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안이 체이트의 침입 시도를 눈치챈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파혼 전이었지.
“…….”
그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왜 요즘 파혼 전과 후로만 기준이 나뉘는지 모르겠다. 요새 머릿속에 든 생각이 그것뿐이라 그런가.
유치한 심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 영역까지 침범해 가며 레티시아를 노리는 그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짓뭉개고 깔아 눕혔다.
인정하기 싫지만 제 영역이 아니었다면 체이트 폴린을 그토록 압도적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인 엘프가 안으로 들어온 걸 보면, 결국 레티시아는 그와 조우했음이 분명하다.
‘방어벽이 깨진 흔적은 없었어.’
체이트 폴린은 끝까지 제 성에 침입하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레티시아를 밖으로 유인할 수 있었을까?
“레아 양, 저 초상화 비쌀까요?”
“선대 대공 전하의 초상화인데 비싸긴 엄청 비싸겠지.”
“오…… 팔면 얼마 정도?”
“글쎄. 일단 그 전에 네 손목이 잘리지 않을까?”
이안은 레티시아와 시답잖은 한담을 나누는 엘프를 멀리서 노려보았다.
하찮게만 여긴 남자였지만,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체이트 폴린이나 레티시아의 최측근에 있었다.
엘프가 인간과 이토록 가깝게 유대하며 지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수상해.’
이후 이안은 몰래 제스에게 로체의 뒷조사를 맡겼다.
* * *
한편, 체이트는 남부로 돌아가야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레티시아가 그리하라고 했으므로.
마음 같아선 이대로 안타카스 주교와 대주교직을 거래하고 레티시아 옆에서 붙어살고 싶었지만, 최근 황실의 행태를 보자면 쉽게 직위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레티시아의 동생인 셀레나 브링스턴이 황제의 후처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레티시아가 그 음흉한 황제와 인척 관계가 된 이상, 그의 시커먼 속이 다 드러날 때까지 체이트는 권력을 갖고 있어야 했다.
안타카스 주교는 체이트가 돌아오자마자 황실의 상황을 물었다. 전처럼 그를 경계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느낀 거겠지.
지금까지 황실이 이렇게 대놓고 신전에게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다. 현 황제가 최초였다.
“따지고 보면 선대 대주교님은 선황과 교류하시던 분이었죠. 현 황제와는 그저 그 관계를 현상 유지 정도로 이어간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안타카스 주교가 말했다.
“이번 황제의 야심이 남다르다는 걸 안 이상, 신전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되겠습니다.”
그는 머리털은 없어도 능력은 있는 남자였다. 오랫동안 신전에 머물면서 쌓아온 인맥으로 노련하게 주교들을 규합한 그는 체이트의 우군이 되었다.
“대주교님,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뭔가요.”
체이트가 물었다.
안타카스 주교가 한층 더 근엄한 낯으로 말했다.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해석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래요. 해석이 끝나면 공표 여부를 정하죠.”
문득 황제의 말이 생각났다.
신탁이 내리거든 자신에게만 따로 귀띔해 달라는 말.
조금 이상한 소리였다.
신탁을 공표하면 아무 쓸모없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오로지 제게만 알려달라고 했다.
마치 신탁이 공표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걸 예측하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황제는 자신을 신전에서 빼낸 여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붉은 눈의 여인.
공교롭게도 오늘 레티시아가 언급한 코렐리아가 그 여인과 동일 인물인 듯했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붉은 눈이 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체이트도 알고 있었으니까.
체이트는 레티시아에게 코렐리아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면 자신의 어둡고 음습한 과거를 들춰내야만 했다. 구태여 자신이 신전 지하에서 하수구의 개처럼 살아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다 쳐도, 레티시아는 어떻게 그 여인을 알고 있었을까?’
황제가 제게 거래의 대가로 그 여인의 정보를 팔려고 한 이상,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대주교로서도, 체이트 폴린으로서도 코렐리아를 찾아야 했다.
또한 레티시아를 따라가 그녀를 지켜봐야 했다.
“신탁의 해석이 끝나고 공표 여부가 가려지거든, 주교께 자리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황실과 관련하여 확인해두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안타카스 주교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브링스턴 후작가는 분주했다.
장녀가 돌아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10년간의 긴 약혼 끝에 결국 파혼으로 끝을 맺은 결혼 장사.
이는 브링스턴 후작의 수치였고, 나아가 집안의 수치였다.
“으음…….”
후작은 골치가 아파졌다.
하필 후계도 못 될 여자애를 둘이나 낳았으니 잘 키워서 비싸게 팔려고 했건만.
과년한 나이에 파혼 통보나 받고 돌아오다니, 이건 어디 쓸 데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물론 친자식이니만큼 살아서 돌아온 것은 기쁘다. 하지만…… 기왕이면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지 않나.
잘 팔릴 시기에, 제 선에서 적당히 무마할 수 있을 즈음에.
장녀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
후작은 그녀의 일탈을 곱게 넘어가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 * *
한편, 브링스턴 후작가의 차녀인 셀레나 브링스턴은 제 아버지보다 조금 더 냉정했다.
‘그냥 시체를 찾는 편이 나았어.’
그녀는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간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모든 방면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해 왔다. 뭘 하든 대충이고 생긴 것까지 대충인 언니와는 천양지차였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니와 카히텐 대공의 구두 약혼이 정식 혼약으로 확정되었을 때.
그녀는 부러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녀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좋은 혼사를 얻어내다니, 불공평했다.
카히텐 대공이 10년간 언니를 버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질투심에 오장육부가 배배 꼬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파혼당한 언니는 처치 곤란한 집안의 골칫덩이였고, 자신은 장차 황실의 안주인이 될 귀한 몸이었다.
언니를 압도했다는 생각에 뿌듯한 한편, 언니의 존재가 심히 거슬렸다.
자신은 머잖아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인이 될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는 어떠한 작은 흠도 있어선 안 된다.
셀레나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내 앞길을 막는다면 언니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발 쥐 죽은 듯 있다가 멀리 사라져 줘, 언니.
* * *
며칠 후, 레티시아는 로체와 함께 떠났다.
그 짧은 새에 무슨 인맥들을 그리 열심히 쌓았는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행렬만 한 무더기였다.
이안은 그들을 한 명 한 명 끌어안아 주는 레티시아를 2층 집무실 창을 통해 지켜보았다.
“내려가 보시지 않을 겁니까?”
제스가 물었다.
“됐어. 이제 나와 관계없는 여자다.”
“…….”
제스가 실눈을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관계없는 여자가 떠나는 걸 저렇게 집요하게 쳐다볼 건 또 뭐람.’
지금 제게 맡긴 업무도 그렇다. 체이트 폴린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레티시아와 더 가까운 사람의 뒷조사라는 것쯤, 듣자마자 알아 버렸다.
“확인은 끝났나?”
“네. 서른두 개의 엘프 촌락과 엘프 관련 역사서를 전부 뒤지고 대조해서 확인했습니다.”
제스가 이안의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본명은 글래디안 바이드로체. 다들 애칭처럼 로체라고들 부르지만, 사실 성씨를 줄인 겁니다.”
“글래디안?”
이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예, 100년 전 아르키드네의 재림 때 제물을 데리고 도주했던 그 글래디안 바이드로체가 맞습니다.”
“하.”
이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민중의 역적이 여기 있었군.”
신들은 이따금 신탁으로 자신의 재림을 예고한다.
그 기간은 백 년이 될 수도, 천 년이 될 수도, 심지어 만 년이 될 수도 있다.
100년 전, 아르키드네 신전에 신의 재림을 알리는 신탁이 내렸다.
신도들은 성수를 몸에 뿌려가며 축제를 즐겼고 광신도들은 미쳐서 제단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카히텐은 존재 자체가 소멸하였고, 헬리아스는 만물에 무심했기에 아르키드네 외에 범인(凡人)이 존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신은 없었다.
그게 바로 아르키드네가 최다 신도를 보유하게 된 이유였다.
당시 이안은 출생 전이었기에 그 시절의 일들은 줄글과 그림으로만 겪었지만, 그들의 열기만은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집단 광기라고 할 수 있겠지.’
원본이 보존된 고문서의 흐트러진 필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단체로 미쳐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런 무의미한 짓을 벌였을 테고.’
신탁에는 신의 재림 날, 현신할 그릇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장 강한 성력을 타고난 그릇.
그들은 당시 신의 가호를 받은 ‘성녀’를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성녀가 화형대에 올라 죽음에 이르기 직전, 귀가 길쭉한 이종족이 그녀를 납치했다.
글래디안 바이드로체였다.
이후 그는 100년 동안 수배되었다. 무려 100년. 엘프의 수명을 고려한 수배령이었다.
북부를 제외한 다수 지방에서 이종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진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그자가 아직 살아 있다고.”
이안이 눈을 좁혔다.
“신기하군.”
100년 전 아르키드네 신전의 역적이었던 자와 현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한집에서 머물렀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집에.
“벼락 맞기보다 어려운 우연이군.”
하지만 레티시아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느냐 하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출생부터 평범했다. 모르는 여자의 배를 빌려 태어난 혼외 자식도 아니었고, 뒤늦게 입양된 고아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서 깊은 수도 귀족, 브링스턴 후작가의 장녀였다.
하지만 이 모든 정보들을 나열해 놓고 보자면, 그녀의 평범함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어떻게 이렇게 범상한 여자의 집에 범상치 않은 둘이 한데 있을 수 있었는지.
‘그러고 보면 내 병에 대해 반복적으로 물은 것도 예사롭지는 않아.’
그건 단순히 호기심에 질문하거나, 염려스러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병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을 때, 레티시아의 눈은 의지로 똘똘 뭉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해답을 알고 있는 문제의 답안을 확인하려는 사람 같았다.
‘해답을 알고 있다, 라.’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제 병의 치료법을 안다. 아니…… 만약 알았다면 그 사실로 저를 협박하든, 아니면 치료법을 순순히 알려주든 했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그저 질문만 반복적으로 늘어놓을 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려던 그때.
불현듯, 그의 머리에 어떤 기억이 스쳐 갔다.
‘보고 싶었어요, 카히텐 님.’
레티시아는 혼몽에 빠진 채 저를 그렇게 불렀다. 카히텐 님, 이라고.
드워프도 아닌 여자가…….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