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내, 내가 반역자라고?”
셀레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탐스러운 진분홍색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잡혔다.
그녀가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쥐어뜯는 모습을 황제가 느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죄인은 끌고 가.”
“폐, 폐하……!”
셀레나가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황제의 다리를 붙잡았다.
“사, 사, 사고였어요. 저는 사냥감을 잡으려고 한 거예요.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 말대로 사고였다면 왜 사태를 이 지경까지 방관한 거니?”
“그건…….”
“내 자식을 왜 그대가 아니라 레티시아 양과 대주교께서 데리고 왔을까.”
“……흐읍.”
셀레나가 울음을 삼켰다. 억울하지만, 할 말은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손가락을 떼어내며 조곤조곤하게 일렀다.
“손 떼렴. 무례하잖니.”
그가 셀레나를 치우고 브링스턴 후작을 돌아보았다. 후작 또한 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브링스턴 후작. 그거 알고 있지? 황족 시해 미수는 연좌라는 거.”
“……!”
브링스턴 후작의 낯에 먹구름이 졌다. 황제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조만간 관리들이 자네 집을 몰수하러 갈 거야. 섣불리 도망을 시도하면 죄목이 추가되니 신중히 생각해.”
황제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의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실종 후 10년이 넘은 자는 사망 처리됩니다. 과거의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죽었고, 새로이 입적을 시도한 레티시아는 방금 부친의 인지를 거부당했죠.”
방금 들은 손절 대사를 이렇게 역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브링스턴 후작, 고오맙다.
황제가 놀란 눈을 했다.
“의외네. 영애, 멍청한데 똑똑하구나.”
칭찬이랑 욕을 같이 들으면 욕만 들리니까 제발 하나만 해라.
“아무튼, 저는 브링스턴 가문과 일절 무관한 타인입니다. 연좌를 물 수는 없어요.”
자고로 선빵은 필승, 손절은 선착순이다.
후작이 먼저 내가 그의 자식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줄 따름이었다.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생글거리며 나를 요리조리 살폈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마다 체이트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례한 짓 작작 하시죠.”
“안 봐.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그가 툴툴거리며 시종에게 돌아갈 채비를 하라 일렀다. 나를 끌고 가겠다거나, 신전을 공격할 의사는 더 없는 듯했다.
브링스턴 후작은 넋이 빠진 상태로 기사들의 감시하에 자택으로 돌아갔고, 셀레나는 곧장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체이트는 나를 데리고 숲의 끝자락으로 워프했다. 그의 말마따나 구역질이 일 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한두 번이 아닌지 익숙해 보였다.
나는 어지러운 와중에 체이트의 손을 잡았다. 연거푸 터진 일련의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아서 그의 손이라도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살짝 올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감싸 잡았다.
“체이트, 우리 무사한 거 맞지?”
체이트가 몸을 반쯤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예, ……아직까지는요.”
그의 얼굴은 썩 개운치 않아 보였다.
“레오넬 황자의 증언은 황제의 계획 밖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왠지 그조차도 만에 하나의 가정으로 남겨 두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황제는 셀레나를 바로 버렸다. 마치 이미 버릴 준비를 하고 온 것처럼, 입에서 연좌니, 죄인이니 하는 말들이 술술 나왔다.
“수상하긴 해.”
“하지만 이로써 황제의 목적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체이트의 말에 나는 다시금 그가 자신을 이용하여 신전에 덮어씌우려던 죄목을 떠올렸다.
‘성전을 일으키고 싶은 거였다니.’
보통 성전이란 이안이 사술을 펼쳤을 때처럼 마지못해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나.
서로가 비등한 상태에서 전쟁을 한다면 대륙만 황폐해질 뿐일 텐데.
“위험한 사람이야.”
나는 일전 체이트가 황제를 두고 한 말에 십분 동의했다.
“미친 사람 같기도 하고.”
“…….”
내 말에 체이트가 잠시 침묵하다가 툭 내뱉었다.
“글쎄, 사람일까요.”
“……?”
“아닙니다. 그보다 브링스턴 가문이 무너졌으니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필요는 없겠죠.”
체이트가 화제를 돌렸다. 그는 뭔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실은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실은 신성으로 코렐리아와 외형이 유사한 여인을 봤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뭐? 정말이야? 그걸 왜 이제야…….”
“오늘에서야 들은 정보입니다.”
체이트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발견 장소는 대신전 근처니까 일단은 남부로 가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의 제안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도는 급변하고 있고 체이트는 황제의 영역에서 안전하지 않다.
만에 하나 지금처럼 나로 인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게 남은 일들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
“좋아, 가자. 남부…… 처음이라서 떨리네.”
내가 승낙하자 그가 씩 웃으며 내 손을 꽉 잡아당겨 주었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당신 곁에 있을 테니.”
* * *
체이트 폴린은 거짓말에 능했다. 솔직하지 못한 언사를 행할 때마다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없는 소리를 해 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코렐리아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의도가 선연해진 이상, 레티시아를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었다.
‘역시, 나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그녀를 노리는 것만도 아니었다.
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제는 레티시아의 목숨, 내지는 신병을 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레티시아가 가진 그녀의 비밀과 연관이 있겠지.’
체이트가 가진 단서들도 답을 도출해내지 못했으므로,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어보면 알려 줄까.’
마음 같아서는 직접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제 염려를 의심으로 오인할까 두려웠다.
이제 겨우 레티시아는 제게 마음을 열고 있다. 굳이 산통을 깨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단지, 레티시아의 곁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또한 그녀를 안전한 장소에 놓고 굳건히 지키고 싶었다.
그녀를 속여서라도.
* * *
사냥 대회에서 돌아온 후, 하르온은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선 계획들이 엉망진창으로 어그러졌다.
셀레나 브링스턴을 부추겨 제 대신 레티시아에 대한 악의를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이런 때에 쓰라고 괜찮은 인형도 보내 줬건만, 체이트 폴린의 등장으로 모두 망쳐 버렸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레티시아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홀로 겪었을 것이고, ‘각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체이트가 그녀 앞의 적을 허무하게 일소해 버렸다.
이런 결과를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대안으로 레오넬을 이용했다.
레오넬은 분명 야수화를 한 상태로 숲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들어가면 분명 무슨 사달이 일어날 것이 또 뻔했고.
레티시아가 그를 데리고 오지 않았어도, 그의 실종과 레티시아가 경로를 이탈한 것을 연관지어 그녀에게 책임을 묻고 신병을 확보하고자 했다.
제 손아귀 안에 들어온 그녀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서 강제로 각성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겸사겸사 신전과 황실의 관계도 계획한 대로 악화시킬 수 있을 테니 번거롭긴 해도 득은 더 많은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실패로 끝이 났다. 절망에 잠겨 조금씩 제게 예속되어야 할 레오넬이 멀쩡한 정신으로 나와서 그녀의 결백을 증언했기 때문에.
결국 결과적으로 이룬 건 브링스턴 가문의 파멸뿐이었다. 하지만 그 가문은 레티시아가 없으면 사실상 무가치하므로, 이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그 여자를 각성시켜서 그릇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다른 그릇을 이용해야 하나.’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녀는 성녀로 각성할 것이다.
당연하겠지. 그 영혼은 본래 ‘신의 가호를 받은 성녀’였고, 그녀의 신은 100년이 넘도록 그녀에게 내린 가호를 거두지 않고 있었으니.
비록 전생의 레티시아는 각성할 기회도 없이 죽어 버렸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각성시킬 테니까.
그리고 손에 쥘 것이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이라는 훌륭한 새 그릇을.
100년 전의 성녀, 그 영혼을 확보한다면 자신은 비로소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온전한 헬리아스의 힘을.
* * *
여신은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이 시작된 이 세계가 전과는 다른 결말을 맺기를 희망하면서.
마음 같아선 완전한 형태로 현신하여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의 현신이란 쉽지 않다.
신은 스스로에게 속박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의 한계는 신 스스로가 정한다.
대지가 갈라지는 최초의 순간, 그녀와 두 명의 형제들은 깊이 논의하여 각자의 한계를 정했다.
자신들의 무한한 힘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지 않도록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그러므로 여신이 제물이 없이 깃들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며칠뿐이었다. 그마저도 스스로 정해 놓은 계율에 의해 온갖 조건이 붙었다.
제 형제들이 어그러뜨려 놓은 기준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녀는 자신에게 더더욱 엄격해야 했다.
누구보다 그들의 해피엔딩을 빌지만, 자신이 이 계율을 어기는 순간 신의 힘은 완전히 제한이 풀려 버리고 만다.
남아 있는 한 녀석이 제한이 풀려 온전한 형태로 현신하는 날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기 위해 그녀는 노력해 왔다.
방금도 그러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제 형제의 그릇이 될 뻔한 어린 소년을 암흑으로부터 건져냈다.
다행히 그와 전생에 연이 있었기에 전음의 조건을 맞출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한 번, 다시금 그들의 앞에 현신하는 일뿐이었다.
아르키드네의 성녀, 코렐리아 폴린으로서.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