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황제, 하르온 헬리아스는 의미심장한 인물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태도로 예상치 못하게 코렐리아를 방해하거나, 역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원작에서 중년의 끝자락에 있는 나이였지만 레오넬보다 건강하고 신체가 다부진 남자로 묘사되었다.
그의 아들인 레오넬이 병약 미소년에 가깝다면, 그는 노련한 미중년이었다.
작중 묘사된 시점보다 18년가량 이른 지금은 서술된 것만큼 원숙한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의미심장하다는 묘사에는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이유는 하나다.
‘실눈캐.’
자고로 실눈캐가 복흑이라는 설정은 유구하다. 이 인간, 분명 속 시커먼 능구렁이 과다.
나는 델린 남작 부인을 따라 그의 앞에 부복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과 대면했을 때 이후로 이렇게 긴장되는 건 처음이었다.
“뭘 그렇게 오래 꿇어 있니, 다리 아프게.”
황제가 내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우리 사이에 그렇게까지 예의 차려서 뭐 하겠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라는 말씀이신지?”
내가 어리벙벙하게 묻자, 황제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영애 동생이 나랑 결혼하기로 한 거 잊었어?”
“아아…… 그런 사이요오…….”
내가 아래턱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 어이없게 웃기는 데가 있네.”
말투가 나이에 비해 젊은 황제였다. 원작에선 말투만큼은 평범했던 것 같은데.
“음, 마음에 들었어. 나랑 유리정원 구경 가자.”
“예?”
“이거 아무나 안 보여 주는 거야. 영애 동생도 세 번밖에 못 봤어.”
“…….”
거절하면 명령 불복종이지요?
“넵, 영광입니다.”
“하하, 말투 봐.”
그가 깔깔거리며 폭소했다.
아니, 그쪽이 제게 그러시는 건 도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 * *
난 황제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무심코 발걸음이 빨라지면 시종이 잽싸게 내 보폭을 조절시켰다.
말투는 위엄 없어도 황제는 황제라 이건가. 되게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게 많아서 위가 살짝 아파지려고 한다.
“괜찮니?”
미식거리는 배를 쓱쓱 문지르자 황제가 몇 걸음 앞에서 그리 물어왔다.
“괘, 괜찮습니다.”
“그래, 너무 어려워하지 마. 우리 이제 한 가족이 될 사인데 뭘 그러니.”
그가 솜사탕처럼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뒷짐은 진 채 다시 걸었다. 나도 뒤따라 멈췄던 발을 옮겼다.
등 뒤에도 눈이 달렸나? 귀신같이 알아챈다. 헬리아스의 성력을 받은 몸이라 기민한 건가.
“음, 어둡네.”
시종을 대동하고 유리정원까지 온 황제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기 누가 건드렸니?”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종이 빠르게 물러갔다.
그는 흠, 하고 위를 한 번 더 살피더니 성력을 방출했다.
삽시에 정원 내부가 환해졌다.
‘으악, 눈부셔!’
나는 팔로 눈을 가렸다. 유리에서 반사된 빛들이 독수리 부리처럼 눈을 쪼아 대는 느낌이었다.
“아, 미안.”
그가 빛무리를 조절했다.
“빛을 다루는 쪽은 아직 절제가 잘 안 돼.”
과연, 태양신의 힘이라는 건가.
나는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오색빛깔의 꽃들이 정신을 해롱해롱하게 할 정도로 화사했다.
“예쁘지?”
그가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내 자랑이야.”
“그런데 왜 이걸 저한테 보여 주시는 건가요……?”
용기 내서 물어보았다.
“그야 내 예비 처형이니까.”
“아…….”
의외로 섬세하게 챙기는데? 원작에서 황후와의 관계는 철저한 비즈니스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사이가 좋았나?
“셀레나도 여길 참 좋아하던데.”
그가 말했다.
“아마 오늘도 자기랑 보러 올 줄 알았을 테지. 돌아가서 심술을 부릴지도 모르겠네.”
그러면서 키득키득 웃는 게 꼭 어린아이의 순수 악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말 얹어서 산통 깰까 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영애.”
너무 오래 가만히 있었는지 그가 나를 불렀다.
“네?”
“영애는 주변에 사람이 많지?”
“…….”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끊길 것 같던 인연들이 어떻게든 질기게 이어지는 걸 보면 꽤 인복이 있는 걸지도.
나는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응. 영애는 아끼는 사람도 많고, 영애를 아껴 주는 사람도 정말 많지.”
그가 불쑥 나를 돌아보았다.
“그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뭐지. 멕이는 건가.
“돌아가는 길 조심해.”
멕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시종이 내 옆에서 다가와 속닥거렸다.
“가시죠, 영애.”
아, 끝이었구나.
그럼 그냥 잘 가라고 해 주지, 되게 모호하게 말하네. 사람 헷갈리게.
나는 꽃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 황제의 등에 대고 독학한 대로 인사를 하고 유리정원을 나왔다.
“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시종이 물었다.
이미 델린 백작 부인에게 목적한 바대로 부탁은 해 놓은 상태였다. 나머진 편지를 보내 확인하면 되겠지.
“괜찮아요. 브링스턴 후작가의 마차를 불러 주세요.”
시종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사라졌다. 나는 밤에도 환한 야외 정원을 둘러보았다.
부스럭.
그 순간, 유리정원으로 가는 길목의 길섶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그쪽으로 걸어가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누구…… 어라.”
“……애옹.”
엄청 작은 노란색 아기 고양이였다. 체이트를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도 작았다.
고양이가 영물이라더니, 황궁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네.
“애오옹…….”
뭔가 구슬픈 울음이었다.
“엄마 잃어버렸나?”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양이의 턱을 간질였다.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있는다.
한참 고양이를 쓰다듬은 뒤 마차를 타고 브링스턴 후작가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비로소 생각해냈다.
황궁에 있을 노란 아기 고양이라면 혹시…… 레오넬 헬리아스는 아니었을까, 하고.
* * *
“왜 벌써 오지?”
브링스턴 후작은 내가 일찍 온 게 불만인 듯했다. 아니, 내가 남자를 물어오지 않은 게 불만이겠지.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나는 적당히 받아넘겼다.
그다지 건강하지도 않은 몸으로 무도회처럼 안 가던 곳을 간 데다가, 황제의 앞에서 잔뜩 긴장하고 온 뒤였다. 그의 잔소리를 듣고 있기엔 몸이 너무 녹초였다.
난 하녀에게 부탁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방으로 돌아왔다. 또 문 잠그는 소리가 났지만 이젠 신경도 안 쓰인다. 어차피 지금 밖으로 한 걸음도 움직이기 싫었다.
“으으…….”
결리는 어깨와 팔다리를 직접 주무르다가 포기했다. 손아귀 힘이 하나도 없으니 시원하지도 않았다.
‘안마는 체이트가 최고였는데…….’
고작 안마에서 그를 떠올리는 게 약간 양심에 찔렸지만, 진짜 그 손맛을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다, 체이트.”
내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방바닥에서 하얀 먼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라?”
자세히 보니 먼지가 아니었다.
성력이 만들어낸 빛 알갱이들이 허공에서 반짝이며 인영을 만들어 냈다.
“……설마.”
휘잉!
창문도 없는 실내에서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을 때, 입매가 절로 솟아올랐다.
“……왔어?”
“네.”
그가 내게 다가와서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귓가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돌아왔어요. 당신 곁으로.”
* * *
레오넬은 분홍색 머리의 여자가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쪼끄마한 고양이의 모습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이 빠져라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시종이 그를 발견해 버렸다.
“여기 계셨군요.”
그가 차가운 어투로 레오넬에게 말했다.
“가시죠. 이런 날에 멋대로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멋대로 눈에 띄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레오넬은 어렸지만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파티가 있던 날에 몰래 나왔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었으므로. 그날은 간식도 먹지 못했다.
자신도 나름 생각을 해서 이 모습으로 나온 것이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아기 고양이의 모습으로.
“이만 돌아오세요. 또 그 모습으로 갑자기 사라지실까 겁나네요.”
시종의 차가운 말에 움츠러든 레오넬이 마지못해 인간형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짜리몽땅했다.
겨우 3살이 된 황자는 야수화를 했을 때도, 하지 않았을 때도 조그마했다.
시종은 그런 레오넬의 고사리 같은 손을 배려 없이 잡아끌었다.
“자, 어서 방으로 돌아가요. 눈에 띄어 좋을 거 하나 없습니다.”
“흐디만 아부디가…….”
“폐하께서는 정원에서 홀로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레오넬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나도 아버지랑 함께 유리정원 가고 싶었는데.’
고작 3살이라도 그는 황자였다.
하지만 하르온은 단 한 번도 레오넬을 유리정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마치 레오넬이 제 자식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냉정한 처사였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