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체이트의 압박에도 황제는 여유로웠다. 그가 싱글싱글한 웃음을 입에 걸고 턱을 매만졌다.
“과연 그렇군. 불안할 건 없지. 그럼 나도 신전의 결과에 따라 처분을 맡기겠어.”
그가 만약 제 수하를 써서 나를 해하려고 한 거라면 분명 어떻게든 신전으로부터 드미트리의 신병을 확보하려 들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미온했다. 체이트도 예상 밖이었는지 설핏 인상을 썼다.
황제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영애의 일은 참으로 유감이야. 하지만 나 역시 내 아들이 성치 않게 돌아와서 말이지. 왜 저리되었는지 알고 싶은데.”
“……히끅!”
방금 건 셀레나의 딸꾹질 소리였다.
‘아주 내가 범인입네, 하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나는 그녀를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레오넬이 일어나면 그녀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때마침 레오넬을 천막 안으로 데리고 갔던 시종이 달려 나왔다.
“폐하, 황자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래? 몸 상태는 어때?”
“그게…….”
시종이 무어라 말하기 직전, 셀레나가 외쳤다.
“저, 저기 폐하!”
“셀레나.”
황제가 그녀를 돌아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왜 끼어드니.”
“저, 그게, 저는…….”
“내가 지금 내 아들 안부를 묻고 있잖니. 사안이 급한데 눈치 없이 이럴래?”
전혀 급박하지 않은 투로, 그가 물었다.
셀레나는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어떻든?”
“심적인 충격으로 정신을 잃으신 것뿐, 전반적으로 큰 문제는 없으십니다.”
“충격이라니, 무슨 소리니?”
“그…… 황자님의 말씀으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총을 쐈다고 하십니다.”
“흐읍……!”
브링스턴 후작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
“그래, 그래. 일단 얘기 좀 듣자. 자, 누가 쏘았는지는 기억한다고 하고?”
두근두근.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황제 홀로 여유로운 가운데 시종이 입을 열었다.
“예, 어렴풋이 기억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털썩.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안 봐도 셀레나다.
음, 억울하긴 하겠지. 셀레나도 미치지 않은 이상 고의로 레오넬에게 총을 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놓고 간 건 고의다. 애한테 진짜 너무한 짓이지.
“누구래?”
황제가 물었다.
“분홍 머리 여자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분홍 머리?”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에서 분홍 머리는 브링스턴 가문뿐이었다.
브링스턴 후작이 재빨리 무릎 꿇고 읍소했다.
“폐하! 저희 가문은 모르는 일입니다!”
머리로 퍽퍽한 땅을 꽝 소리가 나도록 찧으며 후작이 말을 이었다.
“레티시아는 저희와 오랜 시간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도 실종 후 10년이 지나면 제국법상 사망자로 처리되어 법률적 상속 관계가 소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알고 있지.”
”저 아이는 정확히 10년, 저희에게 어떠한 연락도 없이 지냈습니다. 사실상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소원한 사이입니다. 하나, 뒤늦게 빈손으로 돌아온 핏줄을 무시할 수 없다는 셀레나의 상냥한 마음씨에 귀족의 도리로서 임시로 거둔 것뿐입니다!”
엥? 지금 설마 레오넬이 말한 분홍 머리가 저라고 생각하시는……?
나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새 체이트가 나를 제 뒤로 숨겼다.
“레티시아 양이 자작극이라도 펼쳤다는 거야?”
황제가 체이트와 나를 한 번에 시야에 담고 물었다.
“대주교님이랑 같이 온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가 가볍게 웃으며 가볍지 않은 소리를 툭툭 던졌다.
“헛소리 지껄이는 데 도가 트셨습니다.”
체이트가 비웃었다. 나는 뒤에서 체이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괜히 도발하지 마!
“이게 왜 헛소리지? 자, 다들 봐봐. 레티시아 양은 쓰러진 레오넬을 데리고 돌아왔어. 꼭 구해 준 것처럼 위장하면서 말이야.”
“그건 위장이 아니라……!”
“끝까지 들어 봐, 레티시아 양. 난 말꼬리 자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황제의 서늘한 시선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정말 ‘우연히’ 대주교님의 도움을 받아서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지. 너무 눈 가리고 아웅 아냐?”
황제가 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보기엔 레티시아 양이 신전과 결탁하여 불순한 의도로 황실을 위협하고 그 대가를 드미트리 군에게 지게 하는 것 같은걸.”
“……!”
이제 말 다 끝났지? 난 얼른 해명했다.
“말도 안 돼요. 그랬다면 제가 공격받았다고 꾸며 낼 이유도 없어요.”
“드미트리 군을 완전한 악인으로 만들 작정이었겠지.”
“제가 범인이면 레오넬 황자님을 손수 데리고 오지도 않았죠.”
“의심받지 않기 위한 행동 아니었을까? 정순한 성력은 기억을 지울 수 있잖아. 대주교님이 레오넬에게 손을 쓰셨을지도 모르지. 아, 물론 안타깝게도…….”
황제가 손바닥을 펼쳐 헬리아스의 성력을 내보였다.
“내가 레오넬에게 성력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씌워 놨기 때문에 조작은 먹히지 않았을 거야. 회심의 일격이었을 텐데, 신전 측도 영애도 안타깝게 됐어.”
“…….”
이건 분명 계략이었다.
나는 계략에 빠진 것이다.
황제와 셀레나의…….
‘아니, 셀레나는 아니야.’
그녀 또한 홍채가 진동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 얼굴이 연기라면 그녀는 연말 시상식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 이건 오로지 황제가 판 계략?’
고작 나 따위를 매장하기 위해서는 아닐 테고.
체이트를 올려다보면서, 자연히 답이 나왔다.
‘아르키드네 대주교와 신전을 모함하기 위해서…….’
이 사건이 체이트와 무관하지 않다고 결론이 날 경우, 신전은 황실에 먼저 위협을 가한 꼴이 된다.
즉, 헬리아스 황실은 아르키드네 신전이 선제 공격을 했다고 알리고 언제든지 위법하지 않은 전쟁을 끌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체이트가 황제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했던 말은 이런 의미였다.
헬레아스 황제, 그는 신전과 전처럼 동맹할 의지가 없었다. 그는 권력을 양분하는 대신, 자신이 온전히 두 집단의 권력을 흡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작에서 이안이 악신과 계약하여 금지된 사술을 부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코렐리아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남부와 북부가 대립한다면 그것은 아르키드네와 카히텐의 전쟁이 될 테고, 이는 곧 성전이라고-
황실과 신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헬리아스와 아르키드네의 성전을 바라고 있었다.
‘왜 굳이?’
그는 어차피 황궁의 최고 권력자였다. 신전이 그에게 먼저 위해를 가할 의도도 없었으므로 그는 원한다면 제 대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으로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굳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권력의 풀을 넓힐 필요가 있나?
체이트도 나만큼이나 혼란한 듯했다. 그는 아미를 일그러뜨린 채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팔 하나는 나를 감쌌으며, 다른 하나는 언제든 전투태세로 들어가기 위해 가슴께에 올려 둔 상태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만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보시기엔 분홍 머리 여자가 저 하나뿐인가요?”
셀레나가 흠칫거렸다.
“언니!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나는 그저 억울한 마음에 해명을 해 보려는 것뿐이야. 외향적 특징이 그뿐이라면, 그게 나라는 단서는 굉장히 희박하잖아.”
“레티시아! 가족을 의심하려 들다니, 해도 너무하는구나!”
브링스턴 후작이 나를 나무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아까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이라고 말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또 가족이래?
너넨 가족이 스위치냐?
기가 막힌 건 다행히 나만이 아닌 듯했다. 주변이 다들 웅성거렸다. 콩가루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셀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황제의 낯에 붙었다.
황제는 태연했다. 그는 남 말에 귀 기울일 위치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과 결과다. 나는 이제야 그의 목적을 알았고, 그가 원하는 결과가 ‘나의 몰락’이라는 걸 알아챘다.
또 이렇게, 한참 늦어서야.
자괴감이 밀려왔다.
“예로부터 아내를 의심하는 사내는 도량이 좁은 사내라 했지. 내가 어찌 셀레나를 의심하겠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체이트가 마주 웃어 주었다. 대각선으로 삐딱한 미소를 입에 걸고서.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요.”
“뭐가 말이오?”
“의도가 미심쩍어 그저 불길하기만 하였는데, 확실해지니 행동하기가 편해졌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체이트가 말했다. 그 역시 나처럼 ‘성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하하, 대주교께선 아직도 멀쩡한 사람을 오해하고 계시오.”
“멀쩡?”
체이트가 한쪽 눈썹을 우그러뜨렸다.
“헬리아스의 개가 신전에 있습니다. 그가 내놓는 답변이 폐하의 의도와 같을지 궁금하군요.”
“…….”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신전은 충심으로 언어를 금할 수 없는 곳입니다.”
금언령이 있듯이, 자백을 유도하는 것 또한 신성으로 가능한 모양이었다.
“애석하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디아벤 영식이 참으로 애석해. 그 젊은 나이에 어찌 그리 헛것에 미쳐서는…….”
마치 그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 확신하는 태도였다.
‘불길해.’
황제는 계략에 능통한 자다. 아니, 단지 능통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주변에 포진한 모든 말의 형태와 움직임을 이미 알고 움직이는 듯했다.
대국의 형상을 미리 보고 복기에 나선 기수 같았다.
마치, 2회차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두고 황제와 체이트의 대립각이 첨예해져 가는 사이, 체이트가 내게 고개 돌려 속삭였다.
“남부로 워프할 진을 준비해 왔습니다. 곧 이동할지도 모르니 절 잡고 계세요.”
내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나저나 워프를 미리 준비하고 여기까지 왔다니, 체이트도 보통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요는 각자가 얼마나 멀리 보고, 또한 정확히 보고 있냐는 것인데.
‘그렇게 먼 거리를 워프하면 체이트는 한시적으로 무력해져. 이건 체이트 쪽이 더 불리한 도박이야.’
내 탓이다. 나만 아니면 그는 이런 일에 휘말릴 일이 없었을 텐데. 내 안일한 선택이 체이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흙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아……브디.”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앳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나온 이는 레오넬 황자였다.
“아브디…… 그러디 마세여…….”
그가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차칸 누나야…….”
시종이 재빨리 뒤따라 나와서 그를 말렸지만, 좌중의 이목이 쏠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사이 레오넬이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고마어여…….”
해바라기처럼 티 없이 맑은 미소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다른 한곳에 다다랐고, 그 순간 그는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황자님!”
시종이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레오넬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흐으, 으…….”
내 손가락 한 마디밖에 안 되는 검지가 가리킨 곳은.
“저, 저 누나야…….”
셀레나 브링스턴이 서 있는 자리였다.
“저 누나가아…… 쏴써…….”
셀레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나는 그 모습을 주먹을 꽉 쥐고 바라보다가, 불현듯 황제를 돌아보았다.
내도록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던 그의 두 눈이 시뻘건 안구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레오넬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에서, 명백한 살의가 느껴졌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