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셀레나가 황궁 홀로 돌아왔을 때, 홀 구석이 유독 요란했다. 중앙계단 아래에 마련된 테이블 공간 쪽이었다.
‘저긴…….’
자신이 레티시아를 두고 간 망나니들의 테이블이기도 했다.
‘언니가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10년 만의 사교계 복귀니 저 없는 사이에 가문에 망신살이 뻗칠 만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제 아버지는 책임의 절반을 제게 물을 것이다. 멍청한 언니를 두고 갔다는 이유로.
그녀는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이 패 이기기 쉽지 않을 텐데요.”
레티시아의 목소리였다.
“……혹시 투 페어입니까?”
“하하, 그 정도가 아니죠.”
“큿……!”
망나니 중 하나인 데미안이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거시겠습니까? 뭐, 저는 상관없는데.”
“죽…… 죽겠습니다.”
“흠. 아깝군요. 사실 원 페어였습니다.”
“……!”
“아니, 어떻게 이런……!”
레티시아가 벌떡 일어서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이겼습니다! 어서 손모가지 내놓으시지요!”
테이블에 있던 망나니들이 패배자의 신음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이 내가……! 이 골드핸드가 지다니……!”
“분하다! 크윽!”
“으아아, 이 손으로 이제 펜대밖에 쥘 수 없다니……!”
한 남자가 울면서 레티시아가 건네는 종이에 서명을 갈겼다.
그녀가 종이를 펼쳐 들고 말했다.
“현 시간부로 여러분의 손목은 제 소유가 됐습니다. 이제 함부로 집안 돈 걸고 포커 치시는 모습이 제 눈에 띄거든 그대로 손목 한 짝씩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와아아아아!”
주변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망나니의 부모나 형제, 친척들이었다.
“레티시아 양, 대단해요! 무도회까지 와서 노름하는 거 사실 꼴 보기 싫었거든요.”
“아하하, 그냥 운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포커를 좋아해서 말이죠. 좋아하는 게임이 사행성으로 소비되니 기분이 영 좋지 않더라고요.”
레티시아가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쩜 겸손하기까지!”
어린 귀족 아가씨가 두 손을 모아 쥐고 레티시아에게 감탄했다. 그녀는 데미안 포트의 여동생 앨리스 포트였다.
‘저 여자애, 저번 파티까지만 해도 내 옆에 앉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자애 중 하나였는데.’
셀레나는 기가 막혀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뭔가가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가고 있었다.
* * *
나는 불현듯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눈길을 끌 생각은 없었는데.
한 놈만 노리겠다는 내 초안이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은 아니었다.
그저 셀레나가 사라진 순간부터 가면을 쓸 여유조차 사라져서 원래 성격이 살짝 튀어나온 것뿐이었는데.
“레티시아 양, 그래서 10년간 재미 좀 보셨는지?”
이런 무례한 질문에 짜증도 났고.
어떻게 빠져나갈까 궁리하는 와중에 그들의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포트 영식, 지금 하고 계시는 게 혹시……?”
“아, 이건 그냥 저희끼리 하는 놀이입니다.”
놀이치고는 로체가 환장할 뭔가가 테이블 위에 제법 많이 올라와 있었다.
“레티시아 양도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데미안이 살갑게 말했다.
‘서로서로 친구 잘못 사귀어서 골로 가게 생긴 모임이었구나.’
나는 이런 쪽으로는 판단이 빨랐다. 꾼을 판별하는 건 생존이랑 직결돼 있는 부분이니까.
“아뇨, 하는 법은 알아요.”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신 저는 돈 거는 판은 안 하니 다른 걸 걸어 보죠.”
“다른 거라면 어떤……?”
그들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마음으로 옆에 앉은 남자의 카드 쥔 손을 가리켰다.
“그거요.”
“……?”
“그 손목, 저한테 주세요.”
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한번 해 보죠! 대신 영애께서도 거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게임은 공평해야 하니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레티시아 양, 정말 멋져요!”
“가, 감사해요. 그…… 엘레나…….”
“앨리스요!”
“아, 앨리스 양.”
나는 멋쩍은 웃음을 달고 서 있었다.
저 멀리 홀 중앙에서는 춤곡이 한창이었다. 시대극 로맨스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커플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서로 무어라 속닥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엔 카드 패와 건실해질 예정인 패배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손목 소유권 양도 계약서를 하나로 둘둘 말아서 손에 쥐고 부채처럼 탁탁 쳤다.
“오호호, 아름다운 밤이에요.”
에티켓북에서는 할 말 없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 * *
모로 가도 수도로만 가면 된다고 했다. 어쨌든 친한 귀족들이 생긴 나는 이때다 싶어 점에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점이요? 레티시아 양, 그런 거 좋아해요?”
앨리스 양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점이라면…… 저는 잘 모르고, 아마 가레사 백작 부인 쪽 분들이 잘 아실 거예요.”
“가레사 백작 부인이요?”
“네. 그분이 살롱에서 친한 귀부인들과 함께 취미로 점을 보곤 한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가레사 백작 부인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 근처에 몰려들었던 이들 사이에서도 없는 것 같고.
내가 목을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앨리스 양이 친절하게 어느 한 곳을 집어주었다.
“저쪽이에요.”
“아하.”
중년의 귀부인이 다른 부인들과 함께 호호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 분들이군요.”
앨리스 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네, 그런데 가레사 부인께서는 소문에 민감하셔서…… 아마 지금은 다가가도 좋은 말씀을 듣기는 어려울 거예요.”
소문이라.
다시 말하지만 내 평판은 바닥이었다. 일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고 한순간에 전체가 박수를 칠 수는 없을 테니까.
“괜찮아요. 각오하고 있어요.”
나는 앨리스 양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가레사 백작 부인 쪽으로 다가갔다.
“…….”
그리고 간식 앞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있었다.
에티켓북 가라사대, 소개해 줄 상대가 없으면 먼저 입 열지 말라고 했다.
성격 같아선 그냥 냅다 인사부터 갈겨 보겠지만, 가레사 부인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한 성격일 것 같았다.
‘앨리스 양한테 소개를 부탁할까? 아, 근데 연장자한테 소개하는 법이 또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리는 예의범절이었다.
‘근데 이거 따질 필요 있어?’
아까의 나는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정의로운 시정잡배였다. 하지만 다들…… 꽤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좋아, 가자.’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풀고 가레사 백작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
“부인.”
“…….”
“…….”
그리고 면전에서 무시당했다.
그들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화를 나눴다.
‘치사하게 구네.’
됐다. 점 보는 게 여기 한 무리밖에 없겠냐. 나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어머, 레아 양?”
어딘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너무나도 그리운 이름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델린 남작 부인?”
그녀가 가레사 백작 부인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내 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
“부인, 북부에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응. 친정 가문은 수도에 있어서, 날도 따뜻해진 김에 들렀어. 무도회 같은 멋진 행사에 빠질 수는 없으니까!”
델린 남작 부인은 여전했다.
“그나저나 레아 양이야말로 왜 여기에…….”
어? 혹시 모르나?
내가 브링스턴 후작가의 실종됐던 장녀라는 사실을……?
그럴 수도 있겠다.
델린 남작 부인은 원래 북부 변두리에서 살다가 이곳에 왔을 테니까.
북부 내의 소식도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다가 왔으니 아직 수도의 얘기엔 귀가 어두울 수도 있지.
‘기회다.’
나는 이때다 싶어 델린 남작 부인을 끌고 가 물었다.
“부인, 혹시 가레사 백작 부인이랑 친한가요?”
“으응, 지금은 멀어서 좀 그렇긴 한데…… 결혼 전까진 친했어. 아카데미 동문이거든.”
“오오, 학연!”
그런데 부인, 아카데미도 졸업하셨습니까? 왠지 의외…….
아니, 중요치 않다.
“그럼 혹시 제가 그분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신 좀 물어봐 주실 수 있나요?”
“응? 뭔데?”
“점이요.”
“……점?”
“제가 요즘 점괘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부인.”
“어머, 레아 양. 결혼 운이 궁금하구나…….”
델린 남작 부인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제일 궁금하지 않은 운세를 입에 올렸다. 그리고는 또 혼자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나한테 맡겨!”
“감사함다!”
그녀가 싱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레아 양, 진짜 여기엔 어떻게……?”
“아, 그게.”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뒤에 섰다. 등 뒤로 길고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이런, 혹시 그쪽이 레티시아 브링스턴 영애?”
델린 백작 부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선이 내게 있지 않은 걸 보니 내 정체는 대충 중요하지 않은 항목으로 정리된 것 같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곱실거리는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미남자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문의 영애를 이렇게 다 보네.”
황제의 망토를 등에 걸치고서.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