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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72화 (72/140)

72화

레오넬은 아버지가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아버지를 발음하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황자님, 아바마마라고 하셔야 합니다.”

“…….”

“아니면 아버지, 라고 해 보세요.”

레오넬은 온갖 문장으로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세 살이 돼서야 황제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들 사이는 그만큼 소원했다. 처음에는 자식이 황제인 아비를 어려워하는 것이라 여겼으나, 이내 사람들의 판단은 다르게 변했다.

황제가 레오넬 황자에게 곁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때 열렬히 총애했던 평민 여자의 자식을 완전한 타인처럼 바라보았다. 아이의 이목구비가 그 여자를 꼭 빼닮고, 머리와 눈 색이 저와 똑같은 것을 보면 부성애가 생길 법도 했건만. 그는 줄곧 냉정했다.

레오넬은 황제가 제게 차가워진 시기를 알지 못했다. 제가 기억하기로 그는 늘 자신에게 무심하였다.

하지만 시종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주워들은 적이 있다.

‘황자님이 갓 태어나실 때만 해도 안 그러셨지.’

‘사생아는 입양을 보내는 게 원칙인데도 폐하께서는 황자님을 황궁에 입적시키셨잖아.’

‘당시만 해도 자식으로 아끼신 것 같은데…… 그새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어린 레오넬은 대부분의 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사실만은 제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아버지는 나를 아꼈어.’

시종장이 말한 대로 내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나서 나를 원망하신 게 아니야.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나를 아껴. 나는 아버지 자식이니까.

아직 제 언어로 구사할 수 없는 감정이 기원도 알 수 없는 맹목적 신뢰를 낳았다.

황제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레오넬은 항상 황제의 등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언젠간 돌아봐 줄 거라 믿으며.

그는…… 자신의 부모니까.

그렇게 고독을 다스리던 어느 날의 아침.

황제가 찾아왔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아버지가 저를 먼저 찾은 건 처음이었다.

“아브디……!”

레오넬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에게 달려가다 콰당 넘어졌다.

“흐으…….”

그가 울먹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커다란 신이 제 앞으로 다가와 섰다.

이윽고 손이 내려왔다.

“아프지? 잡고 일어나.”

“아, 아브디…….”

모든 게 처음이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같이 갈 곳이 있다.”

“어, 어디여?”

“숲.”

황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놀러 가자.”

레오넬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조아여!”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하루였다. 아침부터 꿈꿔 온 일들이 이뤄지는 마법의 동산에 빠진 것 같았다.

레오넬은 아버지와 함께 어딘가로 간다는 게 그저 좋았다.

그는 여느 때보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황궁 밖으로 나섰다.

아버지와 함께 간 숲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레오넬은 그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레오넬을 잘 모를 것이다.

황궁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던 그는 대체로 고양이 모습으로 궁 안을 몰래 돌아다니곤 했으니까.

그들이 기억하는 건 새끼 고양이뿐이겠지. 그마저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진 의문이었다.

그 와중에 레오넬은 한 여인에게 시선이 꽂혔다.

연한 분홍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한, 선한 인상의 여자.

저 여자는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사람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친절했다. 게다가 제 얼굴을 긁어주고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너무 능수능란했다.

무도회 밤에 여자가 저를 발견하고 턱을 긁어 줄 때, 자신은 하마터면 서서 졸 뻔했다.

‘좋은 누나야. 헤헤…….’

언젠가 또 그녀에게 가서 귀여움을 받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순수한 생각을 하던 중,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사냥감을 찾아 말에 오르고 숲으로 들어갔다.

레오넬은 황제를 따라 천막 아래에 앉아 있었다. 한창 뛰어다닐 나이였기에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자 좀이 쑤셨다.

그때 황제가 속삭였다.

“심심하니?”

“네…….”

“그럼 내가 놀아 줄까?”

아버지가 놀아 준다고? 레오넬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황제가 그의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숨바꼭질하자. 네가 숨으면 내가 찾으마.”

“조, 조아여……!”

레오넬은 황제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고 숲으로 달려 나갔다.

어디에 숨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로 가면 그 사람들이 아버지를 몰래 도와줄지도 몰라.

절대 못 찾는 데에 숨어야지! 그래도 아버지는 분명 찾아내실 거야.

레오넬은 인적이 드문 수풀에 숨어들었다. 철저히 숨기 위해 몸집이 작은 고양이로 몸을 바꾼 상태였다.

그리고…….

셀레나가 그를 발견했고, 총을 겨누었고, 그는 혼이 쏙 빠져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천막 안이었다. 시종은 제게 물었다. 누가 황자님을 쏘았느냐고.

레오넬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분홍 머리 여자라고.

그는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 여자가 자신을 발견한 건 우연이다. 자신을 쏘게 된 것도 우연. 자신이 하필 거기 숨은 것도 우연.

그런데 왜…….

‘아버지, 왜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레오넬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린 소년의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허억…….”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는 내가 죽어도 좋았던 걸까. 그곳에서 영영 내가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 건 아닐까.

온갖 상상이 머리를 뒤덮었다.

암흑이 다가오고 있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그의 정신이 뭔가에 점점 먹혀들었다.

그때였다.

‘제대로 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귀를 쟁쟁 울렸다.

‘이게 진실 같아?’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었다.

‘이게 진실일 리가 없잖아.’

“누, 누구…….”

레오넬이 작게 웅얼거렸다.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너를 도우러 왔어.’

나를 도우러 왔다고?

실체도 없는 존재가 어떻게?

레오넬은 제가 귀신의 환청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깨 안으로 무릎을 말아 넣었다.

“누구야, 징짜…….”

‘레오넬 헬리아스, 네 아비처럼 잡아먹히지 마.’

목소리가 사라졌다.

레오넬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상한 환청 때문일까. 직전까지 죽을 것처럼 괴롭던 감정들이 말끔히 가셨다.

그는 이제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외부가 소란스러웠다.

그는 천막의 가림막을 열어젖히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아버지와 적안의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부분이 이해하지 못할 소리였다.

하지만 총명한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여전히 자세한 사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총에 맞는 것과 관련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건 용케 깨달았다.

그들은 저를 쏜 범인을 색출하고 있었다.

레오넬은 앞서 분명히 증언했다.

분홍 머리의 여인이 저를 쐈다고.

의심을 받고 있는 여인 또한 분홍 머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범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도회 날에 다정하게 대해 준 착한 누나였다.

‘누나가 오해받게 둘 수는 없어.’

레오넬이 뒤뚱뒤뚱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 * *

“셀레나가 쐈다고?”

황제가 턱을 괸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직전의 홉뜬 눈은 어느새 일자로 돌아와 있었다.

늦었어. 난 이미 네 눈동자가 시퍼렇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너 사실 엄청 당황했지?

나는 속으로 어린 레오넬에게 박수를 보내 주었다.

고맙다, 네가 내 은인이다!

셀레나는 예상치 못한 피해자의 직접 진술에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 저 아니에요!”

“마짜나!”

레오넬이 앙칼지게 소리치자 셀레나가 오른손을 가슴으로 당기고 몸을 흠칫거렸다.

“황자님, 제가 황자님의 새엄마가 되는 것이 그리도 싫으셨나요? 이리 모함까지 하시다니…….”

“아냐! 나 진짜 봐써!”

레오넬이 발끈해서 볼을 부풀렸다.

애 상대로 굉장히 팽팽하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셀레나를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왜들 그러시죠? 황자님께서 분홍 머리 여자가 범인이라고 진술하셨을 땐 다들 믿으셨잖아요? 그 대상이 제가 아니게 되니 갑자기 신빙성이 떨어지시나요?”

브링스턴 후작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가 공격적으로 내 팔을 붙잡으려다 도리어 다른 이에게 붙잡혔다.

“가까이 오지 마.”

체이트였다.

“대주교님…… 아무리 당신이라도 가족 간의 일까지 참견하시는 건 월권행위입니다.”

“가족? 누가 가족이지?”

체이트가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

“레티시아는 브링스턴 가문의 가족이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

브링스턴 후작이 분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체이트가 황제를 향해 말했다.

“누가 봐도 셀레나 브링스턴이 범인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으음.”

황제가 찌푸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벼랑 끝에 선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네, 셀레나 양.”

“폐, 폐하?”

“나는 약혼자로서 진심으로 당신을 믿어주려고 했지만 말이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래도 일단은 내 자식이 우선될 수밖에 없잖아?”

“어, 어떻게…… 그럼, 저희는…….”

셀레나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희는…… 파, 파혼……인가요?”

“파혼이라니.”

황제가 짐짓 놀라는 척을 하며 말했다.

“약혼은 당연히 무효지. 우리가 언제 무슨 사이던가?”

“……!”

“당신은 이제 반역자야. 황실과는 어떠한 인척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죄인이지.”

그의 말에 셀레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브링스턴 후작도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브링스턴 후작가의 사냥 대회는 그렇게, 누군가의 체스판 위에서 막을 내렸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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