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최악의 경우 로체에게 업혀서 도망가면 되겠다. 물론 추적이 붙을 테니 되도록이면 쫓겨나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는 게 좋겠지.
‘두 번 연속 도주는 조금 피곤하니까.’
나는 선택지가 하나 늘어난 것에 감사하며 로체에게 바깥의 근황을 물었다.
근래 대부분의 시간을 이 방 안에서 지내고 있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로체는 내 질문에 바로 대답했다.
“있습니다, 새로운 소식.”
“뭔데?”
“신탁이요.”
“응?”
“이번 신탁의 내용이 공표되었거든요.”
“…….”
원작에서 신탁의 내용은 코렐리아의 탄생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신탁이 내렸다면, 대체 그 내용이 뭘까?
나는 로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내용이 뭔데……?”
“아르키드네의 성녀가 탄생할 거라나? 뭐, 그런 내용이던데요.”
“!”
내용이 변하지 않았다!
‘뭐지? 성녀는 이미 태어난 거 아니었어?’
이안이 만난 코렐리아는 정말 다른 사람인가?
아니……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는 거라면 체이트가 독신이라는 점에서 또다시 모순이 발생한다.
어느 쪽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 상황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한시라도 빨리 코렐리아를 만나야 해.’
하지만 당장 나갈 수는 없다. 나간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할 지 역시 알 수 없다.
그녀의 행방을 아는 게 우선인데.
‘아르키드네의 성녀라면 남부에 있을 가능성도 있고, 이안과 접선한 장소를 보면 북부에서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가 되었든 수도는 아닐 것 같았다.
“로체, 알려 줘서 고마워.”
나는 로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자, 이제 나가라.”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얘가 내 방에 있는 걸 들켰을 때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시, 싫어욧!”
하지만 로체는 이불자락을 손안에 꼭 쥐고 버텼다.
“수도 햇빛이 얼마나 강렬한 줄 아십니까? 황궁이 번쩍번쩍할 땐 남부 그 이상입니다!”
“모자 줄게.”
“그깟 모자로 제 소중한 피부가 모두 가려질 것 같습니까?”
“…….”
귀찮게 보채는 로체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결국 내게 주어진 보석들을 내어주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한꺼번에 주시지, 굳이 하나씩 번거롭게…….”
내가 착용하고 있던 작은 팔찌 하나를 빼 주자 로체가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했다.
“넌 손에 쥐는 족족 물 쓰듯 써 버리잖아. 낭비벽 있는 사람한텐 이 정도가 딱 적당해.”
“쳇.”
나는 로체를 보내고 겨우 자리에 누웠다.
‘코렐리아의 행방을 내 선에서 알아보는 건 더는 무리겠지.’
체이트가 모른다면 신전 또한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고.
‘드디어 내 지식을 써먹어 볼 때가 됐나.’
원작에서도 등장했던 그 남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원작에서 코렐리아에게는 정보상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다니며 코렐리아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마법처럼 나타나서 그녀에게 중요한 정보들을 뱁새처럼 물어다 주고는 했다.
물론 맨입으로는 아니었다.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신원불명의 남자는 항상 코렐리아가 물어보지도 않은 정보를 알려 주고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정보 값 주시죠.”
코렐리아가 질색을 하며 피하면 돈을 줄 때까지 따라붙었다.
“코렐리아 님! 딱 천 리스면 됩니다! 아니, 800리스!”
……에누리도 해 줬다.
독특한 남자였지만 그는 먼치킨인 코렐리아에게 유의미한 도움을 주는 유일한 조연이었다.
그가 가져온 정보들은 실제로 꽤 시의적절하고 유용할 때가 많았으니까.
‘돈을 좋아하는 남자니까 그를 꼬드길 만한 금전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게 좋겠다.’
나는 돈을 모을 방도를 고심하는 한편, 지금 그 남자가 있을 만한 장소를 추리해 보았다.
기억하기로 원작에서 그 남자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지만, 대체로 수도 사교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비밀스러운 점쟁이의 모습으로.
그러니 점에 관심이 많은 귀부인과 대화하다 보면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 평판이 그녀들 사이에서 바닥일 거라는 거지.
* * *
브링스턴 후작은 아직 나를 팔아치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방법을 달리하여, 나를 수도 사교계에 진출시키려 했다.
“이번에도 반항한다면 다시는 햇빛을 못 볼 줄 알아라.”
“아뇨, 갈게요.”
개꿀이지 않은가!
나 안 그래도 귀부인 인맥이 엄청 필요했다고!
나는 싱글벙글하지 않은 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브링스턴 후작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긴 줄 아는 건가?
내게는 전 알바생이나 현 노숙자인 엘프가 있다. 나가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고.
그 사실은 모르는 후작은 턱을 빳빳이 들고 말했다.
“드레스를 맞춰야 하니 셀레나와 함께 외출해.”
“싫어요!”
옆에서 탐탁잖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셀레나가 벌떡 일어섰다.
“제가 왜 언니랑 같이 밖을 나가요? 파티는 또 왜 함께 가야 하고? 사람들이 흉볼 거예요.”
“네 명성이 고작 그런 걸로 흠집이 날 만한 거였느냐?”
“…….”
“네 언니가 부족한 만큼 네가 옆에 있어야 그나마 사람들이 모일 거다. 황실의 안주인이 될 녀석이 가문을 위해 그 정도도 못 하겠다고?”
나는 대충 잘나가는 인기 상품의 증정품인가 보다. 뭐, 사람이 살다 보면 메인도 되고 보조도 되는 거지.
나는 태연한데 정작 셀레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녀의 화난 표정이 현재의 내 상황에 꽤 잘 어울리는 연기 표본인 것 같아서 나는 그녀를 따라 한 줌뿐인 대흉근을 열심히 들썩거렸다.
브링스턴 후작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뭐가 그리 웃기지?”
“아니, 웃으려던 게 아닌…… 아무것도 아니에요.”
음, 나는 연기에 영 소질이 없나 보군. 관두자.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댔어.
* * *
셀레나는 분이 가시질 않았다.
‘모자란 언니랑 같이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다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수치심에 익사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황제가 언니와 함께 있는 자신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
화가 나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10년 전부터, 자신은 브링스턴 가문의 하나뿐인 자식으로 커왔다. 만찬회를 가면 아버지는 항상 제 자랑부터 했고, 다과회를 가면 어머니의 옆자리엔 자신뿐이었다.
이제는 레티시아가 왔으니 후작 부인의 오른팔은 그녀가 잡아야 했다.
10년을 어머니의 오른편, 아버지의 첫 번째로 살았건만, 사교계의 순서에 따라 후 순위로 밀려나야 한다니.
“……폐만 끼친 주제에 기어코, 기어코 돌아와서는.”
셀레나는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언니를 골탕 먹이는 건 쉽지만, 무용했으므로.
차라리 빨리 결혼해서 지방 영주의 부인으로 썩 꺼져버리는 편이 나았다.
레티시아가 다시 귀족 사교계로 돌아오는 황실 무도회에서 셀레나는 그녀를 제 언니로서 성실하게 소개할 것을 다짐했다.
물론, 가문에 쓸모 있는 작위를 가졌지만, 인성은 개차반인 쓰레기들에게만.
* * *
나는 사실 의상실로 간다고 했을 때 거절할까 생각했다.
옷이라면 많았으니까.
이안이 북부에서 ‘여기부터 여기까지’를 시전한 터라, 내 옷장은 카히텐 성에 있을 적부터 꽉꽉 찬 상태였다.
돌아가기 전에 그에게 환불할까 하고 물어보니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럼 갚겠다고 하니 아예 시선으로 무를 벨 것처럼 쳐다보더라.
그래서 그냥 들고 왔다.
그 옷들은 아직 내 방…… 그러니까 툭하면 잠기는 객실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다는 말은 즉, 못 입고 있다는 뜻이었다. 북부와는 날씨가 다른 수도에서는 호환이 되는 옷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네. 옷을 또 맞춰야 하네.’
나는 조금 귀찮아졌다.
또 치수를 재고 옷본을 만들고 제작까지 한참을 기다려야겠지.
‘치수 재는 거 엄청 귀찮던데.’
문득 궁금해졌다.
예전에 카페에서 지내던 시절, 체이트가 내게 옷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 애는 어떻게 내 사이즈에 딱 맞는 옷을 구해 온 거지?
‘설마 예측해서 맞춘 건…… 아니겠지.’
그 옷은 지금도 내 옷장에 있었다. 이제 옷은 아니었지만.
나는 못 쓰게 된 부분을 잘라내고 잘 꿰매서 인형을 만들었다. 전에 그 인형을 로체에게 자랑한 적이 있다.
‘어때, 예쁘지?’
‘오, 레아 양. 솜씨가 의외로 제법이시네요. 곰인가요?’
고양이였다.
요즘 침실에 틀어박힌 날이 많아져서 입에 거미줄이 칠 것 같았다.
나는 종종 그 고양이 인형에 대고 말을 걸곤 했다.
“체이트, 잘 지내고 있어?”
“일은 다 끝났어?”
“별일 없지?”
“언제 와?”
“……보고 싶어.”
* * *
체이트 폴린은 종종 레티시아에게 붙여 둔 신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로 위기 상황일 때에만 그에게 연락이 갔지만, 이따금 신성이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그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레티시아가 위기 상황에 부닥쳤다고 신성이 착각했을 때.
그리고 그녀가 체이트의 이름을 불렀을 때.
“…….”
체이트는 둥근 원 안에 빼곡하게 고대어를 적다가 멈칫거렸다.
‘……보고 싶어.’
간질간질한 속살거림에 귀를 기울이며 작게 웃었다.
“곧 갈게요.”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