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셀레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구석의 남녀 한 쌍을 주시했다. 드미트리와 레티시아였다.
둘은 서로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이내 안쪽으로 사라졌다. 일단 여기까지는 모두 그녀가 원했던 대로였다.
‘나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제 손에 직접 피를 묻히기 싫어서 드미트리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만큼 언제 어떻게 그의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은 황제의 약혼녀지, 헬리아스의 후손이 아니었으니까.
드미트리가 제 언니를 계획대로 처리하는지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또한 일이 공론화되는 경우, 제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해야만 오발로 인한 사고라며 위증을 해 줄 수도 있을 테고.
드미트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지만, 지금처럼 위험한 일에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자였다. 고작 레티시아 하나 처리하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그에 대한 의심과 옹호를 모두 충족하기 위하여, 셀레나는 그들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녀는 둘이 사라진 방향을 눈여겨보고는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연기를 펼쳤다.
“아, 저쪽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앗, 토끼가 지나갔어요!”
행로 밖의 수풀을 가리키자 옆에 있던 데미안 포트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토끼요? 저는 못 봤는데…….”
“아뇨, 분명히 봤어요. 영식이 눈이 안 좋아서 제대로 못 본 걸 가지고 절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마세요.”
셀레나의 과잉 반응에 데미안이 당황했다.
아니, 토끼 좀 못 본 걸로 그렇게까지? 내 눈은 날아가는 새도 잡아챈다고!
그는 살짝 울컥했지만, 귀족 영식답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정중히 말했다.
“제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영애께선 여기 계세요.”
“지금 제 사냥감을 훔치려는 건가요? 저쪽의 토끼는 제가 발견했으니 제가 직접 가서 잡겠어요. 다들 눈독 들이지 마요.”
셀레나가 데미안에게 날카로운 비난을 던지며 수풀로 말을 몰았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데미안의 얼굴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절대 따라오지 마세요!”
그녀는 귀찮은 족속들을 떼어내고 외따로 떨어지자마자 레티시아와 드미트리를 찾았다. 하지만 바닥의 흙이 바싹 말라 있어서 발자국으로 사람을 추적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 짧은 새에 말도 없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도와주려고 해도 이렇게 합이 안 맞아서야. 셀레나가 혀를 찼다.
하여간 드미트리 디아벤, 헬리아스밖에 모르는 외골수 같으니라고.
배포가 커서 일을 맡기기엔 좋지만, 일을 함께하기엔 최악인 상대였다.
‘몰라, 난 노력했어.’
인내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셀레나는 금세 지쳤다.
‘드미트리가 알아서 하겠지. 불안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제 와 마음이 변할 가능성은 작을 거야.’
설령 알아서 하지 못하더라도 제게는 심증 외의 증거가 없었다. 일이 꼬일 경우, 그에게 모든 문제를 덮어씌우면 그만이다.
기껏 도와주려고 왔는데 상대가 자리에 없다. 저로서는 할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됐어.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그냥 목격자가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짜증이 배가 된 얼굴로 돌아섰다.
그때.
부스럭-
풀숲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엔 꾸며낸 게 아니라 진짜였다.
‘사냥감인가?’
토끼를 잡는다고 나와선 드미트리와 레티시아를 찾는다고 시간을 꽤 허비했다. 이대로 사냥감 한 마리도 못 잡아서 가면 그것도 그거대로 창피스러운 일.
셀레나는 얼른 등에 멘 총을 풀어 어깨에 졌다.
타다다닥!
오른쪽에서 왼쪽, 숲길을 따라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수풀이 움직이는 방향을 잡아가며 차례로 총을 쐈다.
탕! 탕! 타앙!
“컁!”
짐승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났다.
‘잡았나?’
수풀의 움직임이 멎었다.
셀레나는 말에서 내려 마지막으로 총을 겨눈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의 수풀을 들춰, 제 사냥감을 찾았다.
‘작은놈 같았는데. 토끼인가? 아니면 족제비? 뭐가 됐든 점수는 별로 안 되겠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관목 사이를 양쪽으로 잡아 벌린 순간.
“……어?”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어, 어어?”
뒷걸음질을 쳐 봐도 늦었다.
그녀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황자가 왜 여기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야수화가 풀린 꼬마 황자, 레오넬 헬리아스였다.
“어, 어떡하지?”
사생아라고 해도 황자는 황자다. 헬리아스 황실의 피가 흐르는.
그를 속으로 무시하는 것과 대놓고 상해를 입히는 건 죄의 경중이 달랐다.
“아, 아냐……. 이건 사고야…….”
셀레나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황자가 어떻게 여기에…….”
레오넬이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몰라.’
황족 시해는 즉결 처형 대상이다.
‘설마 나도 죽일까? 차기 황후인 나를?’
셀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혹감에 참지 못하고 터진 눈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작 사생아잖아. 어차피 황제감도 못 된다고. 내가 황후가 되어 황태자를 잘 낳아 주면 되잖아. 응? 그러면 되는 거잖아?’
자기변명과 현실 도피가 환상의 이중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드미트리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 미친 광신도가 이 꼴을 보면…….”
드미트리는 황실의 피를 제일 중히 여긴다. 외부에서 레오넬이 어떤 취급을 받고 살든 간에, 드미트리 기준에서 셀레나는 황실의 사생아보다 귀하지 않았다.
‘이걸 드미트리에게 들키면 선처고 뭐고 없을 거야. 내 짓이라는 걸 알면 앞뒤 안 가리고 나를 죽이려 들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셀레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셀레나는 재빨리 말허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안장을 채며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린 레오넬을 수풀 속에 홀로 내버려 둔 채로.
* * *
나는 걸어가는 내내 드미트리와의 동행을 선택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드미트리의 수다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전 사실 오래전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의학은 귀족의 업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본인 흥미죠. 약 제조나 해부가 천성에 잘 맞았거든요.”
자신의 장래 희망에 대해 늘어놓질 않나.
“아까 헬리아스 황제 폐하랑 레오넬 황자님 보셨습니까? 어찌 그리 빛이 나게 아름다우신지. 저는 그만 눈이 멀 뻔했습니다.”
갑작스럽게 황가에 대한 충심을 드러내고.
“이제 와 드리는 말씀이지만, 영애가 제 첫사랑이었습니다. 운명이 자꾸만 저희를 갈라놓은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모두 헬리아스의 뜻이겠지요?”
고백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물음까지. 하나같이 뭐라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미소 지어 주면서 뒤를 바라보았다.
“영식,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눈 좀 감아 주시겠습니까?”
수줍은 척하며 말하자 드미트리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말…… 이요?”
“네, 무척 중요한…….”
“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통한다. 그렇다면……!
‘에라이!’
나는 그대로 풀숲을 향해 달렸다.
“영애, 어딜 가시는…… 제길, 의외로 눈치가 빠르잖아?”
틀렸다! 이건 그냥 생존본능이야!
그를 따라갈수록 출발지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지름길이라고 했지만 샛길이 나오지도 않고 더 고요해질 뿐이다.
그의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거기 서!”
드미트리가 뒤에서 총을 들었다.
……아니, 미친. 총을 들었다고?!
“크크, 오늘의 사냥감은 너다!”
이 인간, 완전히 돌았다!
처음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총이 나오자마자 그럴 여유는 사라졌다. 나는 급한 대로 나무가 빽빽한 숲속으로 눈을 돌렸다.
‘내 동체시력으로 총을 피할 수는 없어. 빗맞을 확률을 높여야 해!’
나는 갈지자로 나무 사이를 내달렸다.
탕!
첫 번째 총성.
빗나갔다.
“젠장!”
드미트리가 욕설을 짓씹으며 두 번째, 세 번째 발포를 이어갔다. 하지만 총알은 모두 나무에 맞았다.
그리고 네 번째.
타앙!
픽……!
총알이 내 바로 옆을 지나갔다.
“히익!”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안 돼! 악으로 깡으로 버텨!’
이 악물고 달려 나가는 와중에 다섯 번째 총알이 다가왔다. 나는 그 총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등을 보이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늦게, 총알이 정확히 내 머리를 노리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억.”
다행히 나는 살아 있었다.
누군가가 나와 드미트리 사이를 가로 막고 서 준 덕분에.
“……체이트.”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상기된 얼굴에는 미미한 분노와 절박함이 뒤엉켜 있었다.
“진짜 한시도 눈을 못 떼겠네요.”
“……미안.”
“무사하시다니 됐습니다.”
그의 주먹 쥔 손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손을 펴자 총알이 툭 떨어졌다. 성력이 깃든 연기와 함께.
“누, 누구야! 거기!”
드미트리가 총을 두 손에 들고 달려왔다.
그를 바라보는 체이트의 붉은 홍채가 위험한 빛을 띠었다.
“체이트……!”
내가 그를 부름과 동시에 체이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을 한번 깜박이는 사이, 그는 어느새 드미트리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커흑! 사, 살려…….”
“헬리아스의 개로군. 이것도 황제의 소행인가?”
“폐……하는 모르…… 내 독단…….”
“그렇게 나오신다?”
체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투둑, 뭔가가 꺾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이어졌다.
드미트리가 축 늘어졌다.
“주, 죽은 거야?”
체이트가 그를 내던지며 대답했다.
“기절시킨 것뿐입니다. 아직 죽일 생각 없으니 걱정 마요.”
그가 나를 보며 다정하게 말하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드미트리를 내려다보았다.
나지막한 음성이 선뜩하게 귀를 울렸다.
“감히 당신을 건드렸는데 이대로 편히 죽게 놔둘 수는 없죠.”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