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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62화 (62/140)

62화

사교계 파티는 처음이었다.

레티시아의 머릿속에서 데뷔탕트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지만, 당시 그녀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던 터라 현재의 내게 사교계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원작에서도 여주인 코렐리아는 곤봉을 든 성녀였으니 파티와는 거리가 멀었다. 파티는커녕, 그녀는 작중에서 성녀로 공인된 최초의 순간을 제외하고 드레스도 제대로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 귀족들의 사교계는 입으로 싸우는 전쟁터라고 했는데.’

말빨이라면 그럭저럭 자신 있는 편이었지만, 내 입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쪽으로 특화되었다.

에둘러서 말하거나 예의 바르게 남을 칭찬하는 매너 같은 건 애당초 배워 본 바가 없다.

‘이대로 나가면 귀부인들의 친구가 아니라 뜯어 먹기 좋은 먹잇감이 되겠는데.’

목적이 있는 이상 당하고 돌아올 수만은 없다. 나는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분의 고견을 들어 보기로 했다.

“로체, 사교란 뭘까.”

돈 떨어질 때마다 오는 분이었다.

“사교요?”

“응.”

로체가 다리를 꼬고 앉아 창가의 달밤을 응시했다.

“좋은 거지요. 사교…….”

그가 추억에 젖은 눈으로 턱을 괴었다.

“귀하신 분들과 기품 있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나누고…….”

“응, 그리고?”

“돈을 받습니다.”

“아?”

내 한쪽 어깨가 삐끗하고 내려갔다.

“너…… 그런 거 했니?”

“그런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섣부른 오해는 삼가시죠.”

“그럼.”

“그냥 힘드신 분들 얘기 들어 주고 돈 받는 겁니다. 심리 상담이라는 게 원래 굉장한 정신 노동인지라 시간당 페이가 썩 괜찮거든요.”

“그게 사교냐?”

“그분들은 사교라고 부르시던데.”

아니, 그보다 로체가 심리 상담을 한다고? 로체가 그렇게 공감 능력이 높다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원래 상담은 받는 쪽이 힘들어도 하는 쪽까지 힘들면 오래 하기 어려운 거라고요.”

남의 일에 쉽게 매몰되지 않는 마이웨이 성향에 오히려 잘 맞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 거 말고, 사교 파티 말이야.”

나는 말을 덧붙였다.

“파티? 음, 파티라.”

로체가 다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20대쯤엔 제가 파티에 꽤 자주 나갔죠.”

“와, 언제 적이야.”

“꼽주실 거면 말 안 하겠습니다.”

“아냐, 얘기해 줘.”

“정 원하신다면.”

로체가 자세를 고쳐 앉고 입을 열었다.

“때는 바야흐로 이종족과 인간이 허물없이 지내던 130년 전.”

까마득하네.

“저는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로체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느 귀족의 가든파티에서였죠.”

“오, 초대받은 거야?”

“아뇨, 일하러 갔습니다.”

“…….”

“그때는 신전이 지금보다 훨씬 배타적이라서 성력이 일상에 거의 보급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대부분의 기술적인 부분은 마력으로 해결했죠.”

“시절 잘 탔구나.”

“부러워하실 거 없어요. 어차피 엘프는 장수하는 종족이라서 언제 태어나도 격변 한 번씩은 겪기 마련이니까.”

로체가 헛기침으로 환기하고는 다시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갔다.

“아무튼, 그때 저는 밤의 정원을 밝게 밝히는 라이트닝 마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응.”

“그때 한 여성분이 제게 다가왔죠. 인간이었고, 귀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길을 여쭤보셨고…….”

로체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분을 보는 순간, 제 세상은 어두워졌습니다.”

“밝아지는 게 아니고?”

“네. 그분을 보자마자 마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깜박 잊었거든요.”

“……오.”

사람들 되게 당황스러웠겠는데.

로체는 거기까진 생각도 않는지 제 기억에 심취해 있었다.

“처음이었습니다. 저보다 아름다운 여성을 본 건.”

로체가 인정할 정도면 진짜 예쁘긴 예뻤나 보다.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그런 기분일까요?”

“…….”

로체의 과거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너무 범위가 방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들으니 새로운걸.

하지만.

“그래서 파티는……?”

나는 로체의 첫사랑 썰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로체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겠는데요. 파티에 간 건 그때가 마지막이라서.”

“……그 후로 한 번도?”

“네. 말도 없이 정전을 일으켰다고 잘렸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로체가 되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로써 로체를 조금 더 알아 간 것 같다.

도움은 하나도 안 됐지만.

* * *

내가 가야 할 파티는 1년에 단 한 번 개최한다는 황실 무도회였다.

‘사교계의 인맥이 필요하긴 했지만 이렇게 큰 파티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살짝 부담이 됐다.

로체도 도움이 안 되고, 후작 부인이나 셀레나에게 물어보기엔 사이가 너무 소원해서 나는 결국 독학으로 사교를 익혔다.

<이제 막 시작하는 레이디들을 위한 사교계 기본 에티켓북>으로.

글로 배운 사교의 저력을 보여 주겠다.

나는 굳은 다짐을 하고 무도회 당일에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발을 올렸다.

* * *

카히텐 궁이 장엄하다면, 황궁은 화려했다. 사방이 온통 황금밭이다.

금으로 조각한 장미가 화분에 꽂혀 있었는데 로체가 봤다면 괴도로 전직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도회는 황궁의 홀에서 열렸다. 나와 브링스턴 후작가 사람들이 그 앞에서 내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저기 좀 봐요. 10년간 실종됐다던 레티시아 양이에요.”

“실종이 아니라 도주였다면서요? 대체 어떤 남자를 만났기에 카히텐 대공을 버리고 빈손으로 떠난 거죠?”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어차피 못 견디고 돌아왔는데. 10년 동안 다른 남자와 있었으면서 귀족 가문과 혼인해 보겠다고 여기까지 나온 꼴 좀 봐요. 뻔뻔하기도 하지.”

나 언제 다른 남자랑 도주했어?

단신으로 개고생한 기억이 떠올라서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평판은 나쁘군.’

이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텐데.

나는 다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마음이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 놈만 잡는다.’

제일 귀가 얇고, 천기누설 같은 걸 신봉할 것 같은 한 명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가 나를 욕하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난 홀로 들어가자마자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눈독을 들였다.

그때, 셀레나가 싱긋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언니, 여기서 뭐 해? 인사하러 가야지.”

그녀가 집안에서와는 사뭇 다른 살가운 태도로 나를 이끌고 어딘가로 데려갔다.

턱시도를 멀끔히 차려입은 남자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이었다.

“다들 그간 안녕하셨어요?”

셀레나는 이미 모두와 안면이 있는지 편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브링스턴 영애. 지난 만찬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브링스턴 영애.”

모두가 셀레나에게 예의 발랐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그녀가 차기 황후가 될 테니 다들 미리 잘 보이려는 심산이겠지.

“아, 오늘은 셀레나 양이라고 불러 주세요. 언니가 있으니까.”

그녀가 나를 앞으로 끌어왔다.

“제 하나뿐인 언니, 레티시아 브링스턴이에요.”

순간 테이블이 싸해졌다.

카드가 부채인 양 입에 걸치고 시선을 교환하는 게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개중 한 명이 넉살 좋게 악수를 청해 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티시아 양. 포트 남작가의 데미안 포트입니다.”

“아, 반가워요, 포트 영식. 레티시아 브링스턴이에요.”

데미안이라는 남자와 인사하고 나자 남자들이 하나둘 손을 내밀었다. 어지럽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남자들이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레티시아 양, 듣자 하니 굉장히 행동력이 좋으시던데.”

“보기엔 이렇게 여려도 사실은 대단한 담력을 가지고 있으시다면서요?”

“아, 아뇨. 그게, 음…….”

저런 난처하고 무례한 질문에 대한 응대법은 책에 없었다. 나는 무심코 셀레나가 있었던 쪽을 돌아보았다.

“……?”

셀레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셀레나 브링스턴은 제 언니를 망나니 도박꾼들의 판에 놓아두고 떠났다.

아마 언니는 지금쯤 그들 사이에 껴서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

개중 누구와 눈이 맞아도 망나니였고, 또한 누구와 결혼해도 가문에 돈은 들어올 터였다.

‘이걸로 내 할 일은 다 했어.’

셀레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홀을 떠나 유리정원으로 걸어갔다.

황제는 파티가 무르익으면 언제나 자신을 그곳으로 초대했다.

이번엔 딱히 초대를 받은 게 아니지만, 매번 그러니 딱히 확인받을 것도 없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황제의 유리정원으로 들어갔다.

“폐하?”

그녀가 황제를 불렀다.

“폐하, 저 왔어요!”

유리정원은 오늘따라 어두웠다.

이상하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황궁이 이렇게 어두운 적은 거의 없었는데.

셀레나는 손으로 안쪽을 더듬거리며 황제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구석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미야오.”

처음 보는 고양이였다.

“꺅!”

셀레나는 놀랐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저 고양이일 뿐이다.

“저게…….”

짜증스럽지만 고양이는 건드릴 수 없었다. 수도에서 고양이는 영물이라고 했으니까.

정확히는 황족이 강한 성력을 지닌 탓에 야수화를 종종 하는지라, 그게 황족인지 그냥 고양이인지 감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는 금세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셀레나는 고양이가 사라진 자리를 흘깃 바라보았다.

‘폐하나 레오넬 황자는 아니었겠지?’

사위가 어두워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폐하도 없으니…… 돌아가는 게 낫겠어.’

셀레나는 풀죽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어두운 정원에서 한 쌍의 눈이 야광으로 빛나며 셀레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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