로체를 찾았다.
‘어디쯤 있으려나.’
엘프는 어딜 가든 눈에 띄니까 수소문을 해보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상점 주인들에게 금발 엘프에 대해 물으려던 나는 몇 걸음 못 가 발목이 붙잡혔다.
말 그대로, 발목이 붙잡혔다.
“레……아…… 양…….”
노란색 해조류를 뒤집어쓴 액체 괴물이 기어 와서 내 발목을 틀어쥐었다.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
한낮에 이런 공포를 조성하다니, 색채 대비가 뛰어난 예술적 호러 무비네요. 저는 별점 3개 반 드리고 기절하겠습니다.
“으허…….”
자세히 보니까 괴물의 얼굴이 많이 곱상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까 귀도 뾰족한 것이 분장을 좀 엉성하게 한 게 아니고, 이거 너무 낯익잖아!
“……로체?”
“으허허허, 레아 양…… 보고…… 보고 싶었…….”
“죽지 마!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대화는 하고 가야지!”
나는 로체를 일으켜 세우고 미역 줄기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치워 주었다. 화사한 엘프의 얼굴이 이제야 드러났다.
뭔가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와중에 피부에서 번쩍번쩍 광이 나니까 이상하게 동정심이 안 든다.
“로체, 살아 있지?”
“끄어어어…….”
로체가 비척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나한테 손짓하는 걸 보니 따라오라는 뜻 같은데.
나는 미역 줄기를 따라 가도를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케이시 양한테 근처만 둘러보고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양심에 좀 찔리는구먼.
“어, 이건…….”
익숙한 통나무집이었다.
왕년에 목수 세계에서 한 획을 그을 것 같던 누군가가 보급형으로 왕창 만들어 놓은 그 집이다.
“이거…….”
“허어어엉! 허엉! 허엉!”
로체가 내 등을 밀었다. 들어가라는 소리 같다.
“…….”
나는 긴장된 상태로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휘익!
문을 열자마자 뭔가가 날아왔다.
“……!”
나도 모르게 로체를 방패로 써 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그를 바라보는데 로체가 따봉을 해 주었다. 뭔가…… 익숙한 것 같다.
날아온 건 다행히 말랑말랑한 과육이었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오렌지 조각을 한번 쳐다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밝은 데서 있었던 터라 눈이 잠시 낯을 가렸다.
난 잘 보이지 않는 시야에서 의지할 것을 찾아 허우적거렸다.
터억.
가슴 높이쯤에서 단단한 뭔가가 잡혔다.
동시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 ……체이트?”
퉁명스러운 음성이 뚝 멈췄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또 꿈인가.”
“꿈? 무슨 소리야? 너 왜 여기에…….”
“…….”
순간적인 침묵 뒤에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고, 순식간에 실내가 환해졌다.
나는 바로 아래 암체어에 앉아 있던 체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맞네, 너.”
“레티시아……?”
오만 가지 기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마지막에 남은 건 내게 고백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어…….”
나는 그에게 미안해해야 했다. 이렇게 마주 볼 면목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
볼에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그렇게 긴 시간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지난 3년의 이별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시간인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내가 북받치는 감정을 못 이기고 딸꾹질을 하자, 체이트가 내 머리를 끌어안고 도닥였다.
“체이트…… 히끅!”
“응, 괜찮아요.”
“나, 사과를, 히끅, 해야…….”
“아냐. 당신은 그럴 필요 없어.”
그가 내 머리를 쉴 새 없이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내게 평생 사과할 필요 없어. 그런 건…… 나만 하면 돼요.”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