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요즘 너무 성격에 맞지 않는 빡센 나날들을 보냈다.
마침 휴식이 필요한 시기긴 했다.
물론, 휴식을 위해 떠나는 여정은 아니지만…… 남부는 원래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하잖아?
넘실거리는 파도와 모래사장, 야자수와 새파란 하늘을 보고 전혀 설레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돌하르방이다.
“삭막한 수도여, 안녕!”
북쪽으로 손을 흔들며 남부 중심지의 기차역에 내렸다. 킁킁, 내리자마자 짭조름한 바닷바람 냄새가 난다.
“세상에, 지중해 바다가 따로 없네!”
어떻게 한 대륙에 눈발 풀풀 날리는 북부와 야자수가 즐비한 남부가 함께 있을까. 신이 세 명이나 있으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라는 계시인 것인가.
“모래사장에 돗자리 깔고 10분만 누워 있고 싶다. 천국 온 기분일 것 같은데.”
“천국은 모르겠고 레아 양이 정신 못 차리고 계시는 건 알겠네요.”
함께 따라온 로체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넌 여기까지 왜 따라왔어.”
“글쎄 갈 곳이 없다니까요.”
“갈 곳이야 만들면 되지.”
“낯 가려서 안 돼요.”
또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한다. 나는 구인하지도 않는 알바를 하겠답시고 쳐들어왔던 전 알바생 로체를 무시하고 체이트에게 물었다.
“코렐리아는? 어디서 발견한 거야?”
체이트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대신전 근처였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돌아가죠.”
“아, 으응.”
코렐리아가 대신전 근처에 있었다……? 신전에 볼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의문을 뒤로 하고 체이트를 뒤따랐다. 로체는 주뼛거렸다.
“저는 신전은 좀.”
“응? 왜?”
“저 종교 없잖아요, 레아 양.”
그런 거라면 나도 딱히 없는데.
종교……가 있어야만 신전에 들어갈 수 있나?
난 걱정스럽게 체이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싱긋 웃었다.
“레티시아, 제가 신앙심이 깊어 보입니까?”
응, 종교는 별 상관없구나.
“그냥 들어가자.”
내 말에 로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냥 밖에 있겠습니다.”
“……?”
잘못 들었나?
“네가 밖에 있겠다고?”
“네.”
“……노숙을 하겠다고?”
“…….”
이건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로체에게 비상금을 쥐여 주었다. 이로써 카페 하면서 번 돈은 전부 다 썼다.
“이게 끝이니까 진짜 아껴 써.”
“흑, 레아 양…….”
뭔가 이제는 로체가 어디든 당연히 동행하는 일행처럼 느껴져서 방치할 수가 없었다.
나는 로체를 두고 체이트와 함께 대신전으로 워프했다. 이번에도 가까운 거리였지만, 역시나 멀미가 났다.
“괜찮으세요?”
체이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괘, 괜찮아.”
“더위 먹을까 봐 신성을 썼는데 오히려 고생만 시켰네요.”
그가 내 머리 위에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뜨거운 바람이라도 부니 좀 살 것 같았다.
“여기가 대신전?”
개방형 회랑으로 둘러싼 석조 건물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을 연상케 했다.
“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시원할 겁니다.”
체이트의 말대로,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면과 바람을 모아 주는 구조 덕분에 실내는 아주 시원했다.
“아, 살 것 같다…….”
체이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조금 쑥스러워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대신전 안에서의 그는 내가 아는 체이트와 달랐다. 모두가 그에게 ‘대주교님’이라며 정중히 인사하고, 멀찌감치서 그를 발견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의 옆에 있기엔 조금 민망한 엑스트라 같았다. 아니, 엑스트라 맞지 참.
내가 주뼛거리자 체이트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너…… 너 이래도 돼? 신전이잖아!”
“그게 왜요? 우리 무슨 짓 했나?”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무슨 짓 할 건가?”
“……!”
날이 갈수록 여우짓이 는다.
나는 체이트의 손을 확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 콩! 누군가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쳤다.
“괜찮으십니까?”
깡마른 손이 내 앞에 다가왔다.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나려는 순간, 체이트가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붙들고 악수를 하며 다른 손으로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안타카스 주교, 그간 신전은 평온했습니까?”
저 남자가 안타카스 주교구나. 그…… 머리털이 다 빠졌다던.
나는 그의 반질반질한 머리를 안타깝게 흘끔거렸다. 자꾸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걸 아는데도 시선이 위로만 쏠리니 나도 미치겠다.
그나저나 체이트를 싫어한다더니, 지금 두 사람은 제법 사이가 괜찮아 보였다.
이것도 다 황제 때문인가?
원래 적의 적은 동지라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정치 싸움이고 뭐고 한데 결집하기 마련이다.
“그다지 평온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대주교님께서 ‘그자’를 보내신 직후에 특히.”
안타카스 주교가 울상으로 하소연했다.
“귀족 가문의 사내를 멋대로 보내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그거 뒤처리하느라고 얼마나 골머리를 썩었는지 아십니까?”
드미트리 얘기로군.
그는 헬리아스 황제의 권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수도 쪽의 신전에서 대신전으로 이송된 상태였다.
실은 당시의 체이트를 보고 행동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나 보다.
“하지만 주교께서는 무사히 해결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의심되는 종자라고 말씀하시니.”
안타카스 주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자,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면 어떤 부분이 말씀이십니까?”
“그게, 신자인 저희 입장에서 보기에도 좀…….”
그가 반들반들한 머리를 긁적였다.
“광신도…… 같다고 해야 할까요.”
드미트리는 내가 봐도 헬리아스 신에게 미쳐 있는 것 같았다.
헬리아스는 딱히 제 힘을 나눠 주거나 진리를 베푸는 신도 아닌데 대체 그의 어떤 부분이 드미트리를 미치게 했을까? 궁금증이 치밀었다.
“뭐, 일단 가서 보시죠.”
안타카스 주교가 체이트를 안쪽 복도로 안내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체이트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같이 가요. 당신 일이기도 하니까.”
“……응!”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 * *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피 냄새가 훅 끼쳤다. 내가 하관을 틀어막자 체이트가 나를 끌어안고 성력을 풀었다. 그의 품에서 상쾌한 향이 흘러나왔다.
“괜찮아요?”
“으응.”
나는 함께 따라온 안타카스 주교의 눈치를 보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민망하다. 여기서 정말 이래도 되나…….
하지만 이 냄새를 그대로 맡다간 신전에서 오바이트하게 생겼다.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하며 나는 계속 체이트에게 안겨 있었다.
어두운 실내, 드미트리는 한쪽 벽면 중앙에 있었다. 나무 의자에 사지가 묶인 채였다.
“주, 죽었나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불길해서 묻자, 안타카스 주교가 고개를 저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드미트리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의 얼굴이 불쑥 올라왔다.
퍼렇게 멍든 볼과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 말라붙은 코피, 끈적끈적하게 뭉친 머리카락.
그리고 해죽 웃고 있는 눈과 입.
“히히히히히히!”
그가 괴이하게 웃었다.
원래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그는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신성을 써서 뇌를 살짝 건드렸습니다. 그 탓에 자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죠.”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게 만들어놨다는 거로군.
“우히히! 나는 여기 좋아! 어두워! 컴컴해! 내가 좋아하는 곳! 어두운 곳!”
나도 모르게 체이트의 품에 더 깊이 달라붙었다. 저놈, 너무 무섭다.
“말을 알아듣긴 합니까?”
“예, 대주교님.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통상적인 대화는 가능합니다.”
그 말에 체이트가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너, 레티시아를 해하려고 한 이유가 뭐지?”
“레티시아? 레-티-시-아-?”
그가 고개를 좌우로 연달아 갸웃거렸다. 보는 내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참 머리를 흔들던 드미트리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함지박 하게 벌렸다.
“아하! 셀레나 브링스턴의 언니!”
“그래.”
“그래! 하하!”
그가 과장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래! 그 여자! 그분을 망친댔어! 그분은 완전하고 무결하지! 그분은 말이야……! 그분은…….”
경박한 웃음이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그분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어.”
그가 흰 눈을 뜨고 말했다.
“그분의 권리를 탐하는 자, 소멸할 거야.”
“…….”
체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드미트리를 주시했다. 언제 정색했냐는 듯, 그는 다시 헤벌쭉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체이트가 한숨을 쉬고 물었다.
“다시 묻지. 레티시아 브링스턴을 해한 건 네 개인의 의지였나?”
“음……. 아니!”
체이트의 품에 얼굴을 반쯤 묻고 숨어 있던 나는 고개를 살짝 내밀고 귀를 쫑긋거렸다.
정신이 그나마 온전할 때, 그는 자신이 독단으로 나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 말은 그의 앞선 주장과 명백히 모순되는 말이었다.
‘혹시 헬리아스 황제가 사주한 건가?’
그렇다면 신전은 그를 압박할 무기를 하나 얻게 되는 셈이었다.
드미트리는 야비로운 웃음을 귀까지 걸고 말했다.
“셀레나 브링스턴이야.”
“……셀레나? 내 동생?”
“그래! 그 여자가 그랬지! 당신은 황실에 누를 끼치는 오물이라고!”
“…….”
셀레나는 이미 감옥에 있었다. 그녀가 무슨 죄를 더 저질렀건, 이는 지금 상황에서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착각이었나 봐.”
내가 실망해서 중얼거리자, 체이트가 내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착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여기까지가 헬리아스 황제의 안배인 거죠.”
“…….”
그렇다면 그는 대체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사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신중한 남자가 어째서 무의미한 전쟁을 일으키려는 걸까?
헬리아스 황제는 의문투성이였다.
내가 오래된 피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체이트에게 파고들며 힘들어하자, 그가 얼른 나를 데리고 나갔다. 나가는 뒤편에서 드미트리의 헛소리가 에코처럼 들렸다.
“그분은 모든 걸 알고 있어! 나는 그분과 만났지! 그분과 또 만날 수 있다면! 아아! 내 전부를 바쳐도 좋을 텐데!”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