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체이트는 둥근 진을 그리고 그 위에 드미트리를 질질 끌어다 놓았다. 그가 무어라 주문을 외자 하얀빛과 함께 드미트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한 거야?”
“수도 쪽 신전으로 보냈습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대가는 주교와 사제들이 알아서 결정할 겁니다.”
사제는 목숨을 귀히 여겨서 사람을 쉽게 죽이지 않거든요. 그 말이 어딘지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목숨만 붙여 놓고 원하는 정보를 취할 때까지 고문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나는 눈을 찌푸리고 있다가 머리를 휘저었다.
“너,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분명 로체랑…….”
“그 노인네가 저를 불러내긴 했죠.”
체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우뚱 기울였다.
“제가 그 노인네 부름에 순순히 나갈 것 같습니까?”
“아…….”
“차라리 레티시아 당신이 필요한 게 있다고 하시지. 그랬다면 알고도 속는 척 정도는 했을 텐데.”
로체에게 부탁한 게 화근이었구나.
나는 내 엉성함에 스스로 감탄했다. 이렇게 단순 무식할 수가.
“그럼 처음부터 나를 따라다닌 거야?”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체이트가 눈매를 좁혔다.
“이쪽도 예상 밖의 방해를 받아서요.”
“방해?”
“오늘 이곳에 헬리아스 황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아, 응. 왔어.”
황제가 일개 후작의 사냥 대회를 참관하러 오다니, 조금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자가 제 미행을 눈치채고 방해 공작을 펼쳤어요. 이 숲 전체를 결계로 둘러쳐서 진입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죠.”
헬리아스 황제가 체이트를 일부러 떼어놓았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내 신변을 위협했다.
‘이건 설마…….’
“네. 헬리아스 황제가 레티시아, 당신을 표적으로 노린 겁니다.”
“엥, 내, 내가 뭐라고?”
나는 일개 후작가 천덕꾸러기 영애일 뿐이다. 능력도 쥐뿔도 없는…….
“레티시아, 당신이 황제의 공격을 받은 건 처음이 아닙니다.”
체이트가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엔 당신이 이안 카히텐의 약혼자이기에 황제의 경계심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편이 논리적으로 제일 타당하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이안 카히텐과 파혼했을 때, 적어도 당신을 향한 위협은 더는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체이트가 침음했다.
“방심했어요. 그 자가 일반인의 논리로 움직이는 작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도, 평범한 잣대를 세워 멋대로 결론을 내리다니.”
“체이트…….”
“어쩌면, 그는 저 때문에 당신을 노린 걸지도 모릅니다.”
체이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겼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제 눈을 손으로 가렸다.
“제가 그와 반목했기에…… 제게 특별한 당신을 두고 협박하고자 했던 걸지도…… 레티시아, 나 때문에 당신이.”
“그만해.”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두 손을 잡아 내렸다.
“난 오늘 네 덕분에 살았어.”
드러난 그의 눈은 전보다 훨씬 대꾼했다.
“네가 내 은인이야. 내 은인을 함부로 탓하지 마.”
“…….”
그가 눈을 내리감았다.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그의 상앗빛 볼을 타고 그림처럼 흘러내렸다.
“레티시아, 나는…….”
그가 작게 읊조렸다.
“나는 당신의 은인 같은 게 아니에요.”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헛소리를 내뱉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
상황에 맞지 않는 욕구가 들었다.
저 뺨을 붙잡고 그와 깊숙이 붙어 있고 싶었다. 냉소적이면서도 뜨거운 저 사내의 입술에 나를 아로새기고 싶었다.
‘…….’
나는 욕망대로 그의 두 뺨을 붙잡았다. 내 손바닥이 그의 눈물로 축축해졌다. 뜨끈한 액체의 감촉이 기꺼웠다.
“체이트.”
그와 눈을 맞추고, 발끝을 올리고, 턱을 들었다. 눈을 깜박이던 그가 순응하며 머리를 숙여 주었다.
우리의 입술이 숨결이 통할 만큼 가까워진 순간.
……탕!
총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탕탕탕! 연달아 여러 번.
사냥 대회니만큼 총소리가 들리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가까웠다.
기존 행로를 생각해 볼 때 이렇게 지척에서 소리가 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레티시아.”
“자, 잠시만.”
나는 마지못해 그를 밀어내고 총성이 울린 방향으로 걸어갔다. 행로로 돌아가는 방향이기도 했다.
“이쯤인데…… 아.”
빠르게 행로로 돌아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말 한 필과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분홍 머리.
범인은 수많은 단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셀레나가 여기 있었다고?”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가 머물러 있던 수풀 근처를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 아이는…….”
아주 어린 꼬마 아이였다.
오동통한 볼과 짧은 팔다리를 가진 금발 남자아이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뒤따라온 체이트가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레오넬 황자로군요.”
그가 난처한 듯 말했다.
* * *
나는 황자의 몸을 확인했다. 총알이 박힌 흔적은 없다. 혈흔도 없었다.
내 입술 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놀라서 기절한 거야.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경험이긴 하지.”
그를 안쓰럽게 보며 안아 드는 나를 체이트가 탐탁잖게 바라보았다.
“헬리아스의 핏줄을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어린애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는 차마 더 의견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황자가 어째서 여기에 있었는지, 그 이유는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 일단 데려가서 상태부터 보게 하고.”
“…….”
그가 마지못해 레오넬을 안아 들었다.
행로를 되짚어 돌아가는 길. 체이트가 속삭였다.
“그런데 아까 하시려던 거, 안 하실 겁니까?”
“그, 그게 뭔데?”
민망해서 모른 척하자, 체이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모르시면 다시 알려 드릴까요?”
“괘, 괜찮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그럼 그럴 때가 되면 해도 되나요?”
빙그레 웃으며 묻는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순진해 보였다. 진짜 심장 아프게 생겨서 사람 혼 쏙 빼놓는 데 뭐 있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몇 걸음 더 걷다가 작게 대답했다.
“……응. 해도 돼.”
위에서 잠깐 숨소리가 멎은 듯하더니, 장탄식이 흘렀다. 눈을 들었을 때 체이트는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또 제가 졌네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서 걸었다.
* * *
출발지로 돌아왔을 때, 대회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미 레오넬의 실종은 기정사실화되어 시종들이 숲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고, 대회의 주최자인 브링스턴 후작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자동으로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 옆의 체이트를 보고 의아함에 고개를 모로 틀었고, 체이트가 안고 온 레오넬을 보자 반색했다.
찰나에 몇 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건지 모르겠다.
“황자님!”
브링스턴 후작은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이었다. 반면, 그의 옆에 있던 셀레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불안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범인은 너니까.’
셀레나의 도망치는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죄 없는 어린 레오넬에게 총질을 한 것도 모자라, 그를 두고 자리에서 도망쳤다.
아마 패닉에 빠져 죽은 줄로만 알았겠지.
하지만 레오넬은 기절했을 뿐,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제 그가 눈을 떴을 때 증언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셀레나의 앞날은 끝장이다.
그녀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낯빛이 쥐색이었다.
‘죄짓고 못 산다더니.’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고 다시 브링스턴 후작을 바라보았다. 제 자식의 범죄를 알 리 없는 후작은 그저 자신이 주최한 대회에서 황자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여봐라, 황자님을 안으로 모셔!”
시종이 체이트에게 안겨 있던 레오넬을 숲에 마련된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브링스턴 후작의 관심은 이제 체이트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
그가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브링스턴 후작은 체이트의 얼굴을 아예 모르나? 명색이 귀족인데?
내가 의아해하자 체이트가 작게 귀띔해주었다.
“제가 대주교직에 오를 당시에 직접 참관하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제 얼굴을 모릅니다.”
아, 그렇구나.
하긴 브링스턴 후작은 딱 봐도 종교적으로는 열의가 없어 보였다. 그러니 집도 담벼락만 높고 신성으로 방어되지 않는 빛 좋은 개살구인 거겠지.
“이쪽은 그…….”
내가 둘러대려고 할 때, 헬리아스 황제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특유의 느물거리는 웃음과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말을 걸었다.
“이거 귀한 분이 오셨구려.”
“귀한 분이요……?”
브링스턴 후작이 슬쩍 다리를 굽혔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귀하다는 말 한마디에 일단 굽히고 본다니, 처세 하나는 만렙이다.
“인사하시오. 아르키드네 대주교요.”
“……!”
브링스턴 후작은 숫제 절을 할 것처럼 무릎을 굽혔다.
“아, 아이고! 대주교님이셨습니까!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그러다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길.
“한데…… 대주교님께서 어찌 제 여식과 함께 오시는지요?”
황제가 옆에서 껄껄 웃었다.
“후작, 장녀에게는 정말 관심이 없구려.”
“…….”
브링스턴 후작이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있었다. 셋의 이해관계가 각자 달랐다. 난 이들 사이에 낄 군번이 아니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끌어당긴 건 체이트였다. 그가 나를 보호하듯이 옆에 두고 말했다.
“브링스턴 영애가 오늘 불시의 습격을 받은 것을 제가 ‘우연히’ 보고 구했습니다.”
“오호. 우연히?”
헬리아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초승달처럼 휘었다.
“예. 그런데 또 우연히 그 범인이 헬리아스의 개가 아니겠습니까?”
“오…… 그거 정말, 우연이구려.”
“우연이 두 번이면 필연이 된다고도 하니, 일단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신전에 보내 두었습니다.”
가뜩이나 작은 황제의 눈이 더 작아졌다.
“내 관할 내에서 벌어진 일을 신전이 처리하겠다고?”
“폐하, 그 사내에게서 미미하지만 헬리아스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신전이 그를 심문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황제가 입을 다물자, 체이트가 들개처럼 눈을 빛냈다.
“신전은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릴 것입니다. 혹여, 불안하신 점이라도 있으신 건지?”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