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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68화 (68/140)

68화

며칠 후, 사냥 대회 날.

수도 인근의 북쪽 숲 초입.

사냥용 의복을 입은 남자들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금장 버튼이 달린 붉은 코트까지는 좋았는데 하얀 쫄바지는 조금 부담스러운 조합이었다.

그들은 등에 총신을 하나씩 멘 채 옆에 말과 시종을 하나씩 끼고 있었다.

개중에는 나와 포커를 함께 쳤던 데미안 포트도 있었다.

그가 살갑게 인사를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레티시아 양.”

“오랜만이에요, 포트 영식.”

실수로라도 하반신으로 고개 내리지 말자. 나는 만면에 작위적인 미소를 띠고 턱을 바싹 들었다.

“요즘은 어찌 지내고 있나요?”

“카드 게임 얘기를 하시는 거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꾹 참고 아버지 일을 거드는 중입니다.”

“그거 희소식이네요.”

나는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다 브링스턴가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돌아갔다.

옆에서 셀레나가 말을 걸어 왔다.

“언니 오늘 안색이 좋은가 봐. 다들 언니만 쳐다보네. 화장을 얼마나 열심히 한 거야?”

상냥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말씨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황제의 말마따나, 셀레나는 무도회가 끝난 이후로 유독 더 까칠해진 경향이 있었다.

브링스턴 후작이 장내 한가운데로 나와서 인사를 시작했다.

“큼큼, 모두 모여 주어서 고맙소. 그럼 오늘 사냥 대회의 룰에 대해 설명하겠소.”

브링스턴 후작이 대회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려던 그때.

“벌써 시작했소?”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폐, 폐하?”

황제, 하르온 헬리아스였다.

‘황제가 여기를?’

그뿐만이 아니다.

레오넬도 여기에 있었다.

황제는 원래 공식적인 자리든 비공식적인 자리든 절대 레오넬을 대동하고 나오지 않는데?

레오넬은 조금 주눅 든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황제는 제 자식의 긴장된 낯을 쳐다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브링스턴 후작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사냥하기 좋은 날이오. 아니 그렇소?”

황제의 말투가 처음에 듣던 것과 조금 달랐다. 사람 가려가며 하대하는 건가. 치사하게.

브링스턴 후작은 잔뜩 경직된 자세로 고개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폐하.”

“응, 그래서 나도 함께 구경이나 할까 하는데.”

황제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순간 내 쪽에서 시선이 멈춘 기분이 드는데 착각일까?

“내가 끼면 다들 많이 불편할 테니 여기 앉아 사냥감만 같이 보겠소. 괜찮겠소?”

이미 네가 여기 온 시점부터 다들 대단히 불편하다. 상사가 나는 2차 앉아만 있을 테니까 너희끼리 알아서 편히 놀라고 하면 퍽이나 편하겠다.

그냥 카드 주고 1차에서 떠나는 상사가 제일인 법인데 쟤는 그걸 몰라. 그냥 상품만 건네주고 떠나라고!

“물론 괜찮습니다, 폐하.”

브링스턴 후작의 승낙에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 반응했다.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본래 브링스턴 후작이 앉으려고 했던 상석이었다.

후작은 그 옆에 뻘쭘하게 서 있었다.

“시작하지.”

황제가 말했다. 주도권이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서 후작은 주최자에서 사회자로 위치가 강등되었다.

“그, 그럼 룰을 설명하겠습니다. 사냥감의 점수 산정 방식부터 말씀드리죠. 크기를 우선으로 해서 점수를 책정하고, 그다음 마릿수로 점수를 매깁니다. 날짐승만은 크기와 무관하게 고득점으로 처리합니다.”

“그렇군. 다들 독수리를 잡아 오면 좋겠네.”

황제의 말을 끝으로 사냥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다들 처음엔 뻘쭘해 하는 눈치였지만, 말을 고르기 위해 좌석에서 일어난 시점부터는 슬슬 제 페이스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승마도 사격도 모르는 터라 빈손에 활만 덜렁 들었다. 그냥 장식용 액세서리나 다름없었다.

“어머, 언니. 그 활 역사책에서 본 적 있어. 반세기 전 유물이잖아.”

21세기 안목을 가진 내 눈엔 네가 든 소총도 반세기 전 유물이다.

“셀레나, 총 쏠 줄 알아?”

“당연하지. 내가 못하는 게 어디 있어?”

셀레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총신을 등에 메고 말에 올랐다. 안장에 다리를 걸치고 올라가는 폼이 아주 능숙했다.

그나저나 나는 승마에 전혀 소질이 없는데. 걸어서 돌아다녀야 하나?

어차피 적당히 시간만 보내다 티룸으로 들어가서 귀부인들 얘기를 엿들으며 정보를 수집할 예정이라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무리에 사람이 여럿이면 참견을 좋아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은 있는 법이지.

“말을 못 타시나요?”

매부리코 청년이었다. 무슨무슨 자작이라고 인사했는데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잘은 못 타요.”

목장 견학조차 가 본 적이 없지만 문외한이라고 하기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제 뒤에 타십시오.”

“아뇨, 그럼 사냥에 방해될 거예요.”

“그러면 영애께서 말에 타시고 제가 영애를 모시고 걸을까요?”

“그것도 사냥에 방해될 것 같네요. 그냥 제가 걸어갈게요.”

내 딴에 정중하게 거절하고 숲길로 걸어가자 뒤에서 그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럼 저도 걸어가겠습니다.”

“사냥…… 안 하세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사실 살생은 별로 즐기질 않아서요.”

그 점에 대해선 나와 의견이 같았다. 나는 그가 옆에서 따라 걸어도 별말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겹게 말을 붙여 오자 조금 짜증이 일었다.

“영애, 실례가 안 된다면 통신구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브링스턴 후작 각하와 제 아버지가 막역한 사이인데 알고 계셨습니까?”

“카히텐 대공 전하와 영애의 약혼이 불발됐다면 그다음 순위는 저였을 겁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안 궁금하다.

나는 이제 이 작자가 차라리 사냥터에서 사냥이나 하기를 바라게 됐다.

“영애, 영애.”

“왜요.”

이제 내 대답에는 살짝 짜증이 섞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행로는 이쪽입니다.”

“…….”

그런가? 길은 왼쪽으로 나 있는 것 같은데. 그가 가리킨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이쪽이 더 빠릅니다.”

“아, 그래요……?”

“네. 적어도 정해진 코스 한 바퀴는 다 돌아야 원래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잖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서 쉬죠, 우리.”

그건 그랬다. 이 숲은 원형으로 길이 나 있어서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사냥터를 한 바퀴 빙 돌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나는 출발지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가 씩 웃었다. 그의 어금니가 불길할 만치 반짝 빛났다.

* * *

같은 시각.

셀레나 브링스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필 자신이 레티시아에게 덫을 놓은 오늘, 황제가 브링스턴가의 사냥 대회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가 비공식적인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영광스러운 최초가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귀하신 약혼자의 등장이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왜 하필…….’

그녀는 말을 타고 가는 내내 붙어오는 추종자 무리를 피해서 한적한 숲길을 따라가며,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황제가 오는 순간 계획을 취소했어야 했나?’

아니, 그럴 틈은 없었다.

황제는 자신에게조차 어떠한 예고도 없이 찾아왔으므로.

‘그 녀석이 차라리 원래의 계획을 포기했으면 좋겠는데.’

그 녀석.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드미트리 디아벤 자작 영식을 이르는 말이었다.

드미트리는 황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건 아르키드네가 아니라 헬리아스, 즉 황가였다.

그가 헬리아스의 광신도라는 사실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평소엔 성실하고 모범적인 귀족 영식인 척하고는 지내왔으니까.

하지만 셀레나는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 독대하던 중 제 구두에 입술을 맞춰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변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깃든 것은 오로지 무한한 경애와 추앙뿐이었고, 태도에 그녀를 향한 저열한 욕망이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셀레나가 황실에 소속될 여인이기 때문에 그녀를 섬기기로 결심한 자였다.

셀레나는 그날부로 드미트리를 제 개처럼 부려 왔다.

그는 셀레나의 명령이 황실의 안위나 명성과 아주 조금이라도 맞닿아 있는 이상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셀레나는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우리 언니가 브링스턴 가문에 먹칠을 하고 있어. 나는 이대로 언니의 오물을 대신 뒤집어쓴 채 폐하의 부인이 되겠지.’

드미트리는 그녀의 슬픔에 분노했다. 그녀를 인간적으로 사랑하거나, 존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속할 황실에 오물이 묻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셀레나는 드미트리를 살살 건드렸다.

‘언니만 없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텐데.’

그가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릴 수 없게끔, 아주 교묘하고 신중하게.

‘너는 알지? 내가 황실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간 얼마나 애써 왔는지.’

드미트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제가 해결하죠.’

소처럼 맑고 새카만 그의 눈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광채가 서렸다.

‘그 여자를 끝장내면 되는 거지요? 브링스턴 가문과는 무관하게.’

셀레나는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런 걸 부탁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난 그저 속이 상해서…….’

‘예, 이건 순전히 저의 선택입니다.’

그가 말했다.

‘저는 헬리아스의 이름에 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면 누구라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순간 셀레나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다음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이 황후가 되기 전에 반드시 손을 봐야 할 위험 분자였다.

‘하지만 아직은 이용 가치가 있지.’

셀레나는 그를 향해 애써 미소 지었다.

사냥 대회 이틀 전의 일이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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