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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59화 (59/140)

59화

나는 자작나무 숲에 있었다.

호수의 얼음은 어느새 녹아서 하늘의 구름까지 비추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외따로 서 있었다.

‘카히텐 님.’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평소의 나는 온종일이라도 그를 기다릴 수 있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카히텐 님, 빨리 와주세요…….’

투명한 눈물이 호수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이윽고 나는 호수의 갈대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이마 아래로 깍지 낀 두 손을 받쳤다.

‘저는 곧 떠나야 한단 말이에요. 제발 빨리 와 주세요…….’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비루먹은 육신을 뜨거운 바다로 끌고 내려가기 전에, 그가 이 호수 아래로 나를 찾아와 주길 고대하면서.

하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 * *

“……아 양.”

덜컹거리는 움직임 속에서 뭔가가 내 어깨를 격하게 흔들었다.

“……레아 양!”

“으헝……?!”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나를 아주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로체였다.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잠을 잘 수가 있나요. 그 쇠심줄 같은 성격, 가끔 부럽네요.”

“뭐야. 비꼬지 마.”

나는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내며 로체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왔어?”

“방금 수도 성문을 지났어요.”

“오, 드디어.”

마차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수도 전경은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빙의 전 레티시아는 여기서 평생을 살았지만, 나는 그저 최초의 며칠을 지냈을 뿐이었다.

‘아차, 놀러 온 관광객 기분을 낼 때가 아니지.’

브링스턴 후작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극심한 냉대를 받을지 엄두도 나질 않는다.

“로체, 어쩌면 너 쫓겨날지도 몰라.”

“왜요?”

“내가 꽤 미움받을 예정이거든…….”

“음, 그건 좀.”

“바로 버리기냐? 너무하네.”

로체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아녜요, 일단 버텨 보죠. 레아 양 성격이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호랑이랑 친구 먹고 같이 고기 구워 먹을 테니까.”

“…….”

내 가느다란 팔목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나는 입만 산 개구리였다. 팔짝팔짝 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단 말이다.

귀족들의 타운하우스가 밀집해 있는 거리로 들어서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로판 속 건물들이 줄을 지었다.

나는 고리짝에 봤던 복수물 로판이나 가족 후회물 로판을 회상했다.

‘계략, 암투, 질시…… 그런 거 장난 아니겠지.’

이제 나는 다락방을 배정받을 거고, 까칠한 하녀가 하루 한 번씩 내게 꿀꿀이죽을 줄 거야. 내 여동생은 내가 있지도 않은 보석을 훔쳐갔다며 역정을 내겠지…….

실제로 레티시아가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현실 다를 거라고 행복 회로를 돌리기도 난처했다.

“도착했습니다.”

“으허어, 벌써……?”

마차가 멈춰 선 브링스턴가 타운하우스 정문이 꼭 케르베로스의 아가리로 보였다.

“들어갈까요?”

“후우, 잠시만.”

난 심호흡을 세 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예이.”

로체가 제법 몸종에 어울리는 경박한 목소리를 내며 짐 가방을 들었다.

“자.”

그리고 다시 내게 맡겼다.

“너, 일할 생각은 있는 거지?”

“그럼요. 괜히 시중을 들었다가 레아 양이 미운털이라도 박힐까 두려운 거지요.”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으니.

나는 양손에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 * *

“어서 오십시오, 레티시아 아가씨.”

집사는 정중했다. 그가 내 짐 가방을 받았고, 하녀장이 다가와 안쪽 응접실로 나를 안내했다.

난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걸어 들어갔다.

‘뭐지? 생각보단 괜찮은데?’

이런 얘기는 마음속으로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플래그다.

나는 무의식중에 플래그를 씨게 세워 버린 것이다.

“왔느냐!”

브링스턴 후작이 두 팔을 뻗어 나를 맞이했다. 옆에 있던 후작 부인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콕콕 찍었고, 셀레나도 일단 겉으로는 미소 짓고 있었다.

“10년 만이구나.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리 살아서 돌아오다니, 아비는 그저 기쁘다.”

“그…… 저도 기쁘…….”

아, 양심 찔린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어.

나는 말미를 얼버무리기 위해 머쓱하게 웃었다.

브링스턴 후작에 이어 후작 부인이 나를 끌어안았다. 진한 화장품 냄새가 코로 훅 끼쳤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

“이쪽은?”

후작 부인이 로체를 가리켰다.

귀를 가리고 멀끔한 청년의 모습이 된 로체가 머리에 쓴 베레모를 손으로 내리며 인사했다.

“로체입니다. 레티시아 아가씨의 둘도 없는…….”

“하인이에요.”

“그렇구나.”

후작 부인은 하인이라는 말에 곧장 로체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언니! 오랜만이야!”

이어서 셀레나가 내 목을 안고 매달렸다. 장성한 스무 살 처자는 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더 컸다. 나는 그대로 두어 걸음을 휘청거렸다.

“언니, 보고 싶었어!”

“어, 나도…….”

뭐지. 얘 이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찰나.

의문은 한순간에 해소되었다.

“자, 찍겠습니다!”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아, 나 눈 감은 것 같은데.

“저 사진 기사분은 누구신지……?”

“우리 얘기를 취재하고 싶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안에 들였단다. 혹시 불편하니?”

“아, 아니요.”

그렇군. 수도 같은 번화한 곳에는 신문이 있었지.

“자자, 한 장 더 찍을게요. 거기 하인, 훤칠하니 좋네. 옆에서 일하는 척해요.”

“아뇨, 저는…….”

로체는 왜인지 구석에 숨었다.

이상하다, 본인 얼굴에 자신감이 충만한 애라서 당연히 좋다고 하며 자세를 잡을 줄 알았는데.

다른 후작가 사람들은 능숙하게 자연스럽고도 감동적인 재회의 현장을 꾸며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사진을 찍고, 인터뷰까지 마친 나는 금세 녹초가 되어 있었다.

기자들이 물러가고 후작가 사람들만 남았을 때, 나는 응접실 소파에 널브러졌다.

“야, 비켜.”

“……으악!”

곧바로 끌어내려졌다.

내 옷소매를 잡아서 내던지다시피 한 셀레나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뭐라고 거길 앉아? 먼지 낀 옷으로 내 자리에 엉덩이 부비지 마.”

……상처 주네.

하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이 남았으므로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어디 앉으면 될까?”

“앉긴 뭘 앉아.”

셀레나가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직전의 화사한 미소와 선한 눈매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 피곤하니 이쯤하고 내일 생각해 보죠?”

“그래. 레티시아, 네 방은 필립에게 물어봐라.”

브링스턴 후작이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너…… 이 나쁜 년, 어미를 배신해?”

후작 부인은 토끼 눈을 하고 내 어깨를 짤짤 흔들다 제풀에 지쳐 시선을 외면했다. 이쪽은 그래도 좀 인간적이었다.

“저, 그럼 제 방은…….”

“이쪽입니다, 아가씨.”

필립이라는 집사가 나를 데리고 갔다. 뒤에서 로체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제 방은…….”

로체의 말은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예전에 아가씨께서 쓰시던 방은 현재 셀레나 아가씨의 옷방으로 쓰고 있습니다.”

“와, 그 방 엄청 큰데. 걔는 옷이 그렇게 많아?”

“…….”

무시당했다.

음, 그래. 그럴 것 같았다.

“다른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필립이 나를 데리고 간 방은 전보다 조금 작은 객실이었다.

‘그래도 다락은 아니네. 이 정도면 대우 나쁘지 않은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철컥, 소리가 났다.

“……어? 필립?”

방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돌렸지만, 철컥철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설마 나…… 갇힌 거냐?

“……왜지? 화가 안 나.”

이게 그…… 묘하게 납득이 가.

나는 일단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며칠간 마차를 타서 그런가. 뼈 마디마디가 다 쑤셔왔다.

“어우, 피곤해.”

침대는 딱히 푹신하지도, 그렇다고 엄청 딱딱하지도 않았다. 대우가 생각보다 무난해.

너무 무난한데…….

‘불안하단 말이야.’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불안의 원인을 하나 찾아냈다.

내가 배정받은 이 방은 ‘원래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방’도 ‘다락방’도 아닌, ‘객실’이었다.

‘객실이라. 방을 미리 마련해 놓지 않아서 임시로 머물라고 준 건가?’

며칠 후, 나는 그게 수도에서 씨알도 안 먹힐 순진하기 짝이 없는 가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슬 감금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후작이 나를 쫓아낼 것 같진 않았기에 대신 가문을 나갈 수 있을 만한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나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세수할 물이랑 새 의복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하녀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침부터 하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식당이 아닌 응접실이었다.

늙수그레한 중년의 남성분이 브링스턴 후작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발견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티시아, 잘 잤느냐! 인사해라, 이쪽은 샤닝 백작, 내 오랜 사냥 친구란다.”

“아, 안녕하세요. 백작 각하. 레티시아 브링스턴입니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내 이름인데 이렇게 입에 안 붙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뵙소, 브링스턴 영애. 조그마할 때 한번 보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다행히 훌륭하게 잘 컸구려.”

다행히? 어감이 좀…….

브링스턴 후작이 이 묘한 상황에 쐐기를 박듯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아내와 사별하고 새 장가에 들 준비를 하고 있다지 않니.”

“아, 축하드립니다.”

“물론 축하해야지. 네 결혼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예……?”

……예?

나는 시선을 돌려 샤닝 백작이라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가 훌렁훌렁한 머리를 슬쩍 넘기며 변색 된 치아를 드러내고 헤실거렸다.

“저기 죄송한데…….”

보는 사람 대단히 불안해지니까 그리 수줍게 웃지 말아 주시겠어요?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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