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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66화 (66/140)

66화

요 며칠 방에 갇혀 있으면서 하녀가 들어오는 시간대가 매우 일정하다는 걸 알아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점심 식사와 다과를 챙겨줄 때, 저녁 식사를 가지고 왔을 때, 그리고 취침 준비를 도울 때.

총 네 번.

‘가장 간격이 긴 건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사이 시간대야.’

이 세계 귀족들은 늦은 저녁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한국이라면 야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오후 2시, 저녁이 오후 9시에 먹으니까 무려 7시간이 비는 거지.’

보통 공백의 시간엔 다과로 끼니를 때우거나 모임을 나갔다. 난 모임도 없고 다과도 식사와 한 번에 차려지니 틈새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좋아, 내일 점심에 출발하자.”

그렇게 말하며 체이트를 돌아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슬픈 얘기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응?”

“당신을 안아 들고 점집이든 번화가든 예식장이든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체이트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저, 지금 거의 민간인입니다.”

“……어?”

나는 체이트가 어떻게 내 방으로 바로 찾아왔는지 생각해 냈다.

아, 워프…….

“너, 내가 그거 함부로 쓰지 말랬지.”

“보고 싶은 걸 어떡합니까.”

“…….”

그렇게 말하면 내가 잔소리도 마음대로 못 하잖니.

“사흘 정도면 재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될 겁니다. 그때 같이 나갈까요?”

“음…….”

체이트의 성력이 회복된 후에 워프로 나갈 수 있다면 아주 편한 외출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체이트는 또 대량의 성력을 소모하고 회복기를 가져야 한다.

‘고작 점쟁이 하나 찾는 일로 연달아 고생시키고 싶진 않은데.’

체이트의 워프 능력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문을 쉽게 열고 드나들 수 있는 인간이 지척에 한 명 더 있었다.

아니, 인간은 아닌가.

“로체.”

다음 날 밤, 나는 어김없이 돈을 타러 온 로체에게 내가 가진 제일 비싼 보석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나갈 일이 생겼어. 협조 좀 해줘.”

“드디어 움직이는 겁니까? 저 안 그래도 밖에서 집도 절도 없이 정말 고생했습니다.”

“5성 호텔 스위트룸에서 먹고 잔 거 다 알아.”

“아니, 어떻게 그걸?”

당연히 알지. 네가 나한테 구걸하러 오는 시점만 파악해도 일일 소비 금액을 산출하는 건 일도 아니다.

나는 로체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알아? 좀 건실해지란 말이야.”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제가 씀씀이가 헤픈 건 인정하지만, 일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있다고?”

팔짱을 낀 채 놀라 물었다.

“네, 제법 수입이 짭짤한 일이죠.”

“으음……. 불법은 아니지?”

대답이 없다. 로체는 맥쩍게 뒷머리를 매만졌다.

“하하, 뭐…….”

“그래. 잡혀가는 건 내가 아니니까. 그보다 내 부탁, 들어줄 거야?”

“부탁보다는 명령 같은데…… 아무튼 레아 양에겐 얻어먹은 게 많으니 밥값 할 때도 됐죠.”

그는 먼저 자신이 문을 드나드는 방식을 설명했다.

“저는 이 녀석처럼 갑자기 뿅 나타나는 마술쇼는 못 해요.”

로체가 체이트 폴린이라고들 부르는 ‘이 녀석’을 가리켰다. ‘이 녀석’의 미간에 세로로 골이 생겼다.

“마술?”

“비슷하잖아? 순간이동 마술.”

로체가 혼자 키들거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벽을 통과하거나 연기가 되어 틈새를 비집고 가는 것도 못 합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오는 건데.”

로체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어?!”

순간 로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야? 순간이동 못 한다며!”

“저 여기 있습니다, 레아 양.”

로체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가자미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자세히 살피니 매끈했던 벽이 뜨거운 열기에 노출된 것처럼 우글우글해 보였다.

일그러진 벽면을 쿡 찔러 보았다. 딱딱한 벽 대신 말랑한 뭔가에 손가락이 파묻혔다.

“아구구.”

로체가 신음을 내며 돌아왔다. 나는 그의 볼에 검지를 찔러넣은 상태였다.

“오, 이거 신기하다. 투명화 마법이구나.”

“손꾸락 쩜 치어 주세여, 레아 양.”

난 손을 떼고 그에게 다시 물었다.

“투명한 상태라서 남의 눈에 들키지 않았구나.”

“네. 하지만 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도 없으니 빨리 잠입해야 하고요.”

빠르고 굵게 끝장을 봐야 한다는 거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의문을 던졌다.

“안 들키고 움직이는 법은 알겠어. 방문은 어떻게 연 거야? 그것도 마법?”

로체가 생글생글하게 웃는 낯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옷핀이었다.

* * *

다음 날, 점심 식사를 끝낸 직후. 문 따기의 절정 고수, 로체가 내 방에 들어왔다.

“가죠, 레아 양.”

나는 긴장된 상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에서 당연하다는 듯 체이트가 따라붙었다.

로체가 항의했다.

“넌 안 돼! 저번에 네가 얼마나 치사하게 굴었는지 잊었어?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로체가 검지로 눈물을 훔치는 척을 했다. 체이트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네 도움은 필요 없어. 밖에서 합류하지.”

그리 말하고 체이트는 사라졌다.

“……혼자선 외출 가능했구나.”

“레아 양도 몰랐습니까?”

“온종일 여기 있기에 못 나가는 줄 알았지.”

“……레아 양, 여전히 저놈을 잘 모르시네요.”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근거리 워프에는 다량의 성력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체이트가 나를 데리고 워프하지 않은 까닭은 불안정한 워프 후의 극심한 울렁증 때문이라고…….

“이제 정말 갈까요, 레아 양?”

“응.”

나는 로체의 마법으로 투명해진 채로 슬쩍 밖을 나섰다.

중간중간에 하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긴장감에 몸이 굳었지만, 한편으로는 꽤 스릴 넘쳤다. 옛날에 좋아하던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온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이 마법, 나중에도 여차할 때 꽤 유용하겠는데?

하지만 로체의 말대로 유지 시간은 매우 짧았다. 나와 로체가 타운하우스를 나와서 골목을 찾아 들어가자마자 투명화는 풀려 버렸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체이트와 합류했다. 나는 미리 가져온 망토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눈에 띄는 분홍 머리를 하나로 묶어 망토 뒤로 가렸다.

“별일은 없었나요?”

체이트가 물어왔다.

“응. 첩보 작전 하는 것 같아서 좀 재밌었어!”

내가 흥분해서 주먹을 꼭 쥐고 말하자 그가 내 주먹 쥔 손 위로 커다란 제 손을 포개며 웃었다.

“그걸 더 좋아하실 것 같긴 했습니다.”

뒤에서 로체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계속 뒤에 있었으면서 모른 척은…….”

뭐가 뒤에 있었다는 거지?

“이제 가 볼까요?”

체이트가 손을 내밀었다. 난 조금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가 앞서고, 로체는 그 뒤를 어기적어기적 따라 걸었다. 계속해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우리가 가야 할 점집은 두 군데야. 하나는 14구역에, 다른 하나는 15구역에 있어.”

다행히 두 점집의 위치는 도보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편이었다.

“하나는 주택 단지 안에서 비밀리에 운영이 되는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점포처럼 골목 끝에 있다네.”

귀부인들이 이런 외진 곳에 있는 점집을 간다니 조금 신기했다. 아니, 보통은 저택으로 부르려나?

그들은 상대를 오가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출 성인인 나는 직접 발로 뛰어야 했다.

“주택부터 가 보자.”

우리는 약도를 들고 14구역의 주택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전혀 점집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정집 앞에서 종을 울렸다.

“점쟁이님, 계시나요?”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아닌가? 돌아가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아, 어쩐 일로 오셨죠?”

한 손에 어린아이를 안아 들고 레이스 앞치마를 한 남성이 땀을 삐질 흘리며 나왔다.

“보시다시피 지금 영업시간이 아니라서…… 으음, 하지만 간단한 신점은 봐 드릴 수 있어요.”

작중에서 묘사된 코렐리아의 정보상은 ‘신출귀몰한 자’였다. 자식을 보거나 가정을 이룰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청년에 가까운 목소리의 소유자로 묘사되곤 했다. 이 남자는 적어도 삼십 대 후반은 훌쩍 넘어 보였다.

“뭐로 봐 드릴까요? 결혼 운? 재물 운? 앗, 제니스, 아빠 옷 입에 물지 마. 쪽쪽이 줄게, 응?”

“아, 아뇨. 괜찮습니다…….”

‘여긴 아닌 것 같다.’

나는 주택가에서 나와 15구역으로 가는 약도를 살폈다. 그러면서 아까의 남자를 떠올리고 웃었다.

“방금 봤어? 되게 가정적인 점쟁이였어.”

체이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게 좋으십니까?”

“뭐, 가정적인 남자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저도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응?”

“요리도, 빨래도, 청소도 다 잘합니다.”

“으응, 잘 알지.”

“앞치마도, 어떤 디자인이든 소화해 낼 자신 있어요.”

“구, 굳이?”

“물론 매일 밤 자녀 생산도 충분히…….”

“…….”

나는 조용히 약도를 들고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가자.”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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