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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65화 (65/140)

65화

나는 체이트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부터 앞으로 해야 할 일들까지.

“수도로 와서 소문을 들었는데 유명한 점쟁이 중에 정보통이 하나 있대. 그 사람을 찾아서 코렐리아의 행방을 물어볼까 해.”

그는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러다 내가 무심코 어깨를 매만지는 걸 보고는 자연스럽게 내 뒤에 자리 잡았다.

“으응……. 시원해.”

두툼한 엄지가 날갯죽지를 밀어냈다. 순식간에 몸이 녹진녹진해졌다. 묵은 피로가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아, 역시 안마는 남의 손이 최고라니까.

체이트가 내 뒤에서 뭉친 곳을 기가 막히게 풀어 주며 말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난 수도에서 별다른 소문 못 들었는데.”

뜨끔.

나는 지레 찔려서 고개를 숙였다. 체이트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목덜미에 닿았다. 목 뒤를 지압하며, 그가 작게 웃었다.

“뭐…… 제가 수도에 있었을 땐 별일 없었나 보죠.”

“으응, 그렇지.”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리고 오늘 헬리아스 황제도 만났는데.”

우뚝.

손길이 멈췄다.

“체이트? 왜 그래?”

“…….”

그가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 자는 되도록 가까이하지 마세요. 위험한 자입니다.”

“그래……?”

“네.”

신전과 황실은 사이가 괜찮다고 알고 있었는데, 체이트는 헬리아스 황제를 매우 경계하는 듯했다.

‘하긴, 체이트는 눈치가 빠르니까.’

황제는 직접 얼굴을 마주 대한다면 경계하지 않는 게 더 힘든 남자였다.

나긋나긋한 말투에서도 느껴지는 특유의 한기, 위압감, 그리고…….

‘어딘지 사람 같지 않은 느낌.’

황제는 원작에서도 여기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존재였다.

원작에서도 이안처럼 달리 뭔가 흑막 같은 짓을 하지 않음에도 계속 눈여겨보게 되는 인물이었다.

“나도 그 남자는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해.”

난 한 번 더 체이트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이렇게 내가 단호하게 나오지 않으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등 뒤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손이 다시 어깨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다른 일은 없었나요?”

“다른 일이라면…… 로체가 쫓겨났지.”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너네가 한결같아서 나는 참 좋다.

“문, 잠겨 있는 것 같은데.”

체이트가 속삭였다.

곧장 내 방 안으로 도착했음에도 용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딸내미가 10년이나 가출을 했잖아. 불안해서 그럴 수도 있지.”

“레티시아, 난 이제 계속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내가 잘 참을 수 있게 당신이 미리 얘기해 줘요.”

“…….”

나는 어쩔 수 없이 브링스턴 후작가에서의 내 입지와 세간의 평가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갇혔어요? 결혼하기 싫다고 해서?”

“원래도 가둬 둘 생각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갇혀 있는 것 같기는 해.”

“도망갈래요?”

“또 그런다.”

나는 내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을 붙잡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웃음소리가 차차 멎어 들었다.

“……그럴까?”

내 손에 감긴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경직되는 게 느껴진다.

“모든 게 다 끝나고 나면…… 그렇게 할까?”

코렐리아를 만나고, 그녀의 진실을 확인하고, 우리가 미래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는 날이 온다면.

“그때…… 도망칠까?”

“…….”

긴 침묵이 실내를 휘감았다.

어깨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이마의 체온도.

“당장 같이 가 줄 거 아니면 그런 얘기 하지 말아요.”

체이트가 속삭였다.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와닿았다.

그가 작게 물었다.

“안아도 돼요?”

언제는 허락받고 끌어안았나?

평소처럼 가볍게 투덜대고 싶었지만 입술이 말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트의 손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틈새를 하나둘 파고들었다. 깊게 얽힌 사이로 미끄러지는 촉감에 소름이 끼쳤다.

싫지 않았다.

쿵쿵, 심장소리가 들렸다.

비단 한 사람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 * *

셀레나는 씩씩거리며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오늘의 무도회는 역대 최악이었다.

1년에 단 한 번뿐인 황실 무도회.

그 중요한 행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차기 황후인 자신이 아니라 제 언니, 레티시아 브링스턴이었다.

레티시아는 황제에게 불려 나간 후 그대로 돌아가 버려서 알지 못했지만, 그날 무도회장에서 가장 자주 나온 단어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여기저기서 레티시아에 대해 얘기하는 말들이 셀레나의 귀를 빙글빙글 돌았다.

심지어 제 약혼자인 황제 하르온은 자신을 두고 레티시아를 유리정원에 데려갔다.

그 모습을 한 발치 뒤에서 지켜볼 때의 제 심정이 어땠는지 무심한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난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언니에게 밀려난 적이 없단 말이야.’

셀레나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무도회 내내 잘근잘근 씹어 댄 입술에서는 계속 쇠 맛이 났다.

“레티시아…… 10년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년이…….”

레티시아를 바라보는 셀레나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일전엔 욕망에 기준하여 어느 정도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면, 지금은 증오와 질시의 감정이 이성을 훨씬 압도하고 있었다.

하다하다 내 약혼자에게까지 손을 대다니.

이제 가문이고 뭐고 상관없어.

어떻게든 레티시아에게 잊을 수 없는 오욕과 자신과 맞먹는 분노를 전해 주고 싶어졌다.

* * *

체이트는 수도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내 방에서 함께 지냈다. 체이트가 떠날 생각도 없었거니와 내가 더 이상 그를 강하게 밀어낼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엔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다가,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시간에 인간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돈이 떨어진 로체가 찾아와서 내 방에서 사는 체이트를 보고 항변했지만 완패하고 돌아갔다.

로체는 들키면 변명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지만, 체이트는 여차하면 고양이로 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난 침대에 반쯤 누운 채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진짜 아이러니하다.”

“뭐가요?”

내 뒤에 앉아 있던 체이트가 물었다.

“처음 널 주웠을 때는 고양이를 데리고 있다는 걸 들킬까 봐 매일 노심초사했잖아.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라는 걸 들킬까 봐 고양이 행세를 해야 한다니.”

내가 자조적으로 웃자 체이트가 따라 웃었다.

“그건 그러네요.”

“그치? 이상하지?”

“네.”

그가 고개를 묻고 말했다.

“이상하네요.”

“아, 간지러워!”

난 행여 들킬까 봐 작게 속삭였다.

“자, 우선 편지를 보내야 해.”

나는 계속 엉겨 붙으려는 그를 밀어내고 말했다.

“델린 남작 부인이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집 주소도 다 알아 놨어.”

체이트가 탄식했다.

“저런, 무의미한 짓을.”

“응? 왜 무의미해?”

“그 부인 성격상 굳이 우리 쪽에서 연락하지 않아도 알아서 답이 올 겁니다.”

“……아, 그러네.”

그녀는 마을 최고의 오지라퍼였다. 남 참견하기 좋아하고 거들기 좋아하는 그녀가 얼결에 내 정체를 알게 됐으니 모른 척 참고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편지를 쓰려고 들었던 펜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럼 일주일만 기다려 볼까?”

“장담컨대 사흘 내로 올 겁니다.”

편지는 이틀 뒤에 왔다.

레아 양! 아니, 브링스턴 영애!

세상에, 이게 웬일이래! 브링스턴 영애라니! 어쩜 좋아, 나 너무 심장이 뛰어서 그날 잠도 못 잔 거 있지? 수도에서 자기가 얼마나 유명했는 줄 알아? 난 글쎄 여기 오자마자 자기 실명을 들었다니까?

정해진 운명을 피해 진정한 사랑을 찾는 여정이라니, 자기! 너어어어무 용감해! 멋져!

근데…… 사랑의 도피를 한 거 맞아? 사람들이 그러던데. 하지만 자기…… 인기 없었잖아?

아무튼 거리도 가까운데 통신구 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어. 답장할 때 꼭 알려 줘!

p.s. 맞다. 자기가 부탁했던 점집 알아봤어!

“통신구……는커녕 외출도 못 하는데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뭐, 괜찮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고, 나도 도움만 조금 받으면 나가는 건 어렵지 않게 됐으니까.

그나저나 이 편지, 음성 지원 기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본인 말투를 그대로 편지에 빼다 박아 놓을 수 있지?

비록 내용의 절반 이상이 자기 할 말과 물음표 살인마 같은 질문들이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내 부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점집은 총 다섯 개…….”

많기도 하다. 진짜 신이 있는 세계에서도 신변잡기가 흥하다니, 역시 어딜 가나 사람들 마음은 다 비슷한 건가.

나는 그녀의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추신으로 적어 준 다섯 군데의 점집 중 두 군데는 위치가 시가지 한복판에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신출귀몰하는 남자가 이렇게 상업적인 위치 선정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세 개.

“하나는 점쟁이의 이름 자리에 여성 대명사를 썼어. 여긴 제외해야겠다.”

“그 정보통이 남잡니까?”

“응. 내가 알기로는 그래.”

나머지 둘은 편지 상에 적힌 내용만으로는 성별이나 외형,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었다.

“일단 위치는 다 적혀 있으니까, 하나씩 찾아가 보면 되겠다.”

“좋아요.”

“흠, 그러면…….”

나는 식사 때를 제외하고 절대 열리지 않는 방문을 응시했다.

“슬슬 탈출을 감행해 볼까?”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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