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내 방이 가문 사람들이 놀리는 침실 중 하나가 아니라 객실인 것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당장에라도 뺨따귀를 갈길 것처럼 육두문자 가득한 편지를 보냈던 브링스턴 후작의 태도가 각오한 것보다 평온한 이유를 고민했어야 했다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의 나는 코렐리아에 대해 생각하느라 나 자신을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레티시아, 네가 어린 나이도 아닌데 아직 미혼인 건 사교계에서 커다란 흠이야. 알고 있겠지? 어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짝을 지어야 한다는 걸.”
‘아, 그래서 좋은 사람이 아버지 친구분이십니까?’
나는 조금 질린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브링스턴 후작은 처음부터 나를 판매 가치가 떨어진 상품 취급하고 있었다.
상품에 흠이 갔다고 오래 열을 내고 있을 필요도 없었던 거지. 그저 빨리 헐값에 팔아치울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아버지, 저 파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파혼? 네가 누구를 만났다고? 하하, 이 아비는 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아, 아예 없던 일 치시겠다?
과연 상대도 그럴까?
나는 샤닝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가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카히텐 대공과의 약혼이었다. 백작의 지위에서 대공의 과거를 묻는 건 부담스럽겠지.
“샤닝 백작, 백작께선 뭔가 짚이는 바가 있소?”
하지만 브링스턴 후작은 굳이 난처해하는 샤닝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고 싶은 듯했다.
“저는…… 하하.”
샤닝 백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브링스턴 후작의 말에 완전히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고 내게로 눈을 돌렸다.
“브링스턴 영애, 염려할 거 없습니다.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량이 깊어지는 법이니, 저는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긴 뭘 이해하나. 내가 이해 못 한다.
두려움에 몇 번이고 회상을 반복했던 원작 초반부, 의사가 죽어가는 나를 두고 던진 대사가 머리를 빙빙 맴돌았다.
‘대공비의 자궁 자체가 임신에 적합하지 않…….’
이 고루한 세계에서 목적 없는 결혼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조만간 이 후작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는 샤닝 백작을 떨굴 방법을 재빨리 모색했다.
비록 레티시아의 몸은 무능했지만, 내게는 대공가의 대부인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조잡한 장기가 하나 있었다.
난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고 대답했다.
“뭐, 좋아요. 아버지, 결혼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백작 각하께 특별히 차라도 한 잔 올리죠.”
“오오, 브링스턴 영애가 직접?”
샤닝 백작이 반색했다.
“네, 제가 이래 봬도 차와 커피에 아아아아주 조예가 깊답니다?”
브링스턴 후작의 눈초리가 예리해졌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나오는 내가 미심쩍은 눈치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를 막아서지는 않았다.
그가 정한 결혼으로부터 냅다 도망간 나는 반항적이었지만, 그 전까지 그가 알고 있던 레티시아는 아주 순종적인 여자애였으니까.
그가 나를 만만히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게 있어 호재였다.
나는 하녀가 내어온 차 세트로 익숙하게 주전자의 물을 식히고 찻잎을 우려냈다.
샤닝 백작이 그런 내 뒤로 슬쩍 달라붙었다.
“수구를 다루는 솜씨가 정말 능숙하군요, 영애. 과연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귀족 간 사교 예절에도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나는 억지로 웃어 주었다. 더 큰 엿을 선사하기 위한 인내였다.
“오호호, 제가 이런 걸 좀 좋아해서.”
“다도는 레이디가 갖기에 좋은 취미죠. 다행히 지난 10년이 영애의 품격을 떨어뜨리진 않은 모양입니다.”
“……하하. 예, 뭐.”
카페 장사하기 전에 눈동냥으로 대충 배운 건데 뭐래. 너 사실 차 우리는 법 같은 거 하나도 모르지?
나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찻잔을 건넸다. 특별히 브링스턴 후작에게도 한 잔 내어주었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잔을 쥐었다.
“자, 여기요.”
“오오, 이게 바로 브링스턴 영애의 고운 손으로 직접 우린 홍차!”
샤닝 백작이 과장되게 눈을 반짝였다.
“어서 드셔 보세요.”
샤닝 백작과 브링스턴 후작은 서로를 한 번씩 보고는 동시에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오오, 정말 맛이……!”
“맛이, 뭘까요?”
“마, 맛이…… 웁.”
구에에에엑.
샤닝 백작이 허리를 숙이고 토악질을 했다. 브링스턴 후작도 퍼렇게 질린 얼굴로 입을 막았다.
“너…… 차에 무슨 짓을 한 게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사실 했다.
나는 커피는 조금 독특하게 내리지만, 홍차는 그런대로 멀쩡하게 만들 줄 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다.
즉, 나는 음료를 환상적으로 맛있게 만드는 법은 몰라도, 토 나오게 맛없게 만드는 법에는 도가 튼 것이다.
나는 샤닝 백작 때문에 더러워진 카펫을 보고 코를 붙잡은 채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작게 한마디 해 주었다.
“으, 냄새.”
백작이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브링스턴 후작이 부글부글 끓는 주전자처럼 앉아서 읊조렸다.
“레티시아, 이따가 따로 좀 보자꾸나.”
* * *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야말로 맞을 줄 알았다. 브링스턴가를 허둥지둥 나간 샤닝 백작을 보는 후작의 얼굴은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사내였으면 너는 뼈가 부러지도록 맞았을 거다.”
과거에 브링스턴 후작이 어린 레티시아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어벙한 면이 있는 그녀가 무슨 실수를 할 때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윽박을 지르곤 했다.
딸을 귀애해서가 아니었다.
아들은 장차 가문을 이을 자신의 소유물이지만, 딸은 가문의 부흥을 위한 상품이기 때문이었다.
소유물은 막 다뤄도 상품에는 흠집을 내지 않는다. 그의 개똥 지론이었다.
“샤닝 백작 같은 머저리가 아니면 누가 널 데려갈 것 같으냐!”
브링스턴 후작이 소리쳤다.
“전 굳이 다른 가문으로 가고 싶지 않은데요.”
“하면? 가문에 먹칠이란 먹칠은 다 해놓고 계속 여기서 눌러앉겠다고? 우리 가문이 왜 너를 그렇게까지 배려해야 하지?”
“배려 안 해 주셔도 돼요.”
“뭐?”
“안 해 주셔도 괜찮다고요.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 그냥 파문하시거나 길거리로 쫓아내셔도 됩니다.”
“……!”
후작은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10년 동안 혼자 살아남았어요. 이제 와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너…….”
브링스턴 후작은 나를 흰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뻔뻔하기는.”
그가 말했다.
“어딜 맨입으로 가려고 해? 네 결혼이 무산되면서 생긴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 줄 알아? 적어도 그 절반 정도는 갚고 가야지.”
“갚으면 되나요?”
나는 그의 홉뜬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갚을게요, 그럼.”
“하! 네가 어떻게 갚겠다는 거지? 허약한 몸뚱이 말고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허약한 몸뚱이 하나로 혼자 잘 살았다니까요. 돈은 차차 갚을 테니, 결혼을 시키시려거든 차라리 쫓아내 주세요.”
그의 볼이 경련하듯 씰룩거렸다.
“웃기지 마라, 레티시아. 내가 너 같은 반푼이를 어찌 믿고? 너는 가문도 버리고 간 악독한 년이다. 당장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이 없는 이상, 난 너를 절대 풀어 주지 않을 거야.”
브링스턴 후작은 그리 말하고 종을 울려 집사를 불렀다.
“필립, 레티시아를 데리고 돌아가! 그리고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오게 해라!”
필립이 나를 객실로 이끌었다.
“아가씨.”
“잡아끌지 마요. 갈 때 가더라도 내 발로 가요.”
난 응접실을 나와서 객실까지 필립보다 앞서 걸었다.
철컥.
다시 문이 잠겼다.
나는 잠긴 문 앞에 서서 턱을 괴었다.
‘또 도주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번에는 그조차 쉽지 않을 듯싶었다.
“무슨 객실이 창문도 하나 없어.”
일부러 수많은 객실 중 창문 없는 방을 준 거겠지.
브링스턴 후작은 겉보기보다 철저했다. 역으로 생각하니 레티시아에 갓 빙의했을 때의 내가 그에게 얼마나 얕보인 건가 싶기도 했다.
“어휴.”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물렁.
“물렁?”
“어윽.”
“……?”
이불 안에서 이상한 생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이불을 들추었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사람들이 저를 무시해요…….”
“…….”
방도 배정받지 못한 로체였다.
* * *
“레아 양.”
로체가 꾀죄죄해진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서 물었다.
“저 못생겨졌습니까?”
“음…….”
나는 조용히 그에게 테이블 위에 있던 물 한잔을 따라 건네주었다.
그가 두 손으로 물컵을 받아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
딱 보아하니…….
‘노숙했구나.’
찬 바람은 질색을 하는 녀석이 노숙이라니, 내가 갇혀 지낸 지난 며칠간 펼쳐진 그의 고난이 눈에 선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레아 양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저를 쫓아내기에 얼굴로 버텼습니다만.”
“쫓겨났구나.”
“예. 레아 양 가족들은 다들 눈 뜬 장님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외모의 하인을 마다할 수 있지?”
“네가 나랑 와서 그래. 경계한 거지.”
솔직히 손이 매끈매끈한 걸 보고 하인으로는 영 쓸모가 없겠다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창문도 없고, 문도 꽉 잠겨 있었을 텐데.
로체가 물을 홀짝이고 이불을 어깨 위로 당겨쓰며 말했다.
“레아 양, 설마 또 잊으셨나요. 저 엘프입니다.”
“아.”
“레아 양 집안, 돈은 많은데 겁나 약하잖아요. 성력도 마력도 없는 주택이 담벼락이 높아 봤자지.”
로체의 말에 귀가 번뜩였다.
“어, 그럼 너 여기서 다시 나갈 수도 있어?”
“네? 그야 물론이죠.”
“…….”
오케이, 탈출 경로 하나 확보했고.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