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체이트의 손은 일반인보다 훨씬 뜨거웠다. 북부의 한기 속에서도 그의 손은 쉽게 식지 않았고, 꽁꽁 언 내 손을 맞잡아서 항상 녹여주곤 했다.
“체이트.”
“네, 여기 있어요.”
“체이트, 체이트.”
“괜찮아요.”
체이트는 내 머리를 몇 번이고 계속 쓰다듬었다. 내 몸이 소모품이라면 이대로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품에서 바보처럼 딸꾹질을 하며 울었고, 그는 내 숨이 고르게 될 때까지 인내심 깊게 기다려 주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항상 눈치 없고 느린 나를 기다렸다.
눈물이 서서히 멎자 눈이 뻐근했다. 체이트가 내 눈가 위로 손을 올렸다. 화한 느낌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아리던 눈이 한결 편안해졌다.
‘성력을 썼구나.’
덕분에 눈물로 뿌옇게 변했던 시야도 선명해졌다. 나는 체이트의 오뚝한 코와 긴 속눈썹, 그 아래의 작은 눈물점과 날렵한 턱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웃기는 사실은, 그 역시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레티시아, 어떻게 여길 찾아왔어요?”
나는 조용히 로체를 가리켰다. 그는 우리 뒤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하, 하하…… 이제 성불할 수 있겠다…….”
정말 뭔지는 몰라도 상당한 고초를 겪었나 보다.
체이트도 로체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로체가 심적으로 지친 모습이라면, 체이트는 외적으로 상처가 많았다.
“너 왜 이렇게 여기저기 다쳤어? 신전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체이트가 손사래를 쳤다.
“이런 자잘한 상처는 어차피 금방 나아요. 걱정하지 마요.”
“…….”
난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에 보이는 상처들을 매만졌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구에에에엑.”
로체는 그런 체이트를 보고 토를 했다.
기나긴 상봉을 하고서야 나는 조금 이성을 되찾았다.
신전에 있어야 할 체이트가 북부에 있었다. 나도 학습이라는 걸 하긴 하는 인간이기에, 일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 불안해졌다.
“너…… 여기 있어도 돼?”
“응. 괜찮아요. 이번엔 절차 밟고 나왔으니까.”
“아…….”
무단 외출이 아니라니 그나마 좀 안심이 된다.
“레아 양 그거 반만 맞…… 컥.”
로체가 오렌지에 얻어맞았다. 이번엔 껍질이 그대로 붙어 있는 딱딱한 오렌지였다.
“이게 엘프 피부를……!”
“풉.”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
“……레아 양.”
로체가 울먹거리며 다가와 나를 끌어안으려고 하다가, 체이트에게 이마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
너네, 여전히 사이 안 좋구나.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로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체이트를 돌아보았다.
“…….”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불쑥 달아올랐다. 그가 내게 했던 고백이 떠오른 탓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예전처럼 물색없이 행동해 버렸다. 모르고 하면 그냥 쓰레기지만 알고도 이러는 건 폐기물이었다.
나는 체이트의 품에서 벗어나 겸연쩍게 헛기침을 했다.
“큼…… 근데 왜 온 거야?”
“보고 싶어서.”
“……크흠.”
머리에 열이 잔뜩 오른 게, 아마 이대로 가면 내 머리, 순조롭게 활화산으로 분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유, 왜 이렇게 덥지?”
“여기 북부인데.”
“……내가 요즘 더위를 많이 타.”
체이트는 웃으며 내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시원하게 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그의 손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쳐냈다. 그는 손쉽게 밀려났다.
“이런 건 그만하자.”
“…….”
내 손가락을 빤히 보던 그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래요, 그럼.”
난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나 이제 돌아가 봐야 해.”
그의 얼굴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결혼, 때문인가요.”
“아니!”
빠르게 부정했다.
“그건 아니고…… 케이시 양이 걱정할 거라서…….”
“케이시 양?”
“아, 카히텐 성에서 일하는 시녀인데…….”
아차. 나도 모르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나절을 여기서 보낼 뻔했다.
“아무튼!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어.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하고…….”
“돌아가다니요?”
체이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 그게.”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나 파혼하게 됐어.”
“……파혼?”
“응.”
“…….”
체이트는 안면이 굳은 채 눈만 깜박거렸다.
“……파혼?”
그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똑똑한 애가 왜 갑자기 저럴까 싶어서 로체를 돌아보니 로체의 얼굴도 비슷했다.
“파혼이요? 레아 양, 카히텐 대공이랑 파혼하는 겁니까?”
“으응. 그래서 당분간은 수도로 갈 준비를 하느라고 바쁠 것 같은데…….”
“워프하죠.”
체이트가 말했다.
“당장.”
워프? 워프가 뭐지.
로체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걸로 봐서 그리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레아 양! 저놈 말 듣지 마세요!”
아니나 다를까, 로체가 끼어들어 소리쳤다.
“워프 그거 한번 하면 애가 완전히 맛이 가거든요? 그때부터 그냥 무능력한 살쾡이 한 마리…… 푸헉!”
토마토가 로체의 안면에 직격했다. 아니, 대체 저 과채들은 다 어디서 구해온 거야?
로체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워프는 단번에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신성 마법인데, 성력을 과하게 소모해야 해서 시전자에게 부담이 크다고 했다.
내가 그런 걸 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니, 마차를 타든 기차를 타든 도착만 하면 그만인데 뭘 그런 걸로 워프까지 해?”
“제 말이요!”
로체가 한이 맺힌 사람처럼 맞장구쳤다.
“어차피 며칠 있으면 떠나야 해.”
“그럼 같이 가요.”
“응? 너 신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당장은 괜찮아요.”
내가 계획해서 계획대로 된 일이 없듯이, 체이트가 괜찮다고 해서 진짜 괜찮았던 일이 없었다.
나는 거절했다.
“할 일 다 마치고 나중에 수도로 와. 브링스턴 후작가로.”
그의 얼굴에 불만이 잔뜩 서려 있었다. 나는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나, 누굴 좀 찾으러 갈 생각이거든.”
“누구?”
순수한 눈망울로 묻는 그를 보며 나는 고민했다. 이제는 감추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세계에선 원작과는 다른, 내가 모르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물어보아야 했다.
“체이트, 너 혹시…… 코렐리아라는 여자 알고 있어?”
체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렐리아요?”
“그래. 너처럼 붉은 눈을 한 여잔데.”
“붉은 눈…….”
그가 눈을 내리깔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래……?”
체이트도 코렐리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나. 나는 혹시 몰라서 덧붙였다.
“혹시라도 그 여자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가 생기면 나한테 알려줄 수 있어?”
“그 여자가 레티시아가 찾는 여자인가요?”
“맞아.”
체이트는 침묵했다.
습관처럼 내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그가 입술을 뗐다.
“그럼 같이 찾으러 가요.”
“응? 너랑?”
“네.”
“하지만 너…… 바쁘잖아.”
“안 바빠요.”
“…….”
체이트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한가할 리는 없다. 하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가 단신으로 여자를 찾는 것보다는 체이트를 통해 신전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코렐리아는 아르키드네의 성력을 지닌 존재니까, 신전 측에서도 그녀를 만나는 건 득이 될 것이다.
다만 사적으로 염려스러운 건 역시…… 체이트의 마음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손등 위로 뜨거운 손이 포개졌다.
“레티시아, 당신 곁에 있는 게 내 행복이에요.”
“…….”
“나를 행복하게 해 줘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나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악수하듯 잡았다.
“대신 무턱대고 따라오지 말고 천천히 와. 나도 네가 올 때까지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날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아요.”
체이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왠지 가슴이 아릿해져서 시선을 피하게 되는 미소였다.
* * *
체이트와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오는데 로체가 따라붙었다.
“너 체이트 안 따라가?”
“……저는 레아 양이 좋아요.”
“……?”
로체는 독립적인 성향의 엘프 종족인 주제에 은근히 의존적인 경향이 있어서, 내가 가면 체이트에게 붙을 것 같긴 했다. 그런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가 살이 쏙 빠졌다.
“너 괜찮아?”
“아뇨…….”
로체가 무슨 기억을 떠올렸는지 혼자 미친 사람처럼 헤헤거렸다.
해탈했구나.
“레아 양, 무슨 여자를 찾는다고 했죠? 저도 같이 가요.”
“너 노숙 싫어하잖아. 사람을 찾으려면 노숙은 필수야.”
“아, 그건…….”
로체는 눈썹을 쓱쓱 문지르다가 샐쭉하게 웃었다.
“가끔은 바깥 공기도 쐬고 그래야죠, 뭐.”
“…….”
로체는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안 하던 짓을 하려는 걸까.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로체가 평소처럼 경박한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요, 귀족 가문 하인이면 돈 많이 받을까요?”
“……미리 말하는데 수도는 이종족에게 박해.”
“아, 그거라면.”
로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귀가 안으로 쏙 말려 들어갔다.
“어떻습니까?”
“……대단하네.”
“그쵸? 저번에 이걸 까먹고 수도 기차역 앞에 서 있었다가 그만…….”
로체는 주먹을 입에 물고 울먹거렸다. 쟤도 쟤 나름대로 힘든 일이 많았나 보다.
“너도 체이트처럼 사실 어디 엘프 집단의 촌장이라거나 뭐 그런 거 아니지?”
로체가 깔깔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래. 그랬으면 8년 동안 그렇게 한량처럼 있지도 않았겠지…….”
돈은 오지게 밝히면서 버는 족족 써대는 우리 로체, 제발 빌붙어 살 생각 말고 건실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로체가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실없이 웃었다.
“돈 들고 저승 갈 것도 아닌데 손에 쥐었으면 즐겨야죠.”
“너는 꼭 내일 갈 것처럼 쓰는 게 문제야.”
“하하.”
로체는 뒷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 그런데 레아 양. 아까 코렐리아라고 했나요?”
“응. 너 혹시 알아?”
“아뇨. 그냥 한번 물어봤어요.”
“……그래. 네가 알 리가 없지.”
* * *
내가 혹을 하나 달고 들어오자 케이시 양은 깜짝 놀라 로체를 바라보았다.
“이, 이분은 누구예요?”
“나랑 같이 수도로 갈 사람.”
“헉.”
“레아 양,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로체가 반반한 얼굴을 앞세워 번드르르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브링스턴 영애를 수도까지 호위할 기사입니다.”
“…….”
본인 소개가 더 이상하다는 건 정녕 모르는 걸까.
착한 케이시 양은 로체의 말도 안 되는 인사에도 까르르 웃으며 이름을 물었다.
“로체라고 불러 주세요.”
“어머, 이름이 굉장히 짧으시네요.”
“애칭입니다.”
“애칭이었어?”
난 놀라서 물었다.
“그럼 이름인 줄 알았습니까? 엘프가 사는 세월이 몇 년인데, 수명이 길면 이름도 길어지는 법이에요. 이름이 길어지면 줄여 쓰게 되는 법이고.”
몰랐다…….
내가 벙쪄서 있는 와중에 이안이 제스와 함께 홀로 나왔다. 이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로체를 발견했다.
“넌…….”
“대공 전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한때 전하의 커피를 내린…….”
나는 빠르게 로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우연히 만나서 데리고 왔어요. 저와 함께 수도로 가려고 하는데…… 잠시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이안이 미간을 움찔거렸다.
“……마음대로 해.”
그가 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기어코 들어왔나 보군.”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